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이방인이 바라본 '다름'의 잔인함
동유럽 작은 나라의 한 평범한 남자가 미국 뉴욕 JFK공항에 도착한 날 고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난다. 이 때문에 입국심사대에서 입국 거부 조치를 당한 남자는 공항 안에서 각종 허드렛일을 하며 더듬더듬 영어를 익힌다. 공항 내 차별과 편견을 극복하며 “인생은 기다림(Life is waiting)”이라고 말했던 그는 결국 8개월 만에 공항 밖으로 나와 눈 내리는 뉴욕 땅을 밟는다. 영화 ‘터미널’ 이야기다.

보스니아 출신 미국 작가 알렉산다르 헤몬의 삶은 이 영화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사라예보에서 태어나 문학잡지 편집자로 일하던 그는 27세에 미국 시카고를 방문한다. 때마침 고국에서 내전이 발발해 갑작스레 난민 생활을 시작한다. 모국어로도, 영어로도 자신있게 글을 쓸 수 없던 그는 스스로를 잃어가는 듯한 느낌에 내내 괴로워한다. 하지만 우연치 않게 유명 신문과 잡지에 산문을 발표하면서 그의 인생은 서서히 변화한다. 우연은 아니었다. 그는 시카고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도시 곳곳을 발로 누볐다. 그때 느꼈던 풍경과 계절, 사람, 노래에 대한 단상을 담았던 글이 긴 기다림 끝에 그에게 힘이 돼 준 것이다.

헤몬의 산문집 <나의 삶이라는 책>은 난민으로서, 이방인으로서 살았던 자신의 삶 속에서 만난 숱한 ‘다름’의 문제를 꼬집어낸 회고록이다. 책은 어린 시절 매일 같이 먹고 자고 놀던 친구를 저자가 ‘터키인’이라는 단어로 울리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차이’를 구별하려던 국가의 얄팍함은 결국 수십만 명을 살상하고 수백만 명을 난민으로 내모는 내전으로 이어졌다. 고통받는 고국 가족과 친구들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그는 ‘차이’와 ‘구분짓기’가 얼마나 의미없고 부끄러운 것인지 깨닫는다.

후반부에는 그린피스 운동원, 서점 판매원, 강사 등 생계를 위해 다양한 일을 하며 살았던 경험을 다룬다. 저자는 불안하고 힘든 삶에 적응하게 해준 건 늘 따뜻한 이웃이었음을 이야기한다. 그는 “한 사회 안에 깊고 단단히 뿌리 내린 ‘다름’의 담장을 허물 수 있는 힘은 남의 고통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감수성에 있다”고 강조한다. (이동교 옮김, 은행나무, 248쪽, 1만3500원)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