伊 체팔루 바다에 빠진 그 남자, 여름날의 시간에 다시 빠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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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향기
그 남자 그 여자의 여행 伊 시칠리아
그 남자 그 여자의 여행 伊 시칠리아
"돌아와선 안 돼! 모든 것을 잊어버려!”
- 영화 ‘시네마 천국’ 속 알프레도의 대사 중 -
고향을 떠나는 토토에게 알프레도는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걸어갈 것을 요구한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토토는 영화감독으로 성공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픈 추억을 담고 있는 시칠리아의 한 마을로 돌아오게 되는데…. 영화 ‘시네마 천국’ 속 토토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팔라조 아드리아노’로 들어서는 그 남자의 마음은 알 수 없는 안타까움과 아스라함이 뒤섞여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주요 촬영지였던 시칠리아의 ‘팔라조 아드리아노(Palazzio Adriano)’. 마을로 들어서는 여행자들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건 광장이다. 사방이 탁 트인 광장에서 숨이 막힐 듯한 아득함을 느낀 건 영화가 주는 애잔함과 함께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나의 속마음과 마주하게 된 당혹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잊고 싶어서가 아니라 꺼내기가 두려워 한동안 외면했던 나의 유년기, 그리고 나의 고향이 절로 떠올랐다. 그 남자 : 영화 [시네마 천국] 속 촬영지를 따라 떠난 여름 휴가
팔라조 아드리아노. 생애 첫 방문한 곳이었지만 마을은 오랫동안 그곳에서 기다려 왔다는 듯 부드럽고 포근한 미소로 날 반겼다. 근데 그 미소에 왜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드는 걸까? 마을 광장의 한쪽에는 ‘시네마 천국’ 촬영 시 쓰였던 소품들이 전시돼 있는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방명록에는 드문드문 찾아오는 방문객의 흔적이 남겨져 있고, 내부에는 토토와 알프레도가 함께 탔던 자전거와 시력을 잃은 알프레도가 쓰던 지팡이가 전시돼 있다. ‘어?’ 지팡이를 보는 순간 시나브로 눈물이 감돈다. ‘알프레도, 저 이제야 이곳에 돌아왔어요.’ 어릴 적 보았던 영화에 대한 회상이라기보다는 내 고향 옆집에 살던 할아버지를 찾아온 것 같은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번 시칠리아 여행은 남자에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다른 여행지를 여행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건 마치, 영화 촬영지가 아니라 진짜 남자의 고향을 찾은 듯한 기분이었을까? 마을을 거니는 남자의 발걸음은 어느새 영화 한가운데로 이끌어졌다. 마을 속으로, 영화 속으로 걸음을 내디뎌 본다.
'작은 천국의 땅' 타오르미나의 그 여자
유럽의 풍경과 느긋한 하루에 미소만 :)
30년 전, 촬영 당시의 영화 속 분위기가 조금도 변하지 않고 현재까지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알프레도와 토토가 함께 거닐던 길, 토토가 군에서 제대해 들어섰던 햇살 아래의 뜨거운 마을 광장, 심지어 광장 중심에 있는 분수대에서도 30년 전 그날처럼 여전히 물이 흐르고 있다. 극장이 있던 자리가 커다란 주차장으로 변한 것만이 유일하게 달라진 모습이다.
체팔루 지중해 바다에 흠뻑
남자는 팔라조 아드리아노에서의 특별한 감정을 뒤로한 채 ‘시네마 천국’의 또 다른 촬영지인 체팔루로 향했다.
