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발 원자재 폭등'에 초호황 누린 조선·해운…금융위기로 침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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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본시장을 뒤흔든 사건
(27) 2003~2008년 원자재 슈퍼사이클
(27) 2003~2008년 원자재 슈퍼사이클
‘한진해운, 파산 선고.’
온 국민의 시선이 19대 대통령선거(5월 9일)에 쏠려 있던 2017년 2월 17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파산부는 병상에 누워 빚과 사투를 벌이던 한진해운에 ‘불치병’ 판정을 내렸다. 1977년 조중훈 창업자의 ‘수송보국(輸送報國)’ 이념으로 출범해 세계 7위에 올랐던 40년 역사의 허무한 마침표였다.
그해 한국 조선·해운산업은 중환자실로 변해 있었다. 현대상선은 악성 부채를 도려내는 수술을 받고 정부의 호흡기에 의존해야 했다. 조선 3사는 2015년 해양 플랜트 부문에서만 6조8700억원의 영업손실을 내고 빚더미 속에서 신음했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산업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추락한 걸까. 위기의 출발은 이들 모두가 사상 최대 이익을 만끽하던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3부터 2008년 사이 ‘원자재 슈퍼사이클(commodity super cycle)’이 세계를 휩쓸던 때였다.
사이클의 시작
“왜 자재를 안 보내줍니까!”
한반도를 할퀴고 간 태풍 ‘매미’의 피해복구가 한창이던 2004년 봄. 전국 중소 제강·주물공장의 고철(scrap iron) 창고가 갑자기 바닥을 드러냈다. 영문을 몰라 공급업체에 독촉해봐도 물량이 동났다는 답변만 되돌아왔다.
당시 한국은 터키에 이은 세계 최대 고철 수입국이었다. 한국의 공급난 소식은 곧바로 세계 고철값을 요동치게 했다. 2003년 평균 t당 13만원 하던 게 1년 만에 21만원으로 치솟았다. 자재를 구하지 못해 문닫는 기업이 속출했다. 예산을 묶어놨던 각종 관급공사와 피해복구 현장도 멈춰섰다.
다급해진 구매 담당자들은 새로운 해외 공급처를 샅샅이 뒤졌다. 그러다 글로벌 원자재시장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변화를 목격했다. 과거 터키와 한국을 오가던 수많은 고철 운송선이 대거 중국으로 뱃머리를 돌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비단 고철만이 아니었다. 중국은 전 세계 구리와 아연, 납 등 온갖 원자재 부스러기(scrap)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었다. 중고 부스러기 가격 상승은 쇳물로 만드는 철(열연코일)과 다른 금속제품으로 옮겨붙었다. 목재와 펄프까지 산업의 모든 ‘쌀’ 가격이 일제히 치솟고 있었다. ‘made in china’의 탄생
원자재 블랙홀의 설계자는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 사후 1978년 집권한 그는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만드는 대담한 실험을 벌였다. “쥐만 잡을 수 있다면(인민이 잘살 수 있다면) 검은 고양이(黑猫: 사회주의)든 흰 고양이(白猫: 자본주의)든 상관없다”는 실용주의 노선을 펼쳤다.
개혁·개방의 물꼬를 튼 중국 경제는 이후 연 10% 안팎의 놀라운 성장을 거듭했다. 1980년대 중국인 사이에선 ‘부를 이루는 것이 영광(成富光榮)’이라는 구호까지 유행했다. 사익 추구를 혹독하게 비판했던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대륙을 휩쓴 지 불과 10여 년 만이었다.
13억 인구의 원자재 수요는 1998년 주택 사유화 허용,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전후로 대륙의 공급능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중국 부자들은 난생처음 돈을 빌려 집을 짓기 시작했다. 각각의 인구가 4000만 명을 웃도는 10여 개 도시에 아파트와 빌딩이 솟아나고 다리와 도로가 깔렸다. 2008년 올림픽을 앞둔 수도 베이징과 상업도시 상하이는 타워크레인에 에워싸인 ‘정글’로 변했다.
