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설치 작가 양혜규, 작고 작가 신경희, ‘글자 작가’ 고산금, 극사실주의 작가 안성하 등 ‘미술 여전사(女戰士)’들이 올가을 국내 화단을 물들인다. 특유의 섬세하고 치밀한 전문성을 갖춘 이들은 기발한 아이디어와 이색적인 콘텐츠로 국내외 화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한국 현대미술의 정형성을 탈피한 참신한 소재와 스토리, 페미니즘적 시선을 무장한 이들의 ‘컴백’ 무대가 침체된 국내 미술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을지 관심을 모은다.
설치작가 양혜규 씨가 서울 국제갤러리에 전시한 작품 ‘솔 르윗 동차’를 설명하고 있다.  /국제갤러리 제공
설치작가 양혜규 씨가 서울 국제갤러리에 전시한 작품 ‘솔 르윗 동차’를 설명하고 있다. /국제갤러리 제공
양혜규, 4년 만에 국내 개인전

30대의 젊은 나이에 데뷔해 40~50대에 화려한 미술 인생을 구가하고 있는 작가들의 귀환이 줄을 잇는다.

서울과 베를린을 오가며 활동하는 양혜규 씨(49)는 2015년 삼성미술관 리움의 초대전 ‘코끼리를 쏘다, 象 코끼리를 생각하다’ 이후 4년 만에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큰 판을 벌인다. 양씨는 공산품과 주변의 일상용품을 활용해 사적인 공간을 설치미술 형태로 형상화해 왔다. ‘작품 자체 혹은 작품이 설치되는 공간이 스스로 사회적 현상과 문화를 이야기한다’는 평가를 받으며 국제 미술계의 격찬을 받았다.

3일 개막하는 개인전에서도 일상 소재를 활용해 사회·문화적 현상을 시각화한 다양한 작업을 내보인다. 전시회 주제는 가수 민해경의 노래 제목 ‘서기 2000년’에서 힌트를 얻은 ‘서기 2000년이 오면’으로 정했다. 작가는 훌쩍 지나버린 시점에서 감성적 촉수로 미래 사회의 다양한 징후를 더듬는다. 유년 시절 두 동생과 함께 그린 ‘보물선’을 비롯해 관람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솔 르윗 동차(動車)’,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한국 음악가 윤이상의 연대기를 편집한 ‘융합과 분산의 연대기-뒤라스와 윤’ 등을 선보인다.

극사실주의 작가 안성하 씨(42)는 4~29일 가나아트 한남점에서 개인전을 연다. 안씨는 유리 재질의 오브제에 담긴 사탕과 담배를 사실적이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로 그려낸 작품으로 국내외 미술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5년 만에 여는 이번 전시에는 비누 거품을 사진처럼 정교하게 묘사한 근작 20여 점을 건다.

인문학적 텍스트를 시각예술로 승화한 고산금 씨(54)는 서울 한남동 갤러리 바톤에 초대됐다. 고씨는 소설, 신문, 시, 철학서, 법전 등 사회적 기호로서 소비되는 텍스트를 4㎜ 인공구슬로 일일이 패널 위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작업해 왔다. ‘한없는 관용’을 주제로 다음달 2일까지 열리는 이번 초대전에는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 황진이의 시 등 일부 문장을 물질적 오브제로 전환한 근작 27점을 내놓았다.

인터넷이나 신문 매체에서 채집한 이미지를 활용하는 송수민(아트사이드갤러리), 숲과 같은 현실의 공간 속에 여인의 뒷모습을 몽환적으로 그리는 이우림(필 갤러리), 동물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이나진(청화랑) 등도 가을 무대에 돌아와 개인전을 열거나 준비 중이다.
50대 작고한 신경희 씨 유작전

치열한 예술혼을 불태우다 50대에 작고한 여성 화가 신경희(1964~2017)의 전시도 마련됐다. 오는 10일까지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이어지는 유작전 ‘기억-땅따먹기’다. 서울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미국 필라델피아 템플대에서 판화를 배운 신씨는 솜방울을 활용한 작품, 흰 종이에 낙하산 모양의 실을 붙인 작품, 수제 종이에 이미지를 표현한 퀴트 작업 등을 통해 미술 소재의 확장을 추구했다. 2017년 작고 후 2년 만에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말년에 암투병하며 그린 ‘정원도시’ 등 40여 점이 소개된다.

원로 여성 작가들이 딸과 함께 여는 작품전도 눈에 띈다. 서울 인사동 토포하우스갤러리에서 3일까지 여는 ‘모녀지간(母女之間)’전에는 목우회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경순 씨와 딸 주기녀 작가를 비롯해 한진수 이화여대 미대 명예교수와 천동녀, 김경복 한국여류화가협회 이사장과 조각가 백인정, 서양화가 장혜용과 최예빈, 김차인과 이지원 등 모녀가 나란히 작품을 걸었다.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은 “현대미술의 토대를 만든 여성 작가들의 작품은 기발한 아이디어와 콘텐츠가 탁월하다는 평을 받는다”며 “다양한 시각을 지닌 우수한 작품이 전시장에 내걸림으로써 애호가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히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