체팔루(Cefalu)는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시칠리아섬의 바닷가 마을. 투명하리만치 맑은 지중해의 바다와 이탈리아풍의 멋스러운 건축물이 한 폭의 엽서 같은 그림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을 소개하는 데 있어 아름답다는 수식어보다 중요한 게 있다. 바로 이 작은 마을이 고전 영화 ‘시네마 천국’의 촬영지였다는 사실! 영화 속 엘레나가 빗속에서 키스를 나누고 야외에서 영화가 상영됐고, 사람들이 배 위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장면 속 그곳에 그 남자가 섰다. 남자는 방파제 벽에 등을 딱 붙인 뒤 와다다닥 달렸다가 발뒤꿈치에 힘을 줘 하늘로 도약한다. 몸이 잠시 하얀 구름 속을 유영하듯 떠올랐다가 이내 차가운 바닷속으로 잠기고 만다. 발끝부터 전해진 시원함이 머리끝까지, 아니 머릿속 깊숙이까지 짜릿한 전율을 일으킨다. 완벽한 자유! 때마침 수업을 마치고 온 동네 아이들 역시 옆에서 첨벙첨벙 뛰어들며 다이빙 삼매경에 빠진다. 시간을 구속할 학원도, 치열한 세상에서 이겨야만 한다는 경쟁심도 없이 그저 주어진 순간을 최선을 다해 즐기는 모습들이다. 아마 어제도, 그제도, 이곳에서 신나게 놀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현실감 없는 모습이 이방인의 눈에는 한없이 부럽고 아름답게만 보인다.
체팔루에서의 아이들과 나(남자), 우리는 비록 말이 통하진 않았지만 눈짓만으로 서로에게 순서를 양보하며 끊임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방과 후 티레니아해의 푸르름으로 뛰어드는 것이 빼먹을 수 없는 일과인 동네 아이들의 다이빙 실력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저 내 한 몸 던져 사정없이 물속에 잠기는 전법이 다인 나를 비웃듯 공중제비, 백스핀 등을 선보이며 나의 눈을 어지럽혔다.
그들과의 한바탕 물놀이가 끝났을 때 식어가는 태양의 형상이 붉은빛 속에서 아른거렸다. 때마침 불어오는 서늘해진 바닷바람이 내 몸의 바닷물을 다시 앗아갔다. 일상의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영화처럼 즐긴 하루, 그리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보낸 그 여름날의 시간이 여전히 미소짓게 한다.
그 여자: 괴테는 말했다. ‘작은 천국의 땅, 타오르미나’
괴테는 그의 저서 <이탈리아 기행>에서 ‘타오르미나(Taormina)’를 ‘작은 천국의 땅’이라고 했다. 구불구불한 해안 도로를 따라 오르고 또 오르면 해발 250m, 마침내 천국 타오르미나가 나타난다. 단지 높은 곳에 있어서 천국을 닮은 것만은 아니었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푸른 이오니아해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고, 집집이 놓인 발코니 앞에는 색색의 꽃들이 만발해 있다. 거리에선 흥겨운 음악 소리가 끊이질 않고, 스치는 행인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그중에서도 그 여자는 도시 전체에서 느껴지는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가 천국의 그것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기필코 남자를 구슬려 근사한 레스토랑, 아니 싸구려 카페라도 들어가 느긋한 하루를 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시칠리아 여행을 시작한 뒤로 마음은 늘 한껏 여유롭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워낙에 먹는 데에 돈 쓰는 것을 아까워하는 남편(그 남자) 탓도 있었지만, 실은 빠듯한 예산에 쫓기다 보니 사치스러운 외식보다 실속을 챙길 수 있는 관광지 입장권이 먼저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느리고 평화로운 타오르미나에서만큼은 우리만 발발거리며 돌아다니는, 천국에 적응하지 못한 낯선 이방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지나온 도시답게 타오르미나에는 유난히 계단 골목이 많았다. 그 좁은 골목 안쪽에는 어김없이 멋진 레스토랑과 카페, 그리고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골목골목을 휘저으며 움베르토 1세 거리의 끝자락에 다다르자 사방이 탁 트인 4월 9일 광장이 나타났다. 내 마음을 읽은 걸까, 남편도 천국 같은 이곳에선 마음이 동한 걸까? 광장이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어느 골목의 계단 꼭대기에 있는 예쁜 레스토랑을 가리키며 “오늘 점심은 저기서 먹자!” 외친다. 점심 한 끼 외식하자는데 이렇게 감동스러울 수가!
