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조만간 확정할 예정인 ‘2020년 예산안’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소재·부품·장비산업 지원이다. 이들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특별회계를 신설해 최소 5년 동안 매년 2조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한다는 계획이다. 정부가 올해 책정한 소재·부품·장비산업 관련예산이 8000억원인 점을 고려하면 1조2000억원 이상을 늘린 것이다. 게다가 특별회계는 일반회계와 달리 정해진 사업에만 배정된 예산을 써야 하기 때문에 정부가 급하게 돈 쓸 곳이 생겨도 전용할 수 없다. 정부가 소재·부품·장비산업에 대해 일관된 예산 지원 의지를 보인 점은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돈을 푼다고 이들 산업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기업들이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당황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는 연구개발(R&D)과 각종 실증·테스트 장비를 구입하고 실험하는 데 예산을 지원한다지만, 그 단계를 지나 시장에 진입하려면 ‘죽음의 계곡’을 넘어야 하는 게 소재·부품·장비업체들이 직면한 현실이다. 어렵사리 국산화에 성공하더라도 좁은 내수시장을 벗어나 글로벌 경쟁력을 갖는 것은 또 다른 과제다. 이 험난한 과정을 기업들이 헤쳐나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소재·부품·장비를 국가 핵심산업으로 키우겠다면 종합적이고 전(全)주기적인 시각에서 기업 활동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기업들이 애로를 호소하고 있는 규제부터 현실에 맞게 과감히 풀어주는 게 시급하다. 기업들이 가장 많이 건의하고 있는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률(화평법)과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등 화학물질의 평가와 관리에 관한 규제,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른 규제가 그것이다. 자유로운 연구개발과 상용화 활동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주 52시간 근로제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소재·부품·장비산업 경쟁력 강화 대책’을 통해 내놓은 한시적·임시적 규제완화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기업들이 예측가능한 환경에서 소재·부품·장비 개발에 매진할 수 있도록 규제로 인한 불확실성을 확실히 제거해 줄 필요가 있다.

소재·부품·장비산업은 기술변화가 빠른 정보기술(IT) 산업과 달리 암묵지(暗默知), 장수기술이란 특징을 갖고 있다. 장기간 지식 축적이 가능한 장수기업을 유도할 수 있는 정책이 요구된다. 일본에는 쇼와덴코(1903년), 스미토모화학(1913년), 스텔라케미파(1916년) 등 창립한 지 100년이 넘는 소재업체가 수두룩하다. 소재·부품·장비가 강한 독일의 히든챔피언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3~4세대 동안 기술 축적이 이뤄져야 글로벌 경쟁력을 기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 현실은 반대다. 세계 최고 수준의 상속세 부담에 가업 포기를 고민하는 소재·부품·장비업체가 한둘이 아니다. 이래서는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상속세 부담을 줄여 기술 축적의 길을 터 줘야 한다. 기업들이 정부에 바라는 것은 예산 배정이란 단일 처방이 아니라 과감한 규제개혁, 상속세 감면 등을 동반하는 패키지 처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