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그때도 좋았지만 지금은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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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 하나로 동가식서가숙하던 옛 화가들
그 재주가 직업이 된 요즘이 더 보람 차
이수동 < 화백 >
그 재주가 직업이 된 요즘이 더 보람 차
이수동 < 화백 >
시인묵객(詩人墨客)이라고 한 번쯤은 들어보셨지요? 아, 화인가객(畵人歌客)이라고 해야 하나요? 바로 접니다. 나이는 음… 사실 수백 살이 넘습니다만 넘어갈게요.
그때 조선시대엔 배부르진 않았어도 하고 싶은 거 아쉽지 않게 다 하며 살았습니다. 경치 좋은 곳을 두루 찾아다니며 유유자적,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며 말입니다. 들른 대감집에서 대접을 잘 받으면 답례로 각자 재주껏 노래 한 가락, 시 한 수 지어 읊거나 혹은 현판 글씨를 써줬고, 저는 부채나 병풍 등에 산수화를 그려주곤 했지요.
알 만한 친구를 몇 꼽자면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시로 유명했던 방랑시인 김삿갓, 살짝 야한 그림으로 대감들에게 인기 있던 신윤복, 나중엔 안정적인 도화원에 들어갔지만 풍속화를 잘 그리던 김홍도, 각진 글씨가 기억에 남는 김정희 등이 있지요. 아, 늘 딸을 데리고 다니며 우리나라 지도를 그리던 김정호도 기억납니다. 쟁쟁하죠? 참고로 대다수가 벼슬 오르길 싫어하고 방랑벽이 좀 있어서 그렇지 나름 지식층이었다는 건 알아줬으면 합니다.
융숭한 접대로 소문이 좋게 난 대감집엔 늘 시인묵객이 붐볐는데, 딸 많은 집에서 미스코리아 나듯, 우리가 남겨 놓은 수많은 작품에서 보석 같은 수작이 제법 나오기도 했답니다. 그 맛에 대감들 사이엔 이름난 시인묵객 유치에 경쟁하듯 정성을 들이는 분위기까지 생겼고, “이런 사람이 다녀갔고, 이런 작품이 있소”라며 자랑도 하고 그랬지요. 특출했던 몇몇은 두둑한 노잣돈과 다음에도 꼭 들러 달라는 간청도 들었다고 합니다. 저야 뭐….
그렇게 풍류객으로 지내다 어느 봄날 춘곤을 이기지 못하고 깊은 잠에 한 번 빠졌는데, 일어나 보니 한 백 년은 넘게 잔 것 같습니다. 그 사이 세상도 많이 바뀌었고…. 풍문으로 들어보니 시인묵객들은 시인 가수 화가 등으로 나눠 불리며 노는 무대도 달라졌더군요. 대감집 역할을 지금은 출판사, 연예기획사, 화랑 등이 대신하고 있고 지금도 그때처럼 영향력 있는 곳일수록 많은 친구들이 붐비고 그렇습디다.
우리들의 위상도 많이 변했는데요. 그때보다 일단 나라가 월등히 잘살고 있고, 예술이 삶의 질을 높이는 비타민 같은 역할을 톡톡히 한 덕이지 싶습니다. 숙식 해결하고 노잣돈 좀 얹어 받던 시절은 비교도 안 될 만큼 대우가 좋아졌다는 겁니다. 더러는 가무(歌舞)로 유명해져 유엔본부 같은 곳에서 연설도 하고 막 그럽디다. 또,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림 한 점이 부자 동네 집 한 채 값으로 거래되는 일도 있고 말입니다. 그때는 꿈도 못 꿨는데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어쨌든 이 대목에서 물개박수를 치고 싶습니다.
이 행복한 요즘에도 풍류로 쓰윽 한 점 그려주고 하루를 잘 넘기던 그때가 문득 그리울 때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정작 누가 “그리다가 마음에 안 드는 거 있으면 한 점 주시오. 술 한 잔 살 테니”하고 ‘과거형’으로 청하면,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소만 정 원한다면 드릴 테니, 그대도 구겨져 마음에 안 드는 돈이 있으면 나 좀 주시오”라고 ‘현재형’으로 응수한답니다. 저 그동안 많이 변한 거 맞지요? 하하하.
