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뒤안길 접어든 '개발연대 인재 산실' 商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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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 출신 각계서 두각
인문계에 밀려 쇠퇴길로
인문계에 밀려 쇠퇴길로
1979년 덕수상업고등학교 총동문회에선 거센 고성이 오갔다. 학교가 발표한 야구부 창단 계획에 동문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전국 최고 수준의 수재들이 모이는 명문고에 면학 분위기를 해치는 운동부가 웬말이냐”는 동문의 반대 움직임은 거셌다. 야구부원도 수업에 참가해 공부하겠다는 약속을 한 뒤에야 이듬해 야구부원을 뽑을 수 있었다. 상업고 출신 한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는 당시를 회상하며 “1970년대 국내 주요 명문 상고들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라고 말했다.
전국 수재들의 요람이었던 상고
1960, 1970년대 ‘인재배출의 산실’로 통하던 상업고등학교가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지난 8일 서울교육청이 덕수고의 특성화계열(옛 덕수상고)을 2024년부터 경기상고로 통합하기로 결정한 것은 상고의 ‘퇴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 상고 교사는 “특성화고에 진학하려는 학생들도 취업이 잘되는 마이스터고를 지망한다”며 “대학생들도 취업이 안되는 상황에서 상고에 진학하려는 학생은 거의 없다”고 전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에서 상고 졸업생이 지니는 의미는 특별했다. 전국의 명문 상고로 꼽히는 학교에는 가난하지만 머리 좋은 수재가 많이 입학했다. 심지어 다른 도(道)에서 유학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강경상고를 졸업한 함영주 하나금융 부회장은 “학교가 있는 충남 논산에서만 학생이 온 게 아니라 충청 전역은 물론 전북 고창, 익산 등에서 공부깨나 한다는 친구들이 모두 모였다”고 말했다.
상고 출신 수재들은 각계에서 두각을 보였다. 김대중(목포상고)·노무현(부산상고)·이명박(동지상고) 대통령 등 상고가 배출한 국가원수만 3명이다. 조재연 대법관(덕수상고), 최경환 민주평화당 국회의원(광주상고),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덕수상고), 주형환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덕수상고), 이성태 전 한국은행 총재(부산상고), 라응찬 전 신한금융 회장(선린상고), 진옥동 신한은행장(덕수상고),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강경상고), 김종갑 한국전력 사장(대구상고)도 정·관·재계에서 자리를 잡았다.
은행 취업의 보증수표로 승승장구
상고 입학이 은행 취업의 보증수표가 되면서 상고의 인기는 높아졌다. 덕수상고 출신인 한 금융권 인사는 “입학생 640명 중 570명이 은행에 들어갔다”며 “한국은행에서 20명을 뽑았는데 12명이 덕수상고 동기였다”고 말했다. 이어 “경쟁률이 높아지면서 고교 입시 시험(200점 만점)에서 185점을 맞아야 입학 커트라인을 통과할 수 있었다”며 “중학교 전교에서 10등 안에 들지 못하면 원서를 써주지 않았다”고 했다.
또 다른 금융권 인사는 “서울고, 경기고, 경복고, 덕수상고, 서울기계공고 등 서울시내 5대 공립이 동대문운동장을 빌려 체육대회를 열곤 했다”며 “1974년 서울 인문계 고교가 평준화된 뒤 경기고 교사들이 대거 덕수상고로 옮겨온 뒤 5~6년간 대학 진학률이 올라가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상고 졸업생이 취직한 뒤 나중에 대학을 가는 것은 하나의 코스로 자리잡았다. 윤종규 KB금융 회장이 대표적이다. 1973년 광주상고를 나와 한국외환은행에 입행한 윤 회장은 1975년 성균관대 야간과정에 입학해 주경야독으로 1982년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하고 행정고시도 차석으로 붙었으나 대학 시절 시위에 참여한 경력이 문제가 돼 임용이 취소된 바 있다. 반장식 전 청와대 일자리수석(덕수상고)과 함 부회장도 입행한 뒤 대학을 졸업했다.
상고 10곳 가운데 9곳 문닫아
승승장구하던 상고는 ‘상고 입학=은행 취업’ 공식이 깨지자 쇠락의 길을 피하지 못했다. 1980년대 초부터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실업계 고교에 진학하는 인재가 크게 줄었다. 이런 가운데 교육당국은 1990년대 중반 대학 입학정원 자율화 조치를 단행했다. 대학 정원이 늘면서 문턱이 낮아지자 학생들은 대학 진학에 유리한 인문계 고교로 몰렸다. 여기에 더해 한국은행이 1988년 초급(고졸) 채용을 중단했다. 시중은행 상당수도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고졸 학력자를 채용하지 않았다. 한 상고 출신 은행 임원은 “은행 내에서 10년 이상 후배를 찾기 어렵다. 그나마 남아 있는 후배를 다 더해도 수가 많지 않다”고 말했다.