심상치 않은 변화를 지켜보던 아준 머티 골드만삭스 수석연구원은 2005년 3월 “원자재시장이 슈퍼 스파이크(super spike)에 들어섰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당시 배럴당 50달러대였던 국제 유가가 수년 내 100달러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모두가 “황당한 전망”이라며 코웃음 쳤다.
‘고갈’ 공포의 확산
중국 경제는 빠르게 비대해졌지만 고속 성장은 멈추지 않았다. 2003년 10.0%였던 성장률은 2007년에 14.2%로 가속도를 내며 마침내 독일을 눌렀다. 상하이종합지수는 2007년 10월 6000포인트를 돌파해 불과 1년여 만에 500% 상승했다.
원자재도 더욱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폭넓은 원자재 가격을 추종하는 S&P GSCI(골드만삭스상품지수)는 2004년 5000을 돌파했다. 지수가 절반이었던 2001년 대비 모든 물가가 두 배로 올랐다. ‘월가의 전설’ 퀀텀펀드를 설립한 짐 로저스는 2004년 펴낸 <상품시장에 투자하라(Hot Commodities)>에서 “중국은 20년 안에 세계 최대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것”이라며 투자자들에게 “행동(원자재 매수)에 나서라”고 독려했다. 투기 수요까지 가세하면서 상품지수는 2008년 6월 10,000 선을 뛰어넘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2005년), 미국의 이란 제재 강화(2006년) 등 온갖 재해와 지정학적 충돌이 원자재시장을 달구는 투기 재료로 쓰였다. 서부텍사스원유(WTI)는 2008년 7월 골드만삭스의 ‘황당한 전망’을 넘어 147달러까지 치솟았다.
주식시장은 온통 중국의 굴기와 자원 고갈 공포가 지배했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은 2007년 10월 ‘인사이트’ 펀드를 출시하고 중국 증시에 최대 80%를 투자했다. 태양광발전 소재를 생산하는 OCI와 풍력발전 사업자 유니슨 주가는 2007년부터 2008년 사이 최고 열 배로 치솟았다.
금값으로 변한 뱃삯
겁에 질린 각국 정부와 기업은 생존을 건 원자재 확보 전쟁에 뛰어들었다. 남미와 중동, 아프리카 대륙의 원자재를 실어나르기 위해 지구상 모든 배가 오대양에 출항했다. 더 많은 배를 확보하려는 경쟁이 불붙으면서 ‘발틱 건화물 운임지수(BDI)’는 2년 사이 다섯 배나 뛰어 2007년 10월 10,000을 돌파했다. 원자재 더미를 나르는 ‘벌크선’ 한 척(17만t)의 하루 사용대금은 20만달러대(약 2억원대)로 치솟았다.
수백 척의 배가 세계에서 벌어들이는 현금이 해운사 회계장부에 비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국내 최대 벌크선사 STX팬오션은 2008년 6673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2004년 779억원의 아홉 배였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 역시 5000억원 안팎의 사상 최대 이익을 올렸다.
조선사 영업부 전화기에도 불이 났다. 한국 조선 3사는 2007년 한 해 660억달러(약 80조원)어치 주문을 받았다. 현대중공업의 영업이익은 2010년 무려 5조5000억원으로 불어났다. 계열사인 현대미포조선 주가는 2003년부터 2007년 사이 최고 120배 뛰어올랐다.
운명을 건 ‘도박’
해운업체들은 치솟는 운임을 활용해 더 많은 돈을 벌 방법을 모색했다. 빚을 내 장기로 배를 빌리고(용선), 다시 비싼 값에 짧게 빌려주는(대선) 사업을 공격적으로 확대했다. 운임이 오르면 더 나은 가격으로 다시 대선했다.
시장을 낙관하고 대규모 선박 제작(신조선 주문)도 병행했다. 한진해운이 주문한 신조선 잔액은 2009년 말 기준 약 30척으로 3조원대에 달했다. 하나같이 선대 확대에 집중하면서 빚도 급증했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의 총차입금은 2006년부터 2008년까지 매년 1조원씩 불어났다.
