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그를 위해 낭비할 눈물은 없다"
지난달 국내 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로 나오면서 경제주체들이 긴장하게 됐다. 곳곳에서 ‘D(디플레이션)의 공포’라는 표현의 빈도가 높아진다. “가보지 않은 나라가 이런 불황을 말하는 것인가”라는 비판 섞인 빈정거림도 들린다. 그래도 디플레이션이나 경기침체(‘R의 공포’)는 굳이 분류하면 ‘부자병(病)’에 가깝다. 아프리카 최빈국들이나 중남미 좌파벨트처럼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는 국가와 비교해보면 더욱 그렇다.

저개발국 중에는 인플레이션이 상식을 뛰어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최근 다시 국가부도 위기에 처한 아르헨티나를 봐도 높은 인플레이션은 정정 불안이나 정치적 후진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고 차베스 집권 이후 베네수엘라가 딱 그 모델이다. 극단적 선동정치, 비상식적 독재가 경제 발전의 싹을 밟고, 민초들은 인플레이션 나락에 빠진다. ‘고통의 일상화’다. 물가 상승률과 실업률을 합친 것을 ‘고통 지수’라고 하는 이유다.

물가가 연간 수백%씩 오르는 통제 불능 상태를 ‘하이퍼인플레이션’이라고 한다. 전쟁이나 혁명이 일어났을 때, 정부가 과도한 재정 확대로 통화량을 너무 늘렸을 때 빚어진다는 게 통설이다. 멀리는 1차 대전 뒤 한 달 새 신문값이 1000배 올랐던 바이마르공화국 사례가 있고, 가까이는 물가 상승률이 100만%를 오르내리는 베네수엘라 경제가 있다.

살인적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생생한 실례가 짐바브웨다. 빵 1개가 3000억 짐바브웨 달러였고, 물가는 매일 두 배씩 오르기도 했다. 2000~2009년 이 나라 물가가 5000억% 올랐다는 분석도 있다. 독재정권이 국민 불만을 무마하려고 화폐를 남발한 결과였다. 결국 미국 달러를 공용화폐로 채택하고, 자국 돈은 폐기하고 말았다. ‘국가 시스템 중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이 화폐’라는 관점에서 보면 자주 국가의 붕괴 상황이었다.

37년간 쇠주먹으로 권좌를 유지했던 로버트 무가베 전 짐바브웨 대통령(95)이 싱가포르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41세 연하 아내에게 권력을 넘기려다 쫓겨난 지 2년 만이다. 이 나라 국민 사이에는 “그를 위해 낭비할 눈물은 없다”는 반응이 나온다고 외신은 전한다. 점잖게 말해 그 정도지, 유린당한 짐바브웨인들 속마음은 어떻겠나. 스스로의 됨됨이는 모른 채 “나요, 나!”라며 나서는 이들이 공직의 무서움을 깨닫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