학교들은 생존을 위해 ‘상고’ 타이틀을 반납하기 시작했다. 광주상고는 광주동성고로, 대구상고는 대구상원고로, 부산상고는 개성고로 현판을 바꿔 달고 인문계로 전환했다. 1980년 432개에 달하던 전국의 상고 수는 지난해 49개로 줄어들었다. 열 개 가운데 아홉 곳이 문을 닫은 셈이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금융권에 데이터 분석 등이 가능한 인재가 필요한데 이런 인재를 상고에서 양성하지 못하면서 취업이 안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며 “교과목을 지속적으로 혁신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학생들의 외면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순신/정의진 기자 soonsin2@hankyung.com
전국 수재들의 요람이었던 상고
1960, 1970년대 ‘인재배출의 산실’로 통하던 상업고등학교가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지난 8일 서울교육청이 덕수고의 특성화계열(옛 덕수상고)을 2024년부터 경기상고로 통합하기로 결정한 것은 상고의 ‘퇴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 상고 교사는 “특성화고에 진학하려는 학생들도 취업이 잘되는 마이스터고를 지망한다”며 “대학생들도 취업이 안되는 상황에서 상고에 진학하려는 학생은 거의 없다”고 전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에서 상고 졸업생이 지니는 의미는 특별했다. 전국의 명문 상고로 꼽히는 학교에는 가난하지만 머리 좋은 수재가 많이 입학했다. 심지어 다른 도(道)에서 유학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강경상고를 졸업한 함영주 하나금융 부회장은 “학교가 있는 충남 논산에서만 학생이 온 게 아니라 충청 전역은 물론 전북 고창, 익산 등에서 공부깨나 한다는 친구들이 모두 모였다”고 말했다.
상고 출신 수재들은 각계에서 두각을 보였다. 김대중(목포상고)·노무현(부산상고)·이명박(동지상고) 대통령 등 상고가 배출한 국가원수만 3명이다. 조재연 대법관(덕수상고), 최경환 민주평화당 국회의원(광주상고),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덕수상고), 주형환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덕수상고), 이성태 전 한국은행 총재(부산상고), 라응찬 전 신한금융 회장(선린상고), 진옥동 신한은행장(덕수상고),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강경상고), 김종갑 한국전력 사장(대구상고)도 정·관·재계에서 자리를 잡았다.
은행 취업의 보증수표로 승승장구
상고 입학이 은행 취업의 보증수표가 되면서 상고의 인기는 높아졌다. 덕수상고 출신인 한 금융권 인사는 “입학생 640명 중 570명이 은행에 들어갔다”며 “한국은행에서 20명을 뽑았는데 12명이 덕수상고 동기였다”고 말했다. 이어 “경쟁률이 높아지면서 고교 입시 시험(200점 만점)에서 185점을 맞아야 입학 커트라인을 통과할 수 있었다”며 “중학교 전교에서 10등 안에 들지 못하면 원서를 써주지 않았다”고 했다.
또 다른 금융권 인사는 “서울고, 경기고, 경복고, 덕수상고, 서울기계공고 등 서울시내 5대 공립이 동대문운동장을 빌려 체육대회를 열곤 했다”며 “1974년 서울 인문계 고교가 평준화된 뒤 경기고 교사들이 대거 덕수상고로 옮겨온 뒤 5~6년간 대학 진학률이 올라가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상고 졸업생이 취직한 뒤 나중에 대학을 가는 것은 하나의 코스로 자리잡았다. 윤종규 KB금융 회장이 대표적이다. 1973년 광주상고를 나와 한국외환은행에 입행한 윤 회장은 1975년 성균관대 야간과정에 입학해 주경야독으로 1982년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하고 행정고시도 차석으로 붙었으나 대학 시절 시위에 참여한 경력이 문제가 돼 임용이 취소된 바 있다. 반장식 전 청와대 일자리수석(덕수상고)과 함 부회장도 입행한 뒤 대학을 졸업했다.
상고 10곳 가운데 9곳 문닫아
승승장구하던 상고는 ‘상고 입학=은행 취업’ 공식이 깨지자 쇠락의 길을 피하지 못했다. 1980년대 초부터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실업계 고교에 진학하는 인재가 크게 줄었다. 이런 가운데 교육당국은 1990년대 중반 대학 입학정원 자율화 조치를 단행했다. 대학 정원이 늘면서 문턱이 낮아지자 학생들은 대학 진학에 유리한 인문계 고교로 몰렸다. 여기에 더해 한국은행이 1988년 초급(고졸) 채용을 중단했다. 시중은행 상당수도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고졸 학력자를 채용하지 않았다. 한 상고 출신 은행 임원은 “은행 내에서 10년 이상 후배를 찾기 어렵다. 그나마 남아 있는 후배를 다 더해도 수가 많지 않다”고 말했다.
학교들은 생존을 위해 ‘상고’ 타이틀을 반납하기 시작했다. 광주상고는 광주동성고로, 대구상고는 대구상원고로, 부산상고는 개성고로 현판을 바꿔 달고 인문계로 전환했다. 1980년 432개에 달하던 전국의 상고 수는 지난해 49개로 줄어들었다. 열 개 가운데 아홉 곳이 문을 닫은 셈이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금융권에 데이터 분석 등이 가능한 인재가 필요한데 이런 인재를 상고에서 양성하지 못하면서 취업이 안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며 “교과목을 지속적으로 혁신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학생들의 외면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순신/정의진 기자 soonsin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