수주 곳간을 가득 메운 조선 3사는 중국의 맹추격을 따돌릴 천우신조(天佑神助)의 기회라 판단했다. ‘무(無)마진’을 무릅쓰고 경험이 부족한 해양 유전 관련 설비(해양플랜트) 공사를 따왔다. 기술력을 쌓아 고부가가치 시장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전략이었다.
모두가 쏟아지는 이익보다 훨씬 많은 빚을 내며 판돈을 올려나갔다. 그러다 2008년 9월, 미국의 투자은행(IB) 리먼브러더스의 파산과 함께 거짓말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동반 침몰
글로벌 금융위기는 원자재시장을 주무르던 선진국 금융회사들의 급격한 자금 회수를 촉발했다. 모든 상품 가격이 급전직하했다. 곧이어 선박 운임이 떨어졌고 신조선 주문 가격 급락이 뒤이었다. 선박의 운항 중단이 잇따랐다. 신조선 주문은 끊겼고, 발주 취소가 이어졌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2010~2011년 원자재 가격이 반등하자 선박 확충에 다시 한번 ‘올인’했다. 이익을 늘려 불어난 빚을 갚을 마지막 기회라 판단했다. 하지만 2012년 남유럽 국가(PIIGS)의 재정위기 확산으로 희망은 치명상으로 되돌아왔다. 닻을 올리는 배가 줄어도 각각 1조원대 임차료(용선비용)가 꼬박꼬박 계좌에서 빠져나갔다.
자산을 팔며 버티던 STX팬오션이 2013년 먼저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하며 백기를 들었다. 부도 공포가 매년 확산하자 금융당국은 2016년 4월 조선과 해운산업을 이른바 ‘취약업종’으로 묶고 수술칼을 잡았다. 이후 현대상선과 대우조선해양은 2016~2018년 조(兆) 단위 빚을 주식으로 바꾸는 출자전환을 시행했다. 같은 기간 현대중공업은 주주들로부터 1조원대, 삼성중공업은 2조원대 현금을 수혈했다.
한진해운은 한진그룹의 지원을 받다 2016년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그해 2월 운임지수(BDI)는 불과 290이었다. 사상 최고였던 2008년 5월 11,793의 2%였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
온 국민의 시선이 19대 대통령선거(5월 9일)에 쏠려 있던 2017년 2월 17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파산부는 병상에 누워 빚과 사투를 벌이던 한진해운에 ‘불치병’ 판정을 내렸다. 1977년 조중훈 창업자의 ‘수송보국(輸送報國)’ 이념으로 출범해 세계 7위에 올랐던 40년 역사의 허무한 마침표였다.
그해 한국 조선·해운산업은 중환자실로 변해 있었다. 현대상선은 악성 부채를 도려내는 수술을 받고 정부의 호흡기에 의존해야 했다. 조선 3사는 2015년 해양 플랜트 부문에서만 6조8700억원의 영업손실을 내고 빚더미 속에서 신음했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산업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추락한 걸까. 위기의 출발은 이들 모두가 사상 최대 이익을 만끽하던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3부터 2008년 사이 ‘원자재 슈퍼사이클(commodity super cycle)’이 세계를 휩쓸던 때였다.
사이클의 시작
“왜 자재를 안 보내줍니까!”
한반도를 할퀴고 간 태풍 ‘매미’의 피해복구가 한창이던 2004년 봄. 전국 중소 제강·주물공장의 고철(scrap iron) 창고가 갑자기 바닥을 드러냈다. 영문을 몰라 공급업체에 독촉해봐도 물량이 동났다는 답변만 되돌아왔다.
당시 한국은 터키에 이은 세계 최대 고철 수입국이었다. 한국의 공급난 소식은 곧바로 세계 고철값을 요동치게 했다. 2003년 평균 t당 13만원 하던 게 1년 만에 21만원으로 치솟았다. 자재를 구하지 못해 문닫는 기업이 속출했다. 예산을 묶어놨던 각종 관급공사와 피해복구 현장도 멈춰섰다.
