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타고난 전사' 처칠, 히틀러 없었다면 '빛나는 실패자' 됐을 수도
‘윈스턴 처칠은 1962년에 미끄러져서 허벅다리에 골절상을 입었다. 그의 나이 여든여덟 살이었다. 영국 언론사들은 처칠을 위한 추도사를 준비했다. 그는 두 달 동안 깁스를 하고 누워 있었다. 그런 다음 병원에서 실려 나왔을 때, 위축되고 인지능력이 쇠퇴했지만 살아 있었다. ‘조심스러운 환호성’을 들었을 때 처칠은 특유의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팔을 약간 들어 올리고 공중에 두 손가락을 뻗어 철자 V를 그리려고 애썼다. 전쟁 중에 그가 언제나 보여 주던 ‘승리의 V’를 말이다.’

독일의 저명한 역사교양서 작가 제바스티안 하프너(1907~1999)가 쓴 <처칠, 끝없는 투쟁>의 거의 끝부분에 나오는 대목을 간추려 재구성한 것이다. 처칠이 1965년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 출간된 이 책의 원제는 ‘Churchill(처칠)’이다. 책을 다 읽고 나면 국내에서 52년 만에 처음 번역돼 나온 한국어판 제목에 ‘끝없는 투쟁’이 왜 붙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독일인인 저자는 처칠과 동시대를 살았고 견뎠다. 1938년 나치의 폭정을 피해 런던으로 건너간 뒤 2차 세계대전의 한복판에서 ‘옵서버’ 편집장을 지내며 영국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하프너가 그리는 처칠의 삶은 그야말로 ‘끝없는 투쟁’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고위 귀족 가문 출신인 그는 일곱 살부터 12년 동안 영국 상류층 자식들이 다니는 기숙학교에 다녔다. 그의 학교 생활은 이랬다. “그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거듭거듭 잔인하게 매를 맞았다. 그래도 여전히 배우지 않았고, 어느 날 항의의 뜻으로 교장의 밀짚모자를 밟았다.” 그는 ‘타고난 반항아, 때리면 때릴수록 더 깊이 무는 불도그(bulldog)’였다. 훗날의 처칠을 있게 한 뚝심과 맷집으로 온갖 매질을 견뎌내고 그 학창시절을 살아남았다.

기나긴 투쟁의 삶에서 가장 격렬하고 빛나고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장면은 두말할 필요 없이 히틀러와의 대결이다. 독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히틀러 관련 책으로 기록된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을 쓴 하프너가 서술하는 두 사람의 쟁투는 이 책의 하이라이트를 이룬다. 숨이 가빠올 만큼 박진감 넘치고 흥미진진하다. 하프너에 따르면 처칠과 히틀러는 ‘서로의 운명’이었다. “처칠이 없었다면 히틀러는 승리했을 것이고, 히틀러가 없었다면 처칠은 빛나는 실패자, 시대착오자로 시들어 갔을 것”이다. 두 사람은 극과 극의 인물이기도 했다. 하프너는 이렇게 말한다. “처칠은 타고난 전사임에도 매우 인간적이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정열적인 사냥꾼이 흔히 동물을 몹시 사랑하는 사람인 것과 비슷하다. 더 약한 존재, 패배한 존재에 대한 잔인성을 그는 죄악처럼 싫어했다. 이런 종류의 잔인성은 히틀러의 특성이었다.”

처칠은 삶의 마지막까지 ‘투쟁하는 인간’이었다. 살아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순간까지 살아남아 우울증과 무료함, 뇌졸중과 투쟁하면서 서서히 소멸해 간다. ‘타고난 전사(戰士)’이던 인간 처칠을 다층적으로 조명하면서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얼룩진 역사의 흐름을 날카롭게 짚어주는 저자의 안목이 돋보이는 역작이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