그렇습니다. 타고난 재주로 그날그날 숙식을 해결하던 그때도 좋았지만, 그 재주가 직업이 돼 가족까지도 건사할 수 있는 지금이 훨씬 더 보람 있고 좋답니다. 한 백 년 뒤쯤은 어떨까요? 기대됩니다.
그때 조선시대엔 배부르진 않았어도 하고 싶은 거 아쉽지 않게 다 하며 살았습니다. 경치 좋은 곳을 두루 찾아다니며 유유자적,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며 말입니다. 들른 대감집에서 대접을 잘 받으면 답례로 각자 재주껏 노래 한 가락, 시 한 수 지어 읊거나 혹은 현판 글씨를 써줬고, 저는 부채나 병풍 등에 산수화를 그려주곤 했지요.
알 만한 친구를 몇 꼽자면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시로 유명했던 방랑시인 김삿갓, 살짝 야한 그림으로 대감들에게 인기 있던 신윤복, 나중엔 안정적인 도화원에 들어갔지만 풍속화를 잘 그리던 김홍도, 각진 글씨가 기억에 남는 김정희 등이 있지요. 아, 늘 딸을 데리고 다니며 우리나라 지도를 그리던 김정호도 기억납니다. 쟁쟁하죠? 참고로 대다수가 벼슬 오르길 싫어하고 방랑벽이 좀 있어서 그렇지 나름 지식층이었다는 건 알아줬으면 합니다.
융숭한 접대로 소문이 좋게 난 대감집엔 늘 시인묵객이 붐볐는데, 딸 많은 집에서 미스코리아 나듯, 우리가 남겨 놓은 수많은 작품에서 보석 같은 수작이 제법 나오기도 했답니다. 그 맛에 대감들 사이엔 이름난 시인묵객 유치에 경쟁하듯 정성을 들이는 분위기까지 생겼고, “이런 사람이 다녀갔고, 이런 작품이 있소”라며 자랑도 하고 그랬지요. 특출했던 몇몇은 두둑한 노잣돈과 다음에도 꼭 들러 달라는 간청도 들었다고 합니다. 저야 뭐….
그렇게 풍류객으로 지내다 어느 봄날 춘곤을 이기지 못하고 깊은 잠에 한 번 빠졌는데, 일어나 보니 한 백 년은 넘게 잔 것 같습니다. 그 사이 세상도 많이 바뀌었고…. 풍문으로 들어보니 시인묵객들은 시인 가수 화가 등으로 나눠 불리며 노는 무대도 달라졌더군요. 대감집 역할을 지금은 출판사, 연예기획사, 화랑 등이 대신하고 있고 지금도 그때처럼 영향력 있는 곳일수록 많은 친구들이 붐비고 그렇습디다.
우리들의 위상도 많이 변했는데요. 그때보다 일단 나라가 월등히 잘살고 있고, 예술이 삶의 질을 높이는 비타민 같은 역할을 톡톡히 한 덕이지 싶습니다. 숙식 해결하고 노잣돈 좀 얹어 받던 시절은 비교도 안 될 만큼 대우가 좋아졌다는 겁니다. 더러는 가무(歌舞)로 유명해져 유엔본부 같은 곳에서 연설도 하고 막 그럽디다. 또,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림 한 점이 부자 동네 집 한 채 값으로 거래되는 일도 있고 말입니다. 그때는 꿈도 못 꿨는데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어쨌든 이 대목에서 물개박수를 치고 싶습니다.
이 행복한 요즘에도 풍류로 쓰윽 한 점 그려주고 하루를 잘 넘기던 그때가 문득 그리울 때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정작 누가 “그리다가 마음에 안 드는 거 있으면 한 점 주시오. 술 한 잔 살 테니”하고 ‘과거형’으로 청하면,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소만 정 원한다면 드릴 테니, 그대도 구겨져 마음에 안 드는 돈이 있으면 나 좀 주시오”라고 ‘현재형’으로 응수한답니다. 저 그동안 많이 변한 거 맞지요? 하하하.
그렇습니다. 타고난 재주로 그날그날 숙식을 해결하던 그때도 좋았지만, 그 재주가 직업이 돼 가족까지도 건사할 수 있는 지금이 훨씬 더 보람 있고 좋답니다. 한 백 년 뒤쯤은 어떨까요?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