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건축은 길고 느린 연기를 위한 무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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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사람이 살면서 완성해가는 무대
다음 세대 사용자도 계속 지어갈 수 있게
건축가는 드러내지 않고 물러나 있어야
김광현 < 서울대 명예교수·건축학 >
다음 세대 사용자도 계속 지어갈 수 있게
건축가는 드러내지 않고 물러나 있어야
김광현 < 서울대 명예교수·건축학 >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그 건축은 다시 우리를 만든다.” 윈스턴 처칠의 이 말은 이상하게도 오늘날 한국 건축계에서 즐겨 인용되고 있다. 건축전의 표어나 건축 강연에서 인용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국회의원도 이 말을 인용하며 건축에 관심을 보일 정도다. “우리는 도시를 만들고, 도시는 다시 우리를 만든다”고 바꿔 말하는 지방자치단체장도 생겼다.
한국 건축계는 건축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고 지배하는 것이니 처음 지을 때부터 잘 지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처칠의 이 말을 자랑스럽게 인용하곤 한다. 또 이 말은 좋은 건축 속에서 살면 좋은 삶이, 나쁜 건축에서는 나쁜 삶이 된다는 이론 아닌 이론의 근거로도 둔갑했다. 심지어는 이를 근거로 사람은 건축을 통해 ‘조작’할 수도 있다는 위험한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물론 좋은 건축을 하면 그만큼 삶이 좋아지기는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건축으로 좋고 나쁜 삶을 귀결시키는 것은 황당한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건축결정론, 환경결정론이고 공급자 쪽 논리다. 그러나 사람의 삶이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다.
원문은 “We shape our buildings; thereafter they shape us(우리는 우리 건물을 만들지만, 그 건물은 다시 우리를 만든다)”다. 그런데 한국의 건축하는 이들은 굳이 ‘건물’을 ‘건축’으로 바꿔 말한다. 이들은 ‘건물’은 부동산에 지나지 않는 수준의 물질덩어리지만 ‘건축’은 건축가의 정신적 산물이라 여긴다. 근대 건축의 사고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엔 ‘건물’은 수준 낮은 공(工)이지만 ‘건축’은 생각하는 사(士)라는 사농공상의 인식도 깔려 있다.
그러나 처칠은 오히려 ‘우리 건물을’ ‘우리를’이라는 표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건축계는 ‘우리’를 ‘사람’이라 바꿨다. 이렇게 처칠의 말은 우리 구미에 맞게 “사람은 건축을 만들고 건축은 사람을 만든다”로 바뀌었다. 그러나 처칠이 말한 ‘우리’는 보편적인 인간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하원의원이며, ‘우리 건물’은 추상적인 모든 건축물이 아니라 의원들이 사용하고 있는 바로 이 의사당이었다. 일반적인 건물로 말하면 처칠이 말한 ‘우리’(we, our, us)는 누구일까. 그들은 구체적인 건축주요, 사용자요, 참여자다. 그런데도 처칠의 말에 의지해 건축결정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이상, 한국 건축은 뒷걸음칠 수밖에 없다.
현대건축은 사람이 생활하는 ‘무대’라고 여기며 가능성을 찾고 있다. “우리가 무대를 만들지만 그 무대는 다시 우리를 만든다”고 바꿔 보라. 처칠의 말과는 다르게 성립하지 않는 말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이것이 건축을 생활하는 ‘무대’라고 생각해야 하는 이유다. 무대에는 좋은 무대, 나쁜 무대, 좋은 삶, 나쁜 삶, 건축을 통한 조작된 삶이 있을 수 없다. 더구나 건축이라는 무대에서, 배우는 유명한 배우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스스로 정하지 건축가가 정한 대로 살지 않는다.
“환경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아니라 미래에 살게 될 아이들에게서 빌린 것이다.” 이것은 지속가능성에 대한 레스터 브라운의 유명한 말이다. 지속가능한 사회의 진정한 건축주는 한 세대 아래인 우리의 아들과 딸이니, 지금 살고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한 세대 뒤에 올 사람도 계속 지어갈 수 있는 그런 집을 만들라는 말이다. 건축주, 이용자, 참여자들이 제2막, 제3막의 무대를 꾸려가는 사이에 완성되지 않고 건축물은 계속 지어지는 것이고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2000년 하고도 20년이 지난 지금 사회가 급변했는데도 아직 처칠의 말에 기대고 건축결정론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면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덴마크 건축가 라스무센은 “건축가는 길고 느린 연기를 위한 무대를 설치한다”고 했고, 벨기에 건축가 뤼시앵 크롤은 “참여자가 없으면 계획도 없다”고 했다. 그러려면 건축가는 연극 제작자처럼 드러나지 않은 채 뒤로 물러나 있어야 한다. 오래전의 말이다. 그러나 지속가능한 사회인 지금 실천해야 할 말이다.
