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의 공포…사상 첫 마이너스 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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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소비자물가 -0.04%
경기침체 속 低물가 상황 지속
일본식 장기불황 진입 '경고음'
올해 2%대 성장도 어려울 듯
경기침체 속 低물가 상황 지속
일본식 장기불황 진입 '경고음'
올해 2%대 성장도 어려울 듯
8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나타냈다. 경기 침체로 올해 경제성장률이 2%에도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커진 가운데 물가마저 떨어지자 저물가 상태가 장기간 이어지는 디플레이션이 현실화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통계청은 지난달 소비자물가가 지난해 같은 달보다 0.04% 하락했다고 3일 발표했다. 올 들어 7월까지 유례없는 0%대 행진을 이어가더니 8월에는 급기야 뒷걸음질친 것이다. 월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를 나타낸 것은 분기별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1965년 이후 처음이다.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 등은 저유가, 농산물 출하 증가 등 공급 요인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라며 수요 부진으로 유발되는 디플레이션 상황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유가와 농산물 가격 등의 영향을 배제한 근원물가도 외환위기 때를 제외하면 사상 최저 수준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으로 인건비가 오른 데다 정부가 재정지출을 대폭 확대하는 상황인데도 물가가 바닥을 기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디플레이션에 진입한 게 아니냐는 분석도 제기된다.
경기 하강 속도가 빨라진 점도 디플레이션 우려를 키우고 있다. 이날 한은은 지난 2분기 경제성장률(잠정치)을 1.0%로 7월 속보치보다 0.1%포인트 하향 수정했다. 당장 올해 2%대 성장이 불투명해졌다. 이를 달성하려면 남은 3분기와 4분기에 각각 0.6~0.7%가량 성장해야 하는데 최근 경기 상황을 고려하면 쉽지 않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5.5%)과 금융위기 때인 2009년(0.7%)에 이어 세 번째로 낮은 성장률을 기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조장옥 서강대 명예교수(경제학)는 “경제 전반에서 일본식 장기불황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며 “정부가 단기적인 경기 부양에 그칠 게 아니라 국가 위기라는 인식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가 하락→내수침체 가속→소득 감소→불황…'디플레 늪' 빠지나
일본 근로자의 1인당 명목임금은 1997년 360만엔에서 2014년 313만엔으로 12.9% 감소했다. 1997~2008년 일본 민간 소비는 0.6% 증가에 그쳤다. 이전 5년 동안 2.0% 늘어난 점을 고려하면 급락 수준이다. 이런 영향으로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1990년대 1.5%에서 2000년대 0.6%로 반 토막 났다. 디플레이션(지속적 물가 하락)이 나타났던 일본의 1990년대 말~2000년대에 벌어진 일들이다.
디플레이션으로 인한 ‘일본식 장기 불황’이 한국에도 닥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달 소비자물가가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해서다. 3일 통계청에 따르면 8월 소비자물가는 1년 전보다 0.04% 하락했다. 물가는 올 1월(0.8%)부터 7월(0.6%)까지 0%대의 불안한 상승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급기야 0% 아래로 떨어지기에 이른 것이다. 제로금리도 안 듣는 디플레이션
적정 수준의 물가 상승(인플레이션)은 경제의 윤활유 역할을 한다. 물가가 오르면 기업 수익성이 좋아지고 근로자의 소득이 오른다. 소비와 투자가 활성화되고 다시 물가를 끌어올리는 선순환이 이뤄진다. 2%를 밑도는 물가상승률, 즉 저물가는 이런 선순환을 기대하기 어렵지만 긍정적 효과도 있다. 소비자의 구매력이 올라가 내수를 회복시키는 힘을 만들어준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물가가 떨어지는 디플레이션은 상황이 다르다. 물가가 계속 하락하면 돈의 가치가 오르고 재화에 투자할 매력, 즉 소비 매력이 준다. 뭔가를 사는 것보다 돈으로 갖고 있는 게 이득이기 때문이다. 이러면 기업의 수익성이 나빠지고 투자가 줄어든다. 기업이 어려우니 근로자의 임금이 오르지 않고 가계 살림이 빠듯해진다. 이른바 장기 불황이 현실화된다. 일본의 1990년대 말~2000년대 디플레이션 때 이런 현상이 그대로 나타났다. 일본의 소비자물가는 1999년 0.3% 하락한 뒤 2005년까지 줄곧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김성태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전망실장은 “디플레이션이 심해지면 정책 효과도 확 떨어진다”고 말했다. 일본은 1999~2001년 제로금리 정책과 양적완화 정책을 단행했으나 물가하락률은 2001년 0.7%에서 2002년 0.9%로 더 커졌다.