다급해진 구매 담당자들은 새로운 해외 공급처를 샅샅이 뒤졌다. 그러다 글로벌 원자재시장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변화를 목격했다. 과거 터키와 한국을 오가던 수많은 고철 운송선이 대거 중국으로 뱃머리를 돌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비단 고철만이 아니었다. 중국은 전 세계 구리와 아연, 납 등 온갖 원자재 부스러기(scrap)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었다. 중고 부스러기 가격 상승은 쇳물로 만드는 철(열연코일)과 다른 금속제품으로 옮겨붙었다. 목재와 펄프까지 산업의 모든 ‘쌀’ 가격이 일제히 치솟고 있었다. ‘made in china’의 탄생
원자재 블랙홀의 설계자는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 사후 1978년 집권한 그는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만드는 대담한 실험을 벌였다. “쥐만 잡을 수 있다면(인민이 잘살 수 있다면) 검은 고양이(黑猫: 사회주의)든 흰 고양이(白猫: 자본주의)든 상관없다”는 실용주의 노선을 펼쳤다.
개혁·개방의 물꼬를 튼 중국 경제는 이후 연 10% 안팎의 놀라운 성장을 거듭했다. 1980년대 중국인 사이에선 ‘부를 이루는 것이 영광(成富光榮)’이라는 구호까지 유행했다. 사익 추구를 혹독하게 비판했던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대륙을 휩쓴 지 불과 10여 년 만이었다.
13억 인구의 원자재 수요는 1998년 주택 사유화 허용,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전후로 대륙의 공급능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중국 부자들은 난생처음 돈을 빌려 집을 짓기 시작했다. 각각의 인구가 4000만 명을 웃도는 10여 개 도시에 아파트와 빌딩이 솟아나고 다리와 도로가 깔렸다. 2008년 올림픽을 앞둔 수도 베이징과 상업도시 상하이는 타워크레인에 에워싸인 ‘정글’로 변했다.
심상치 않은 변화를 지켜보던 아준 머티 골드만삭스 수석연구원은 2005년 3월 “원자재시장이 슈퍼 스파이크(super spike)에 들어섰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당시 배럴당 50달러대였던 국제 유가가 수년 내 100달러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모두가 “황당한 전망”이라며 코웃음 쳤다.
‘고갈’ 공포의 확산
중국 경제는 빠르게 비대해졌지만 고속 성장은 멈추지 않았다. 2003년 10.0%였던 성장률은 2007년에 14.2%로 가속도를 내며 마침내 독일을 눌렀다. 상하이종합지수는 2007년 10월 6000포인트를 돌파해 불과 1년여 만에 500% 상승했다.
원자재도 더욱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폭넓은 원자재 가격을 추종하는 S&P GSCI(골드만삭스상품지수)는 2004년 5000을 돌파했다. 지수가 절반이었던 2001년 대비 모든 물가가 두 배로 올랐다. ‘월가의 전설’ 퀀텀펀드를 설립한 짐 로저스는 2004년 펴낸 <상품시장에 투자하라(Hot Commodities)>에서 “중국은 20년 안에 세계 최대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것”이라며 투자자들에게 “행동(원자재 매수)에 나서라”고 독려했다. 투기 수요까지 가세하면서 상품지수는 2008년 6월 10,000 선을 뛰어넘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2005년), 미국의 이란 제재 강화(2006년) 등 온갖 재해와 지정학적 충돌이 원자재시장을 달구는 투기 재료로 쓰였다. 서부텍사스원유(WTI)는 2008년 7월 골드만삭스의 ‘황당한 전망’을 넘어 147달러까지 치솟았다.
주식시장은 온통 중국의 굴기와 자원 고갈 공포가 지배했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은 2007년 10월 ‘인사이트’ 펀드를 출시하고 중국 증시에 최대 80%를 투자했다. 태양광발전 소재를 생산하는 OCI와 풍력발전 사업자 유니슨 주가는 2007년부터 2008년 사이 최고 열 배로 치솟았다.
