[천자 칼럼] 조선의 도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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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의 다이토쿠지(大德寺)에 보관 중인 일본 국보 제26호 ‘기자에몬 이도다완’. 왜군이 임진왜란 때 웅천(경남 창원시 웅천동) 가마에서 빼앗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진상한 찻잔이다.
당시 일본에선 다도(茶道)가 유행했다. 다이묘 사이에선 질 좋은 조선 백자 다완(茶碗·찻잔)이 조그마한 성(城) 하나와 거래될 정도였다. 조선 도공(陶工)이 임진왜란 때 납치 표적이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1598년 일본 사가현으로 끌려간 이삼평은 일본 도자기 본향(本鄕)이 된 아리타의 이즈미야마에서 조선식 자기를 제작했다. 아리타에는 ‘일본의 도조(陶祖)’로 추앙받는 이삼평의 기념비와 ‘도공의 신’ 이삼평을 모시는 신사가 있다. 정유재란 때 피랍된 심당길은 유럽에서 격찬 받는 ‘사쓰마 도자기’를 만드는 심수관 가문의 시조다. ‘일본 도자기의 어머니’로 추앙받는 백파선은 ‘아리타 도자기 전성시대’를 열었다.
도공은 조선에선 멸시와 각종 부역에 시달리는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일본에선 사족(士族·사무라이)으로 대우받았다. 막부와 다이묘의 적극적인 지원과 조선 도공 특유의 섬세함과 장인 정신이 합쳐지면서 일본 도자기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백자 기술에다 거의 명맥이 끊겼던 고려 상감청자 기술을 활용한 채색(彩色) 도자기가 대표적인 제품이다.
당시 유럽인에게 하얀 도자기에 파란색 안료로 수놓은 청화백자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조선 도공이 만든 일본 도자기들은 명·청 정권 교체기 혼란을 틈타 중국산을 대체하며 세계 시장을 휩쓸었다.
세계 최고의 원천 기술을 갖춘 도자기 선진국 조선은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장인을 천시하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회구조 탓이었다. 일본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던 도공들이 귀국할 기회가 있어도 대다수가 현지에 남은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경기 김포시 한 중소기업을 찾은 문재인 대통령이 “임진왜란 때 일본이 탐낸 것도 우리의 기술이었다”고 말했다. “일본의 경제보복을 기술입국으로 극복하자는 의미를 담았다”는 게 청와대 설명이다. 기업인을 죄인시하고 각종 규제로 기술개발을 꽁꽁 묶고 있는 상황에서 기술입국은 공허하게 들린다.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일본에서 기술의 꽃을 피운 조선 도공의 교훈을 되새길 때다.
김태철 논설위원 synergy@hankyung.com
당시 일본에선 다도(茶道)가 유행했다. 다이묘 사이에선 질 좋은 조선 백자 다완(茶碗·찻잔)이 조그마한 성(城) 하나와 거래될 정도였다. 조선 도공(陶工)이 임진왜란 때 납치 표적이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1598년 일본 사가현으로 끌려간 이삼평은 일본 도자기 본향(本鄕)이 된 아리타의 이즈미야마에서 조선식 자기를 제작했다. 아리타에는 ‘일본의 도조(陶祖)’로 추앙받는 이삼평의 기념비와 ‘도공의 신’ 이삼평을 모시는 신사가 있다. 정유재란 때 피랍된 심당길은 유럽에서 격찬 받는 ‘사쓰마 도자기’를 만드는 심수관 가문의 시조다. ‘일본 도자기의 어머니’로 추앙받는 백파선은 ‘아리타 도자기 전성시대’를 열었다.
도공은 조선에선 멸시와 각종 부역에 시달리는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일본에선 사족(士族·사무라이)으로 대우받았다. 막부와 다이묘의 적극적인 지원과 조선 도공 특유의 섬세함과 장인 정신이 합쳐지면서 일본 도자기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백자 기술에다 거의 명맥이 끊겼던 고려 상감청자 기술을 활용한 채색(彩色) 도자기가 대표적인 제품이다.
당시 유럽인에게 하얀 도자기에 파란색 안료로 수놓은 청화백자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조선 도공이 만든 일본 도자기들은 명·청 정권 교체기 혼란을 틈타 중국산을 대체하며 세계 시장을 휩쓸었다.
세계 최고의 원천 기술을 갖춘 도자기 선진국 조선은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장인을 천시하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회구조 탓이었다. 일본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던 도공들이 귀국할 기회가 있어도 대다수가 현지에 남은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경기 김포시 한 중소기업을 찾은 문재인 대통령이 “임진왜란 때 일본이 탐낸 것도 우리의 기술이었다”고 말했다. “일본의 경제보복을 기술입국으로 극복하자는 의미를 담았다”는 게 청와대 설명이다. 기업인을 죄인시하고 각종 규제로 기술개발을 꽁꽁 묶고 있는 상황에서 기술입국은 공허하게 들린다.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일본에서 기술의 꽃을 피운 조선 도공의 교훈을 되새길 때다.
김태철 논설위원 synerg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