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문화살롱] 올 추석 달빛엔 메밀꽃도 휘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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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 논설위원·시인
‘달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 단편 <메밀꽃 필 무렵>의 한 부분이다. 한국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밤길 묘사로 꼽히는 이 문장은 한 편의 시와 같다. 산허리에 걸린 ‘흐붓한 달빛’과 ‘소금을 뿌린 듯한 메밀밭’이 손에 잡힐 듯하다. 강원 봉평에서 대화까지 걷는 80리 밤길에는 늙은 장돌뱅이의 비밀스런 이야기가 스며 있다. 홀아비 허생원이 20여 년 전 정을 나누고 헤어진 처녀를 잊지 못해 이곳을 찾고, 마침내 밤길에 동행한 젊은 동이를 친자로 확인하는 애틋한 사연이 밤길 위에 펼쳐진다.
날 선 언어에 가시 돋친 사람들
봉평장터에서 이효석문학관 쪽으로 가다 보면 허생원이 성서방집 처녀와 사랑을 나누던 물레방앗간이 나온다. 개울물에 빠진 허생원을 동이가 업고 건너며 혈육의 정을 느끼던 흥정천도 인근에 흐른다. 소설의 주요 배경인 메밀꽃 핀 달밤은 그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인생 여정과 닮았다.
메밀꽃은 한해살이풀이다. 잎과 꽃과 줄기가 연해서 바람에 쉽게 흔들린다. 한밤에 쏟아지는 달빛에도 꽃대가 휘어질 듯하다. 메밀꽃은 메밀의 꽃만이 아니라 ‘파도가 일 때 하얗게 부서지는 물보라’를 비유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럴 때 파도는 세상의 풍파를 의미하고, 물보라는 그 여파를 상징한다.
며칠 뒤면 추석이다. 올해는 나라 안팎 상황이 어수선하다. 시절이 하수상하니 사람들의 언어가 날로 거칠어진다. 말이 격해지면 생각이 뾰족해지고 행동도 험해진다. 날 선 언어로 편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소금을 뿌린 듯’한 메밀밭은 아름답지만, 소금을 뿌린 생채기는 쓰라릴 뿐이다. 그 바람에 올 추석 달빛에는 메밀꽃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꽃대마저 휘어질 판이다.
그러나 휘어지고 흔들리는 것일수록 곡선의 여백을 속에 품고 있다. 그런 여유가 미당 서정주 시 ‘추석 전날 달밤에 송편 빚을 때’에 나온다. ‘추석 전날 달밤에 마루에 앉아/온 식구가 모여서 송편 빚을 때/그 속 푸른 풋콩 말아넣으면/휘영청 달빛은 더 밝어 오고/뒷산에서 노루들이 좋아 울었네.//“저 달빛엔 꽃가지도 휘이겠구나!”/달 보시고 어머니가 한마디 하면/대수풀에 올빼미도 덩달어 웃고/달님도 소리 내어 깔깔거렸네./달님도 소리 내어 깔깔거렸네.’
달처럼 둥근 두레밥상의 지혜를
한가위에 온 식구가 둘러앉아 풋콩을 넣으며 송편을 빚는 모습이 정겹다. 한가위는 달빛이 가장 좋은 팔월(음력)의 한가운데 날이다. 소동파가 ‘적벽부’에서 ‘달은 찼다가 기울지만 조금도 없어지거나 자란 적이 없다’고 했듯이 달은 변함없는 항심(恒心)을 의미한다. 그래서 추석 달 아래에서는 누구나 마음이 푸근해진다.
넉넉하고 배부를수록 남을 돌아보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디에서는 멀건 시래깃국으로 속을 채우는 사람이 있고, 빈 사발에 얼굴을 비춰보는 이도 있을 것이다. 천리길을 마다않고 고향 가는 심성으로 이런 이웃들을 보듬어보자. 마침 내일부터 15일까지 봉평 이효석문화마을에서 ‘평창효석문화제’가 시작된다. 추석 연휴와 겹치니 가족·연인과 함께하기에 제격이다. 달빛처럼 희고 고운 메밀꽃밭을 거닐다 보면 서로를 찔러대던 가시 돋친 말들도 송편처럼 둥글둥글해질지 모른다. 그 사이로 어머니 두레밥상 같은 둥근 달이 산허리를 휘감으며 두둥실 떠오르면 더욱 좋겠다.