“일본식 장기불황 배제할 수 없어”
전문가들은 일본과 같은 디플레이션이 한국에서도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상근자문위원은 “한국의 저물가는 국제 유가 하락 등 공급 쪽 요인이 강해서 일본과 상황이 다르다”면서도 “주가 하락과 글로벌 경쟁 심화로 인한 단가 하락, 저출산 심화 등은 2000년대 일본과 비슷한 만큼 향후 물가 하락 기조가 계속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김 실장은 “한 달 결과만으로 판단하기 이르지만 디플레이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8월 마이너스 물가는 농산물 가격 하락 등 일시적 요인이 크다지만 올해 내내 그런 특이 요인 없이도 물가는 0%대 중반 상승에 그쳤다”며 “수요 부진 영향이 크다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GDP 물가로 불리는 GDP 디플레이터가 3분기 연속 감소하고 있는 것을 보면 디플레이션 현상이 이미 진행 중이라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디플레이션을 속단하기 어렵다는 전문가들도 경제가 위기에 있다는 점엔 이견이 없었다. 신세돈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디플레이션은 수년간 물가 하락이 계속되는 것인데 아직 이런 모습은 아니지 않냐”면서도 “소비와 투자, 수출 등 주요 지표가 하락세여서 총체적 위기인 점은 맞다”고 말했다.
디플레이션을 막으려면 규제개혁과 노동개혁 등 특단의 조치가 시급하다는 조언이 이어졌다. 김 실장은 “정부가 재정을 아무리 풀어도 신산업 등 진입장벽과 경직된 노동시장 탓에 민간 경제를 살리는 효과를 못 낸다”고 지적했다. 이인호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차기 한국경제학회장)도 “부실 기업 정리를 포함한 산업 전반의 구조조정을 통해 민간 경제 활력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경봉/서민준/김익환/성수영 기자 kgb@hankyung.com
통계청은 지난달 소비자물가가 지난해 같은 달보다 0.04% 하락했다고 3일 발표했다. 올 들어 7월까지 유례없는 0%대 행진을 이어가더니 8월에는 급기야 뒷걸음질친 것이다. 월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를 나타낸 것은 분기별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1965년 이후 처음이다.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 등은 저유가, 농산물 출하 증가 등 공급 요인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라며 수요 부진으로 유발되는 디플레이션 상황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유가와 농산물 가격 등의 영향을 배제한 근원물가도 외환위기 때를 제외하면 사상 최저 수준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으로 인건비가 오른 데다 정부가 재정지출을 대폭 확대하는 상황인데도 물가가 바닥을 기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디플레이션에 진입한 게 아니냐는 분석도 제기된다.
경기 하강 속도가 빨라진 점도 디플레이션 우려를 키우고 있다. 이날 한은은 지난 2분기 경제성장률(잠정치)을 1.0%로 7월 속보치보다 0.1%포인트 하향 수정했다. 당장 올해 2%대 성장이 불투명해졌다. 이를 달성하려면 남은 3분기와 4분기에 각각 0.6~0.7%가량 성장해야 하는데 최근 경기 상황을 고려하면 쉽지 않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5.5%)과 금융위기 때인 2009년(0.7%)에 이어 세 번째로 낮은 성장률을 기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조장옥 서강대 명예교수(경제학)는 “경제 전반에서 일본식 장기불황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며 “정부가 단기적인 경기 부양에 그칠 게 아니라 국가 위기라는 인식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가 하락→내수침체 가속→소득 감소→불황…'디플레 늪' 빠지나
일본 근로자의 1인당 명목임금은 1997년 360만엔에서 2014년 313만엔으로 12.9% 감소했다. 1997~2008년 일본 민간 소비는 0.6% 증가에 그쳤다. 이전 5년 동안 2.0% 늘어난 점을 고려하면 급락 수준이다. 이런 영향으로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1990년대 1.5%에서 2000년대 0.6%로 반 토막 났다. 디플레이션(지속적 물가 하락)이 나타났던 일본의 1990년대 말~2000년대에 벌어진 일들이다.