느긋하게 즐기는 하루 생활
마치 처음부터 3단 레스토랑을 차리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처럼 계단 중간 중간에 테이블을 놓을 수 있는 널찍한 공간이 마련돼 있는 게 신기했다. 우리는 가장 높은 세 번째 단에 위치한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신중하게 메뉴를 선택했다. 최종적으로 토마토 크림 파스타와 해산물 리조토를 주문한 후에야 고개를 들어 눈앞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뻥 뚫리는 광경이었다. 저 멀리 광장 난간에 기대어 선 사랑스러운 연인들과 화목한 가족들의 뒷모습 너머로 구름인지 바다인지 지상 세계인지 모를 파란 아름다움이 넘실거렸고, 광장 중앙에는 거리의 화가와 행위 예술가들이 모여 관광객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었다. 또한 1층 노천카페에서 흘러 나오는 재즈 덕분에 귀까지 호강할 수 있었고.
주문한 음식이 늦게 나와도 사람들은 애피타이저를 즐기며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거나 라이브 음악을 들으며 조용히 풍경을 감상했고, 혼자 온 이들은 각자 책을 꺼내들어 읽고 있었다. 그들이 느린 게 아니라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우리가 틀린 거였다.
잃어버린 여유를 찾아 떠나온 여행이었는데, 난 왜 그리도 앞만 보고 바쁘게 걸었을까? 사실 마음속으로 원했던 여행이 이런 거였다. 시간과 예산 따위에 허덕이지 않는,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브런치를 즐기며 운치 있는 유럽의 풍경과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느긋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 맛있는 음식과 천국 같은 풍경이 함께하는 타오르미나의 오늘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내일도, 모레도 이 야외 테이블에 앉아 맛있는 파스타를 먹으며 시간을 여유롭게 흘려보내면 좋겠다.
시칠리아=글 정민아 여행작가 jma7179@naver.com
글·사진 오재철 여행작가 nixboy99@daum.net
알아두면 좋은 팁
시칠리아섬 내 팔레르모와 카타니아에 공항이 있으며, 인천에서 로마까지 가는 직항을 탄 후 로마에서 팔레르모 또는 카타니아 공항까지 국내선으로 1시간여 소요된다. 또는 이탈리아 본토에서 출발하는 페리나 기차를 타고 도달할 수 있는데, 기차의 경우 빌라 산 조반니에서 기차가 통째로 배 위에 실린다. 기차는 배에 실려 시칠리아의 메시나로 이동한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서남단에 있는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이다. 제주도의 14배 정도. 시칠리아섬의 평균 기온은 18도, 강우량은 970㎜ 정도. 시칠리아섬의 지중해성 기후는 아열대에 가깝다.
- 영화 ‘시네마 천국’ 속 알프레도의 대사 중 -
고향을 떠나는 토토에게 알프레도는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걸어갈 것을 요구한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토토는 영화감독으로 성공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픈 추억을 담고 있는 시칠리아의 한 마을로 돌아오게 되는데…. 영화 ‘시네마 천국’ 속 토토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팔라조 아드리아노’로 들어서는 그 남자의 마음은 알 수 없는 안타까움과 아스라함이 뒤섞여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주요 촬영지였던 시칠리아의 ‘팔라조 아드리아노(Palazzio Adriano)’. 마을로 들어서는 여행자들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건 광장이다. 사방이 탁 트인 광장에서 숨이 막힐 듯한 아득함을 느낀 건 영화가 주는 애잔함과 함께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나의 속마음과 마주하게 된 당혹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잊고 싶어서가 아니라 꺼내기가 두려워 한동안 외면했던 나의 유년기, 그리고 나의 고향이 절로 떠올랐다. 그 남자 : 영화 [시네마 천국] 속 촬영지를 따라 떠난 여름 휴가
팔라조 아드리아노. 생애 첫 방문한 곳이었지만 마을은 오랫동안 그곳에서 기다려 왔다는 듯 부드럽고 포근한 미소로 날 반겼다. 근데 그 미소에 왜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드는 걸까? 마을 광장의 한쪽에는 ‘시네마 천국’ 촬영 시 쓰였던 소품들이 전시돼 있는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방명록에는 드문드문 찾아오는 방문객의 흔적이 남겨져 있고, 내부에는 토토와 알프레도가 함께 탔던 자전거와 시력을 잃은 알프레도가 쓰던 지팡이가 전시돼 있다. ‘어?’ 지팡이를 보는 순간 시나브로 눈물이 감돈다. ‘알프레도, 저 이제야 이곳에 돌아왔어요.’ 어릴 적 보았던 영화에 대한 회상이라기보다는 내 고향 옆집에 살던 할아버지를 찾아온 것 같은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번 시칠리아 여행은 남자에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다른 여행지를 여행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건 마치, 영화 촬영지가 아니라 진짜 남자의 고향을 찾은 듯한 기분이었을까? 마을을 거니는 남자의 발걸음은 어느새 영화 한가운데로 이끌어졌다. 마을 속으로, 영화 속으로 걸음을 내디뎌 본다.
