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칼럼] 보다 사실적인 역사를 찾아서
사회적 통념에 도전하는 것은 힘들고 위험하다. 세상의 온갖 기득권 가운데 가장 굳은 것이 지적 기득권이다. 최근 발간된 <반일 종족주의>(이영훈 외)를 둘러싼 거센 논란은 이 점을 아프게 일깨워줬다. 일본의 식민통치에 관련된 여러 통념이 그르다고 주장한 터라,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된 요즈음엔 비난이 거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저자들에 대한 폭력은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런 폭력을 막아야 할 경찰이 오히려 가해자를 두둔하는 태도는 더욱 심각한 문제다. 모든 부문에서 사회의 근본이 무너지는 판에 책을 둘러싼 논란이 대수냐는 반문이 나옴 직도 하다. 그러나 이 일은 보기보다 훨씬 심각한 함의들을 품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주장을 편 저자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는 함께 살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이네의 경고대로 책들을 태우는 사회는 끝내 사람들을 태운다.

<반일 종족주의>는 경제사의 방법론으로 식민지 시기에 접근했다. 특히 더글러스 노스와 로버트 포겔이 발전시킨 ‘계량경제사(cliometrics)’를 활용해 통념을 허문다. 이번 한·일 분쟁을 부른 징용공 판결과 연관돼 큰 논란에 휩싸인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의 글을 살피면, 이런 사정이 잘 드러난다.

이 위원은 △조선인 노무자들의 ‘노예 노동’은 1965년의 한·일 수교를 방해하려고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학자인 박경식이 꾸며낸 거짓이고 △노무자들은 대부분 모집과 관알선을 통해 자발적으로 계약했고 징용된 사람들은 소수였으며 △임금이나 작업 환경에서 차별은 없었고 △당시 탄광의 조선인 노무자들은 서울의 남자 교원보다 4.6배, 남자 은행원보다 2.4배 높은 임금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탄광 회사의 임금 대장과 당시 조선인 탄광 노동자들의 건강하고 밝은 모습을 담은 사진들로 자신의 주장을 떠받쳤다. 물론 그것으로 끝날 일은 아니다. 조선인 노무자들의 비참한 삶을 말해주는 일화적 증거들이 많지 않은가.

이 위원의 개척적 연구와 종래의 일화적 증거들을 조화시키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미드웨이 싸움’ 이후 반격에 나선 미군은 기뢰 부설, 잠수함 공격, 공습 등으로 일본 본토를 고립시키는 ‘기아 작전’을 수행했다. 일본 상선들은 1941년 638만t에서 1944년 256만t으로 줄어들었다. 비료 수입은 114만t에서 41만t으로 감소했다. 일본의 공장과 철도망도 거의 다 파괴됐다. 즉 일본 본토에선 일본인과 조선인이 모두 굶주린 것이다.

<반일 종족주의>에 수록된 연구들은 흑인 노예노동에 관한 포겔의 연구를 떠올리게 한다. 포겔은 △노예노동에 의존하는 남부 농장들이 효율적이어서 큰 이익을 냈으며 △농장주들은 소중한 자원인 노예들을 비교적 잘 대우했고 △그래서 노예들은 북부의 공장 노동자보다 잘살았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계량경제사의 한계가 드러난다. 노예제의 도덕적 문제들은, 특히 노예가 받는 비인간적 대우와 상시적 위협들은, 통계에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이런 한계는 사회학적 접근으로 극복될 수 있다. 따라서 보다 사실적인 역사는 계량경제사와 사회학의 성과들을 전통적 역사학이 아우를 때 나올 수 있다.

역설적으로 물질적 조건들을 다룬 포겔의 연구는 노예 제도의 도덕적 측면을 부각시켰다. 주인으로부터 좋은 대우를 받더라도 노예는 여전히 인격이 없는 주인의 재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또렷해진 것이다.

비슷한 일이 식민지 시기의 역사에서도 일어나야 한다. 일본의 식민통치에 관한 그른 통념들이 사라지고 사실적 역사가 쓰이면, 식민지 통치의 도덕적 측면이 부각될 것이다. 그리고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는 일은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진실을 일본 사람들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뒤에야 비로소 두 나라 시민들이 진정으로 화해하는 길이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