한국 건축계는 건축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고 지배하는 것이니 처음 지을 때부터 잘 지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처칠의 이 말을 자랑스럽게 인용하곤 한다. 또 이 말은 좋은 건축 속에서 살면 좋은 삶이, 나쁜 건축에서는 나쁜 삶이 된다는 이론 아닌 이론의 근거로도 둔갑했다. 심지어는 이를 근거로 사람은 건축을 통해 ‘조작’할 수도 있다는 위험한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물론 좋은 건축을 하면 그만큼 삶이 좋아지기는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건축으로 좋고 나쁜 삶을 귀결시키는 것은 황당한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건축결정론, 환경결정론이고 공급자 쪽 논리다. 그러나 사람의 삶이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다.
원문은 “We shape our buildings; thereafter they shape us(우리는 우리 건물을 만들지만, 그 건물은 다시 우리를 만든다)”다. 그런데 한국의 건축하는 이들은 굳이 ‘건물’을 ‘건축’으로 바꿔 말한다. 이들은 ‘건물’은 부동산에 지나지 않는 수준의 물질덩어리지만 ‘건축’은 건축가의 정신적 산물이라 여긴다. 근대 건축의 사고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엔 ‘건물’은 수준 낮은 공(工)이지만 ‘건축’은 생각하는 사(士)라는 사농공상의 인식도 깔려 있다.
그러나 처칠은 오히려 ‘우리 건물을’ ‘우리를’이라는 표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건축계는 ‘우리’를 ‘사람’이라 바꿨다. 이렇게 처칠의 말은 우리 구미에 맞게 “사람은 건축을 만들고 건축은 사람을 만든다”로 바뀌었다. 그러나 처칠이 말한 ‘우리’는 보편적인 인간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하원의원이며, ‘우리 건물’은 추상적인 모든 건축물이 아니라 의원들이 사용하고 있는 바로 이 의사당이었다. 일반적인 건물로 말하면 처칠이 말한 ‘우리’(we, our, us)는 누구일까. 그들은 구체적인 건축주요, 사용자요, 참여자다. 그런데도 처칠의 말에 의지해 건축결정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이상, 한국 건축은 뒷걸음칠 수밖에 없다.
현대건축은 사람이 생활하는 ‘무대’라고 여기며 가능성을 찾고 있다. “우리가 무대를 만들지만 그 무대는 다시 우리를 만든다”고 바꿔 보라. 처칠의 말과는 다르게 성립하지 않는 말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이것이 건축을 생활하는 ‘무대’라고 생각해야 하는 이유다. 무대에는 좋은 무대, 나쁜 무대, 좋은 삶, 나쁜 삶, 건축을 통한 조작된 삶이 있을 수 없다. 더구나 건축이라는 무대에서, 배우는 유명한 배우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스스로 정하지 건축가가 정한 대로 살지 않는다.
“환경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아니라 미래에 살게 될 아이들에게서 빌린 것이다.” 이것은 지속가능성에 대한 레스터 브라운의 유명한 말이다. 지속가능한 사회의 진정한 건축주는 한 세대 아래인 우리의 아들과 딸이니, 지금 살고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한 세대 뒤에 올 사람도 계속 지어갈 수 있는 그런 집을 만들라는 말이다. 건축주, 이용자, 참여자들이 제2막, 제3막의 무대를 꾸려가는 사이에 완성되지 않고 건축물은 계속 지어지는 것이고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2000년 하고도 20년이 지난 지금 사회가 급변했는데도 아직 처칠의 말에 기대고 건축결정론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면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덴마크 건축가 라스무센은 “건축가는 길고 느린 연기를 위한 무대를 설치한다”고 했고, 벨기에 건축가 뤼시앵 크롤은 “참여자가 없으면 계획도 없다”고 했다. 그러려면 건축가는 연극 제작자처럼 드러나지 않은 채 뒤로 물러나 있어야 한다. 오래전의 말이다. 그러나 지속가능한 사회인 지금 실천해야 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