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형의 데스크 시각] 문화 교류는 최후의 보루
“연극은 정치보다 오래됐고 더 강합니다.”

2014년 8월, 서울에서 한·일 합작 연극 ‘반신’을 준비하던 일본 연출가 노다 히데키 도쿄예술극장 예술감독이 한 말이다. 당시 한·일 관계가 박근혜 정부와 아베 신조 정권의 ‘강 대 강(强對强)’ 대결로 악화일로를 걷는 상황에서 합작극을 올리는 소감을 묻자 돌아온 대답이었다. 그는 “몸으로 직접 부딪치고 경험하는 문화적 교류가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킨다”고도 했다.

한 달 뒤쯤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연극을 보니 추상적으로 들리던 그의 말이 가슴에 다가왔다. 일본 제작진과 한국 배우들이 협업한 무대는 역동적인 에너지가 넘실거리고, 새로운 극적 재미로 가득했다. 첫 공연 직후 다시 만난 노다 감독은 “연습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 연극인의 ‘창의적 영감’이 교류하며 만들어낸 시너지가 대단했다”고 말했다. 합작 공연은 서울에 이어 일본 도쿄예술극장에서도 성황리에 열렸다.

지자체 공연 취소·중단 잇따라

5년 전 취재 기억이 새삼 떠오른 것은 지난달 25일 경기 안산문화재단이 청소년극단 ‘고등어’의 일본 공연을 출국 전날 취소했다는 기사를 보고서다. 고등학생인 단원들이 올릴 공연은 일본 돗토리시 청소년극단과 3년째 이어오던 상호 방문 교류 행사였다. 안산문화재단은 ‘한·일 긴장 상황’을 공연 취소 이유로 들었다. 반면 돗토리시 극단은 “국가가 어떻든 문화를 통해 젊은이들끼리 만나는 것은 유지하고 싶다”며 이달 예정된 돗토리시 고등학생들의 안산 공연을 그대로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정치보다 강한 연극 또는 문화 교류의 힘을 믿는 듯하다.

한·일 갈등의 불똥이 문화 교류에 튀고 있다. 진원지는 한국 지방자치단체와 산하 문화재단이다.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규제 조치 이후 경쟁이라도 하듯 문화·스포츠·청소년 교류의 취소 또는 중단을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지난 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강원 춘천에서 열린 한·일 청소년 문화교류 행사 소식을 포스팅했다. 그러면서 “한·일 관계가 어려운 상황이지만 우리의 미래 세대인 청소년들은 문화 교류의 끈을 이어가고 있다”며 “이럴 때일수록 문화 체육 분야의 교류가 더욱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는 글을 올렸다. 박 장관은 정부의 뜻으로 읽힐 자신의 소신을 좀 더 일찍 밝혔어야 한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소중한’ 문화 교류의 끈을 지자체들이 상당수 끊어놓기 전에 말이다.

무차별 '일본 지우기' 역풍 우려

원론적인 얘기지만 문화 교류는 연극 ‘반신’처럼 다름이 융합해 새로움을 창조하거나 서로에게 자극이 돼 발전을 이끌어낸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폭을 넓혀 신뢰와 우호의 토대를 형성한다. 한류 등 대중문화를 포함한 문화 교류가 냉각된다면 한·일 관계는 정말로 위기 상황이다. 국제관계사 전문가인 권용석 히토쓰바시대 준교수가 한 말대로 ‘문화 교류는 최후의 보루’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일본 출품작 일곱 편을 시의원들의 취소 요구에도 예정대로 상영하기로 하고, 인천 펜타포트 락페스티벌에선 일본 밴드가 일정 변경 없이 공연했다. 무차별적인 일본 배척은 차츰 가라앉는 분위기다. 하지만 예술축제, 스포츠행사 등에서 단지 일본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제하는 지자체들의 조치도 계속 나오고 있다. 그런 일방적인 ‘일본 지우기’는 일본에서 역풍을 불러올 우려가 크다. 그 세기는 가늠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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