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방이 하나 있다. 그 안에 갑과 을이 있는데, 을이 갑을 무기로 위협하고 있다. 방엔 문이 하나 있으며 굳게 닫혀 있다. 밖에선 무기를 든 병이 갑을 위협하고자 그 문을 열기 위해 애쓰고 있다. 문은 병에 의해 열릴 수도,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을과 병 중 갑에게 더 위험한 이는 누구인가.

대부분 을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게 당연한 대답이다. 현존하는 명백한 위험과 가능성만 존재하는 위험 사이에서 전자를 더 위험하다고 보는 게 이성과 경험칙에 비춰 합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금의 우리 상황은 그렇지 않다. 연일 미사일을 쏘며 무력 시위하는 북한이 아니라 일본을 주적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왜 그럴까. 답은 우리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7년의 왜란은 차치하더라도 36년간의 일제강점기를 버티며 느낀 뼈에 사무친 증오와 한(恨) 때문일 것이다. 그 긴 시간 동안 그들은 지독히도 우리를 핍박하고 수탈했다. 그렇기 때문에 직접 일제 치하를 겪은 세대는 물론 책을 통해 이를 배운 세대도 일본이라면 이를 가는 것이다. 더군다나 역사적으로 북한은 우리와 하나였으니 그 동질감과 친밀감이 일본에 비해 훨씬 더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의 함의는 짐작건대 역사를 통해 처세를 배우라는 게 아닐까 싶다. 역사란 늘 우연처럼 다가와 필연이라는 꽃을 피운다. 역사 속 복잡다기한 상황과 논리성을 띤 흐름 속에서 보인 선인의 행동을 거울삼아야 우리 앞에 놓인 상황을 이성적으로 헤쳐나갈 수 있다. 계속 감정만으로 당면한 시국을 대하면 ‘제2 애치슨 선언’이 나오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다.

나원욱 < 서울 마포구 대흥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