kdh@hankyung.com
이효석 단편 <메밀꽃 필 무렵>의 한 부분이다. 한국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밤길 묘사로 꼽히는 이 문장은 한 편의 시와 같다. 산허리에 걸린 ‘흐붓한 달빛’과 ‘소금을 뿌린 듯한 메밀밭’이 손에 잡힐 듯하다. 강원 봉평에서 대화까지 걷는 80리 밤길에는 늙은 장돌뱅이의 비밀스런 이야기가 스며 있다. 홀아비 허생원이 20여 년 전 정을 나누고 헤어진 처녀를 잊지 못해 이곳을 찾고, 마침내 밤길에 동행한 젊은 동이를 친자로 확인하는 애틋한 사연이 밤길 위에 펼쳐진다.
날 선 언어에 가시 돋친 사람들
봉평장터에서 이효석문학관 쪽으로 가다 보면 허생원이 성서방집 처녀와 사랑을 나누던 물레방앗간이 나온다. 개울물에 빠진 허생원을 동이가 업고 건너며 혈육의 정을 느끼던 흥정천도 인근에 흐른다. 소설의 주요 배경인 메밀꽃 핀 달밤은 그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인생 여정과 닮았다.
메밀꽃은 한해살이풀이다. 잎과 꽃과 줄기가 연해서 바람에 쉽게 흔들린다. 한밤에 쏟아지는 달빛에도 꽃대가 휘어질 듯하다. 메밀꽃은 메밀의 꽃만이 아니라 ‘파도가 일 때 하얗게 부서지는 물보라’를 비유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럴 때 파도는 세상의 풍파를 의미하고, 물보라는 그 여파를 상징한다.
며칠 뒤면 추석이다. 올해는 나라 안팎 상황이 어수선하다. 시절이 하수상하니 사람들의 언어가 날로 거칠어진다. 말이 격해지면 생각이 뾰족해지고 행동도 험해진다. 날 선 언어로 편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소금을 뿌린 듯’한 메밀밭은 아름답지만, 소금을 뿌린 생채기는 쓰라릴 뿐이다. 그 바람에 올 추석 달빛에는 메밀꽃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꽃대마저 휘어질 판이다.
그러나 휘어지고 흔들리는 것일수록 곡선의 여백을 속에 품고 있다. 그런 여유가 미당 서정주 시 ‘추석 전날 달밤에 송편 빚을 때’에 나온다. ‘추석 전날 달밤에 마루에 앉아/온 식구가 모여서 송편 빚을 때/그 속 푸른 풋콩 말아넣으면/휘영청 달빛은 더 밝어 오고/뒷산에서 노루들이 좋아 울었네.//“저 달빛엔 꽃가지도 휘이겠구나!”/달 보시고 어머니가 한마디 하면/대수풀에 올빼미도 덩달어 웃고/달님도 소리 내어 깔깔거렸네./달님도 소리 내어 깔깔거렸네.’
달처럼 둥근 두레밥상의 지혜를
한가위에 온 식구가 둘러앉아 풋콩을 넣으며 송편을 빚는 모습이 정겹다. 한가위는 달빛이 가장 좋은 팔월(음력)의 한가운데 날이다. 소동파가 ‘적벽부’에서 ‘달은 찼다가 기울지만 조금도 없어지거나 자란 적이 없다’고 했듯이 달은 변함없는 항심(恒心)을 의미한다. 그래서 추석 달 아래에서는 누구나 마음이 푸근해진다.
넉넉하고 배부를수록 남을 돌아보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디에서는 멀건 시래깃국으로 속을 채우는 사람이 있고, 빈 사발에 얼굴을 비춰보는 이도 있을 것이다. 천리길을 마다않고 고향 가는 심성으로 이런 이웃들을 보듬어보자. 마침 내일부터 15일까지 봉평 이효석문화마을에서 ‘평창효석문화제’가 시작된다. 추석 연휴와 겹치니 가족·연인과 함께하기에 제격이다. 달빛처럼 희고 고운 메밀꽃밭을 거닐다 보면 서로를 찔러대던 가시 돋친 말들도 송편처럼 둥글둥글해질지 모른다. 그 사이로 어머니 두레밥상 같은 둥근 달이 산허리를 휘감으며 두둥실 떠오르면 더욱 좋겠다.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