'작은 천국의 땅' 타오르미나의 그 여자
유럽의 풍경과 느긋한 하루에 미소만 :)
30년 전, 촬영 당시의 영화 속 분위기가 조금도 변하지 않고 현재까지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알프레도와 토토가 함께 거닐던 길, 토토가 군에서 제대해 들어섰던 햇살 아래의 뜨거운 마을 광장, 심지어 광장 중심에 있는 분수대에서도 30년 전 그날처럼 여전히 물이 흐르고 있다. 극장이 있던 자리가 커다란 주차장으로 변한 것만이 유일하게 달라진 모습이다.
체팔루 지중해 바다에 흠뻑
남자는 팔라조 아드리아노에서의 특별한 감정을 뒤로한 채 ‘시네마 천국’의 또 다른 촬영지인 체팔루로 향했다.
체팔루(Cefalu)는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시칠리아섬의 바닷가 마을. 투명하리만치 맑은 지중해의 바다와 이탈리아풍의 멋스러운 건축물이 한 폭의 엽서 같은 그림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을 소개하는 데 있어 아름답다는 수식어보다 중요한 게 있다. 바로 이 작은 마을이 고전 영화 ‘시네마 천국’의 촬영지였다는 사실! 영화 속 엘레나가 빗속에서 키스를 나누고 야외에서 영화가 상영됐고, 사람들이 배 위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장면 속 그곳에 그 남자가 섰다. 남자는 방파제 벽에 등을 딱 붙인 뒤 와다다닥 달렸다가 발뒤꿈치에 힘을 줘 하늘로 도약한다. 몸이 잠시 하얀 구름 속을 유영하듯 떠올랐다가 이내 차가운 바닷속으로 잠기고 만다. 발끝부터 전해진 시원함이 머리끝까지, 아니 머릿속 깊숙이까지 짜릿한 전율을 일으킨다. 완벽한 자유! 때마침 수업을 마치고 온 동네 아이들 역시 옆에서 첨벙첨벙 뛰어들며 다이빙 삼매경에 빠진다. 시간을 구속할 학원도, 치열한 세상에서 이겨야만 한다는 경쟁심도 없이 그저 주어진 순간을 최선을 다해 즐기는 모습들이다. 아마 어제도, 그제도, 이곳에서 신나게 놀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현실감 없는 모습이 이방인의 눈에는 한없이 부럽고 아름답게만 보인다.
체팔루에서의 아이들과 나(남자), 우리는 비록 말이 통하진 않았지만 눈짓만으로 서로에게 순서를 양보하며 끊임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방과 후 티레니아해의 푸르름으로 뛰어드는 것이 빼먹을 수 없는 일과인 동네 아이들의 다이빙 실력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저 내 한 몸 던져 사정없이 물속에 잠기는 전법이 다인 나를 비웃듯 공중제비, 백스핀 등을 선보이며 나의 눈을 어지럽혔다.
그들과의 한바탕 물놀이가 끝났을 때 식어가는 태양의 형상이 붉은빛 속에서 아른거렸다. 때마침 불어오는 서늘해진 바닷바람이 내 몸의 바닷물을 다시 앗아갔다. 일상의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영화처럼 즐긴 하루, 그리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보낸 그 여름날의 시간이 여전히 미소짓게 한다.