금값으로 변한 뱃삯
겁에 질린 각국 정부와 기업은 생존을 건 원자재 확보 전쟁에 뛰어들었다. 남미와 중동, 아프리카 대륙의 원자재를 실어나르기 위해 지구상 모든 배가 오대양에 출항했다. 더 많은 배를 확보하려는 경쟁이 불붙으면서 ‘발틱 건화물 운임지수(BDI)’는 2년 사이 다섯 배나 뛰어 2007년 10월 10,000을 돌파했다. 원자재 더미를 나르는 ‘벌크선’ 한 척(17만t)의 하루 사용대금은 20만달러대(약 2억원대)로 치솟았다.
수백 척의 배가 세계에서 벌어들이는 현금이 해운사 회계장부에 비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국내 최대 벌크선사 STX팬오션은 2008년 6673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2004년 779억원의 아홉 배였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 역시 5000억원 안팎의 사상 최대 이익을 올렸다.
조선사 영업부 전화기에도 불이 났다. 한국 조선 3사는 2007년 한 해 660억달러(약 80조원)어치 주문을 받았다. 현대중공업의 영업이익은 2010년 무려 5조5000억원으로 불어났다. 계열사인 현대미포조선 주가는 2003년부터 2007년 사이 최고 120배 뛰어올랐다.
운명을 건 ‘도박’
해운업체들은 치솟는 운임을 활용해 더 많은 돈을 벌 방법을 모색했다. 빚을 내 장기로 배를 빌리고(용선), 다시 비싼 값에 짧게 빌려주는(대선) 사업을 공격적으로 확대했다. 운임이 오르면 더 나은 가격으로 다시 대선했다.
시장을 낙관하고 대규모 선박 제작(신조선 주문)도 병행했다. 한진해운이 주문한 신조선 잔액은 2009년 말 기준 약 30척으로 3조원대에 달했다. 하나같이 선대 확대에 집중하면서 빚도 급증했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의 총차입금은 2006년부터 2008년까지 매년 1조원씩 불어났다.
수주 곳간을 가득 메운 조선 3사는 중국의 맹추격을 따돌릴 천우신조(天佑神助)의 기회라 판단했다. ‘무(無)마진’을 무릅쓰고 경험이 부족한 해양 유전 관련 설비(해양플랜트) 공사를 따왔다. 기술력을 쌓아 고부가가치 시장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전략이었다.
모두가 쏟아지는 이익보다 훨씬 많은 빚을 내며 판돈을 올려나갔다. 그러다 2008년 9월, 미국의 투자은행(IB) 리먼브러더스의 파산과 함께 거짓말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동반 침몰
글로벌 금융위기는 원자재시장을 주무르던 선진국 금융회사들의 급격한 자금 회수를 촉발했다. 모든 상품 가격이 급전직하했다. 곧이어 선박 운임이 떨어졌고 신조선 주문 가격 급락이 뒤이었다. 선박의 운항 중단이 잇따랐다. 신조선 주문은 끊겼고, 발주 취소가 이어졌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2010~2011년 원자재 가격이 반등하자 선박 확충에 다시 한번 ‘올인’했다. 이익을 늘려 불어난 빚을 갚을 마지막 기회라 판단했다. 하지만 2012년 남유럽 국가(PIIGS)의 재정위기 확산으로 희망은 치명상으로 되돌아왔다. 닻을 올리는 배가 줄어도 각각 1조원대 임차료(용선비용)가 꼬박꼬박 계좌에서 빠져나갔다.
자산을 팔며 버티던 STX팬오션이 2013년 먼저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하며 백기를 들었다. 부도 공포가 매년 확산하자 금융당국은 2016년 4월 조선과 해운산업을 이른바 ‘취약업종’으로 묶고 수술칼을 잡았다. 이후 현대상선과 대우조선해양은 2016~2018년 조(兆) 단위 빚을 주식으로 바꾸는 출자전환을 시행했다. 같은 기간 현대중공업은 주주들로부터 1조원대, 삼성중공업은 2조원대 현금을 수혈했다.
한진해운은 한진그룹의 지원을 받다 2016년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그해 2월 운임지수(BDI)는 불과 290이었다. 사상 최고였던 2008년 5월 11,793의 2%였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