디플레이션으로 인한 ‘일본식 장기 불황’이 한국에도 닥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달 소비자물가가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해서다. 3일 통계청에 따르면 8월 소비자물가는 1년 전보다 0.04% 하락했다. 물가는 올 1월(0.8%)부터 7월(0.6%)까지 0%대의 불안한 상승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급기야 0% 아래로 떨어지기에 이른 것이다. 제로금리도 안 듣는 디플레이션
적정 수준의 물가 상승(인플레이션)은 경제의 윤활유 역할을 한다. 물가가 오르면 기업 수익성이 좋아지고 근로자의 소득이 오른다. 소비와 투자가 활성화되고 다시 물가를 끌어올리는 선순환이 이뤄진다. 2%를 밑도는 물가상승률, 즉 저물가는 이런 선순환을 기대하기 어렵지만 긍정적 효과도 있다. 소비자의 구매력이 올라가 내수를 회복시키는 힘을 만들어준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물가가 떨어지는 디플레이션은 상황이 다르다. 물가가 계속 하락하면 돈의 가치가 오르고 재화에 투자할 매력, 즉 소비 매력이 준다. 뭔가를 사는 것보다 돈으로 갖고 있는 게 이득이기 때문이다. 이러면 기업의 수익성이 나빠지고 투자가 줄어든다. 기업이 어려우니 근로자의 임금이 오르지 않고 가계 살림이 빠듯해진다. 이른바 장기 불황이 현실화된다. 일본의 1990년대 말~2000년대 디플레이션 때 이런 현상이 그대로 나타났다. 일본의 소비자물가는 1999년 0.3% 하락한 뒤 2005년까지 줄곧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김성태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전망실장은 “디플레이션이 심해지면 정책 효과도 확 떨어진다”고 말했다. 일본은 1999~2001년 제로금리 정책과 양적완화 정책을 단행했으나 물가하락률은 2001년 0.7%에서 2002년 0.9%로 더 커졌다.
“일본식 장기불황 배제할 수 없어”
전문가들은 일본과 같은 디플레이션이 한국에서도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상근자문위원은 “한국의 저물가는 국제 유가 하락 등 공급 쪽 요인이 강해서 일본과 상황이 다르다”면서도 “주가 하락과 글로벌 경쟁 심화로 인한 단가 하락, 저출산 심화 등은 2000년대 일본과 비슷한 만큼 향후 물가 하락 기조가 계속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김 실장은 “한 달 결과만으로 판단하기 이르지만 디플레이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8월 마이너스 물가는 농산물 가격 하락 등 일시적 요인이 크다지만 올해 내내 그런 특이 요인 없이도 물가는 0%대 중반 상승에 그쳤다”며 “수요 부진 영향이 크다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GDP 물가로 불리는 GDP 디플레이터가 3분기 연속 감소하고 있는 것을 보면 디플레이션 현상이 이미 진행 중이라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디플레이션을 속단하기 어렵다는 전문가들도 경제가 위기에 있다는 점엔 이견이 없었다. 신세돈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디플레이션은 수년간 물가 하락이 계속되는 것인데 아직 이런 모습은 아니지 않냐”면서도 “소비와 투자, 수출 등 주요 지표가 하락세여서 총체적 위기인 점은 맞다”고 말했다.
디플레이션을 막으려면 규제개혁과 노동개혁 등 특단의 조치가 시급하다는 조언이 이어졌다. 김 실장은 “정부가 재정을 아무리 풀어도 신산업 등 진입장벽과 경직된 노동시장 탓에 민간 경제를 살리는 효과를 못 낸다”고 지적했다. 이인호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차기 한국경제학회장)도 “부실 기업 정리를 포함한 산업 전반의 구조조정을 통해 민간 경제 활력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경봉/서민준/김익환/성수영 기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