그 여자: 괴테는 말했다. ‘작은 천국의 땅, 타오르미나’
괴테는 그의 저서 <이탈리아 기행>에서 ‘타오르미나(Taormina)’를 ‘작은 천국의 땅’이라고 했다. 구불구불한 해안 도로를 따라 오르고 또 오르면 해발 250m, 마침내 천국 타오르미나가 나타난다. 단지 높은 곳에 있어서 천국을 닮은 것만은 아니었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푸른 이오니아해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고, 집집이 놓인 발코니 앞에는 색색의 꽃들이 만발해 있다. 거리에선 흥겨운 음악 소리가 끊이질 않고, 스치는 행인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그중에서도 그 여자는 도시 전체에서 느껴지는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가 천국의 그것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기필코 남자를 구슬려 근사한 레스토랑, 아니 싸구려 카페라도 들어가 느긋한 하루를 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시칠리아 여행을 시작한 뒤로 마음은 늘 한껏 여유롭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워낙에 먹는 데에 돈 쓰는 것을 아까워하는 남편(그 남자) 탓도 있었지만, 실은 빠듯한 예산에 쫓기다 보니 사치스러운 외식보다 실속을 챙길 수 있는 관광지 입장권이 먼저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느리고 평화로운 타오르미나에서만큼은 우리만 발발거리며 돌아다니는, 천국에 적응하지 못한 낯선 이방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지나온 도시답게 타오르미나에는 유난히 계단 골목이 많았다. 그 좁은 골목 안쪽에는 어김없이 멋진 레스토랑과 카페, 그리고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골목골목을 휘저으며 움베르토 1세 거리의 끝자락에 다다르자 사방이 탁 트인 4월 9일 광장이 나타났다. 내 마음을 읽은 걸까, 남편도 천국 같은 이곳에선 마음이 동한 걸까? 광장이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어느 골목의 계단 꼭대기에 있는 예쁜 레스토랑을 가리키며 “오늘 점심은 저기서 먹자!” 외친다. 점심 한 끼 외식하자는데 이렇게 감동스러울 수가!
느긋하게 즐기는 하루 생활
마치 처음부터 3단 레스토랑을 차리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처럼 계단 중간 중간에 테이블을 놓을 수 있는 널찍한 공간이 마련돼 있는 게 신기했다. 우리는 가장 높은 세 번째 단에 위치한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신중하게 메뉴를 선택했다. 최종적으로 토마토 크림 파스타와 해산물 리조토를 주문한 후에야 고개를 들어 눈앞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뻥 뚫리는 광경이었다. 저 멀리 광장 난간에 기대어 선 사랑스러운 연인들과 화목한 가족들의 뒷모습 너머로 구름인지 바다인지 지상 세계인지 모를 파란 아름다움이 넘실거렸고, 광장 중앙에는 거리의 화가와 행위 예술가들이 모여 관광객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었다. 또한 1층 노천카페에서 흘러 나오는 재즈 덕분에 귀까지 호강할 수 있었고.
주문한 음식이 늦게 나와도 사람들은 애피타이저를 즐기며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거나 라이브 음악을 들으며 조용히 풍경을 감상했고, 혼자 온 이들은 각자 책을 꺼내들어 읽고 있었다. 그들이 느린 게 아니라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우리가 틀린 거였다.
잃어버린 여유를 찾아 떠나온 여행이었는데, 난 왜 그리도 앞만 보고 바쁘게 걸었을까? 사실 마음속으로 원했던 여행이 이런 거였다. 시간과 예산 따위에 허덕이지 않는,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브런치를 즐기며 운치 있는 유럽의 풍경과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느긋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 맛있는 음식과 천국 같은 풍경이 함께하는 타오르미나의 오늘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내일도, 모레도 이 야외 테이블에 앉아 맛있는 파스타를 먹으며 시간을 여유롭게 흘려보내면 좋겠다.
시칠리아=글 정민아 여행작가 jma7179@naver.com
글·사진 오재철 여행작가 nixboy99@daum.net
알아두면 좋은 팁
시칠리아섬 내 팔레르모와 카타니아에 공항이 있으며, 인천에서 로마까지 가는 직항을 탄 후 로마에서 팔레르모 또는 카타니아 공항까지 국내선으로 1시간여 소요된다. 또는 이탈리아 본토에서 출발하는 페리나 기차를 타고 도달할 수 있는데, 기차의 경우 빌라 산 조반니에서 기차가 통째로 배 위에 실린다. 기차는 배에 실려 시칠리아의 메시나로 이동한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서남단에 있는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이다. 제주도의 14배 정도. 시칠리아섬의 평균 기온은 18도, 강우량은 970㎜ 정도. 시칠리아섬의 지중해성 기후는 아열대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