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자인 야옹 전응방이 조선 선조 때 세운 정자.  퇴계 이황이 직접 현판을 썼다.
유학자인 야옹 전응방이 조선 선조 때 세운 정자. 퇴계 이황이 직접 현판을 썼다.
아름다운 풍경과 유서 깊은 문화유산을 품은 봉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아픈 역사의 한복판에서 뜻을 굽히지 않은 수많은 독립지사의 이야기다. 금강소나무로 이름난 봉화의 풍경을 따라가다 보면 소나무의 기상처럼 뜻을 바르게 세우고 민족의 고난을 해결하는 데 앞장선 선비들의 발자취가 묻어 있다.

1000명 왜군 섬멸의 기록 임란의병전적비

임란의병전적비가 있는 충렬사
임란의병전적비가 있는 충렬사
백두대간 깊은 골짜기 맑은 물이 흐르는 소천면 현동리에는 임진왜란 때 화장산 일대에서 왜군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의병장 류종개와 600명 의병의 넋을 기리는 임란의병전적지가 있다. 산 중턱에 1985년 군민들이 북두칠성 모양의 적석봉을 정성스럽게 쌓아 올리고 공원처럼 넓게 잔디를 펼쳐 충렬사(忠烈祠)를 세웠다. 매년 음력 7월 28일이면 지역의 유림, 의병 후손, 주민들이 사당에서 이들의 영혼을 기리는 추모제를 거행한다.

선조 25년 임진년(1592) 8월 22일 새벽, 왜군의 무리가 소천면 고선리 황평과 잔대미 마을을 거쳐 현동천으로 내려왔다. 또 다른 무리는 높은 고개 늦재를 넘고 황평에서 중리와 고선천을 건너 산 능선을 따라 화장산으로 향했다. 적의 퇴로를 알아챈 류종개 대장과 의병 600명은 적의 대열이 모두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제히 공격해 1000여 명의 왜군을 멸했다. 의병들은 당시 활, 창, 칼, 도끼 같은 재래식 무기로 조총 같은 새로운 무기로 무장한 3600여 명의 왜군을 상대했다. 이 첫 전투에서 승전보를 울렸다.

왜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찾아왔다. 수적으로나 무기로나 열세에 놓였던 류종개 장군과 600명 의병은 봉화의 깊은 골짜기와 높은 봉우리에서 힘겨운 전투를 벌이다 모두 전사했다. 치열했던 소천 전투에서 1600여 명의 병력을 잃은 왜군은 봉화, 안동 내륙으로 진군을 포기하고 울진, 영덕으로 철수했다. 경상북도를 장악하려는 왜군의 뜻은 좌절되고 봉화는 안정을 되찾았다. 당시 핏빛으로 물들었던 소천의 수려한 산세와 그 앞을 흐르는 맑은 물에는 의병들의 숭고한 정신이 흐르고 있다.

봉화읍 송록서원과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송록서원
송록서원
봉화읍을 가로지르는 내성천에서 해저리 바래미전통마을로 향하는 길에 있는 송록서원은 봉화 유림 선현의 위패를 봉안하던 송천서원, 반천서원, 백록리사 3개 서원을 한 곳에 통합해 복원했다. 송록서원에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독립을 호소하며 청원서를 제출했던 ‘파리장서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를 세웠다.

파리장서(巴里長書)는 1919년 3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만국 평화회의에 심산 김창숙 선생을 중심으로 지방 유림의 상징이었던 면우 곽종석 선생과 유림대표 137명이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보낸 호소문이었다.

올곧은 선비의 마을 봉화에서도 많은 유림이 독립운동을 했다. 해저리 만회고택에서 심산 김창숙이 파리장서의 초안을 작성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봉화읍 유곡리의 안동권씨 문중에서 권명섭 선생을 비롯한 6명의 선생과 봉화읍 해저리의 의성김씨 문중의 김건영 선생을 비롯한 3명의 선생, 모두 9명이 파리장서에 서명했다. 이들의 뜻은 다음해 제2차 장서(長書) 추진과 1925년부터 이듬해까지 펼쳐진 제2차 유림단 의거로 이어져 유림이 앞장선 항일투쟁의 장으로 타올랐다.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에는 파리장서 독립운동의 취지문과 파리장서에 서명한 봉화 유림의 공적이 새겨져 있다.

재산면 동면리 마애비로자나불 입상

동면리 마애비로자나불 입상
동면리 마애비로자나불 입상
재산면 동면리 소내골을 지나 미륵골 들머리 산자락에는 부처님의 얼굴이 새겨진 암벽이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바위에는 경북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마애비로자나불 입상이 새겨져 있다. 바위는 굵은 자갈과 모래가 섞인 사암이고, 높이는 30m 정도이며, 너비는 100m에 달한다.

커다란 암벽에 새겨진 불상은 둥근 얼굴에 두 귀가 길게 늘어져 어깨까지 닿는다. 불상의 광배와 단순한 선이 흐르는 옷 주름, 둥근 신체와 얼굴, 다소 경직된 얼굴의 표현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퇴계 이황이 쓴 상운면 야옹정

상운면 구천리에 있는 야옹정은 야옹 전응방이 조선 선조 때 세운 정자다. 전응방은 중종 때 진사에 급제했으나 단종 때 왕위를 빼앗는 추악한 일들을 겪었던 할아버지 휴계 전희철의 유언에 따라 관직을 버렸다. 벼슬하지 않고 산이 깊고 맑은 물이 흐르는 봉화의 끝자락에 정자를 세워 도덕과 학문을 수련했다.

전응방은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야옹정에서 퇴계 이황과 도학을 논했다. 매년 강원 영월에 있는 단종의 능에 찾아가 도포 자락에 흙을 담아 능 위에 올리고 예를 갖춰 절했다. 그의 충성심처럼 팔작지붕이 당당하게 펼쳐진 정자에는 퇴계 이황이 직접 쓴 현판, 야옹정(野翁亭)이 걸려 있다.

봉화=글·사진 이솔 여행작가 leesoltou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