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지난 6일 “북한 비핵화 협상이 실패하면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 국가에서 핵무장론이 제기될 수 있다”고 했다. “북핵 제거 노력이 실패하면 아시아 전역의 핵 확산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발언을 인용한 형식이지만, 북핵 실무협상 책임자의 언급인 만큼 무게가 가볍지 않다.

비건 대표는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확장 억지력에 대한 신뢰로 핵 개발을 중단했다”며 “북핵 위협이 계속되면 언젠가는 핵의 필요성을 묻는 목소리가 다시 나올 것”이라고 했다. 북한 비핵화 실패가 동아시아의 ‘핵 도미노’를 촉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비핵화 협상에 미온적인 북한뿐만 아니라 한·일 핵무장에 민감한 중국까지 겨냥한 압박 메시지란 분석이 나온다. 그동안 미국에서 제기된 전술핵의 한반도 재배치, ‘핵 공유 협정’ 등과 달리 ‘독자적 핵 개발’ 가능성을 거론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비건 대표가 핵무장이란 민감한 이슈까지 제기하며 ‘배수의 진’을 친 것은 미·북 협상의 교착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남북한 관계에만 집착해 곳곳에서 균열과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우리 안보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북한은 5월 4일 이후 아홉 차례나 미사일 또는 미사일급 방사포를 쏘아댔다. 이를 통해 ‘북한판 이스칸데르’, 에이태킴스(ATACMS·전술미사일), 초대형·대구경 방사포 등 네 가지 신종 공격무기를 과시했다. 킬체인(사전탐지 요격)과 한국형 미사일방어체계(KAMD)를 무력화하려는 의도임에 분명하다.

문재인 정부는 9·19 남북군사합의 이후 비무장지대 감시초소(GP)를 철거하고, 한·미 군사훈련을 축소했다. 군의 대비태세가 약화됐다는 우려가 나오는 상황에서 북 미사일 발사에 허둥대기 바빴다. 북의 미사일 도발에도 규탄 성명 한 번 내지 않고,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를 겨냥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 ‘삶은 소대가리’ 등 막말을 퍼부어도 제대로 항의조차 하지 않았다.

한·미 동맹이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는 더욱 크다. 청와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파기 결정 후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는 ‘한국 정부’를 ‘문재인 정부’로 지칭하며 강한 우려와 실망을 표명했다. “주한미군에 대한 위험이 증가할 수 있다”는 불만도 드러냈다. 하지만 청와대는 “동맹보다 국익”이라며 국가 자존심을 앞세우고 미군기지 조기 반환을 압박했다. 이런 상황에서 비건 대표가 주한미군 감축문제를 언급한 것은 예사롭지 않다. 그는 이날 “북한 비핵화의 진전이 있을 경우 주한미군 감축을 전략적으로 재검토할 수 있다”는 말도 했다.

미·북 핵협상이 끝내 돌파구를 찾지 못할 경우 한반도 평화시계는 뒤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중국·러시아가 영공 도발을 감행하는 등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환경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자유진영의 동맹을 강화해도 부족한 판에 일본과는 적대 상태이고, 미국과의 동맹도 흔들리고 있다. 동맹 균열과 외교적 고립을 자초하는 것은 자해행위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국방과 안보 시스템은 한 번 무너지면 다시 복구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 미·북 비핵화 협상은 계속돼야 하겠지만, 실패할 경우에 대비한 우리 국방 안보 전략도 치밀하게 점검할 필요가 있다. 북핵 협상 무산이 가져올 ‘퍼펙트 스톰’은 엄청날 것이다. 만반의 대비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급박한 위기상황이 닥칠 경우 제대로 된 대응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