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도 '삭발 투쟁'…여의도 삭발 정치사 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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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발 원조'는 박찬종…1987년 DJ·YS 대선후보 단일화 요구
설훈 2004년 '노무현 탄핵안' 반발하며 삭발·단식 병행
2000년 중반 들어 '집단 삭발' 유행…통합진보당 의원들 2013년 단체삭발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16일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철회를 요구하며 삭발을 감행하면서 여의도 정가의 이른바 '삭발 정치사(史)'에 새삼 관심이 쏠리고 있다.
공당의 대표, 그것도 제1야당 대표의 유례 없는 '삭발 시위'에 보수 야권에서는 대여(對與) 투쟁의 결기를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온 반면 진보진영을 포함한 여권에서는 후진적 정치 문화의 표본이라며 냉소를 보냈다.
한국 정치사에 있어 삭발 투쟁의 주인공들은 명암이 엇갈렸다.
소기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가 하면 메아리 없는 '액션'에 그친 사례도 잦았다.
정치권의 첫 '삭발 투쟁' 주인공은 1987년 박찬종 전 통일민주당 의원이었다.
박 전 의원은 그해 11월 6일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김영삼 후보의 단일화를 요구하며 국회 의원회관 자신의 사무실에서 탈당 선언을 한 뒤 머리를 밀었다.
야권 후보 단일화는 물 건너갔지만, 그는 이듬해 13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 3선에 성공했다.
10년 뒤인 1997년에는 김성곤 전 국민회의 의원이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항의하며 머리를 모두 밀었고, 1998년 나주시장 공천헌금 의혹에 연루돼 검찰 수사를 받던 정호선 전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은 국회 의원회관 로비에서 "공천뇌물로 2억원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며 삭발했다.
삭발과 단식 투쟁을 병행한 사례도 있었다.
더불어민주당 설훈 의원은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하자 '탄핵 철회'를 주장하며 삭발과 함께 단식에 들어갔다.
당시 새천년민주당 소속이었던 그는 당 지도부의 총사퇴를 주장하며 거세게 항의했다.
2000년대 중반 들어서는 집단 삭발이 유행처럼 번졌다.
2007년 한나라당 의원 3명(김충환·신상진·이군현)은 사학법 재개정을 촉구하며 단체 삭발했고, 결국 재개정안은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의 입장 선회로 국회에서 통과됐다.
2010년 자유선진당 류근찬 의원을 비롯한 5명의 의원은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 방침에 반발, 2010년 1월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집단 삭발식을 했는데 그해 6월 세종시 수정안은 국회에서 부결됐다.
국가사업을 둘러싼 지역갈등으로 인해 국회의원이 머리를 자른 사례는 1년 뒤에도 나왔다.
2011년 민주당 장세환 의원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 본사의 전북 이전을 촉구하기 위해 역시 국회 본청 앞에서 삭발했다.
2013년에는 정부의 헌법재판소 정당해산 심판 청구 조치에 반발, 김선동·김재연 등 통합진보당 의원 5명과 지방의원들이 대거 삭발하고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말 헌법재판소의 정당해산 판결을 막지는 못했다.
이후 한동안 여의도에서 삭발 정치인은 찾기 힘들었다.
그러다 6년 만인 올해 5월 한국당 김태흠·성일종·이장우·윤영석 의원과 이창수 충남도당위원장 등 5명이 국회에서 선거제 개편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검경수사권 조정안 등의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 처리 원천무효를 주장하며 다시 삭발 테이프를 끊었다.
그로부터 4개월 만인 '조국 정국'에서 다음 주자들이 속출했다.
무소속 이언주 의원이 지난 10일 삭발한 데 이어 한국당 박인숙 의원도 다음 날 가세하며 조 장관을 임명한 문재인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했다.
/연합뉴스
설훈 2004년 '노무현 탄핵안' 반발하며 삭발·단식 병행
2000년 중반 들어 '집단 삭발' 유행…통합진보당 의원들 2013년 단체삭발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16일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철회를 요구하며 삭발을 감행하면서 여의도 정가의 이른바 '삭발 정치사(史)'에 새삼 관심이 쏠리고 있다.
공당의 대표, 그것도 제1야당 대표의 유례 없는 '삭발 시위'에 보수 야권에서는 대여(對與) 투쟁의 결기를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온 반면 진보진영을 포함한 여권에서는 후진적 정치 문화의 표본이라며 냉소를 보냈다.
한국 정치사에 있어 삭발 투쟁의 주인공들은 명암이 엇갈렸다.
소기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가 하면 메아리 없는 '액션'에 그친 사례도 잦았다.
정치권의 첫 '삭발 투쟁' 주인공은 1987년 박찬종 전 통일민주당 의원이었다.
박 전 의원은 그해 11월 6일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김영삼 후보의 단일화를 요구하며 국회 의원회관 자신의 사무실에서 탈당 선언을 한 뒤 머리를 밀었다.
야권 후보 단일화는 물 건너갔지만, 그는 이듬해 13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 3선에 성공했다.
10년 뒤인 1997년에는 김성곤 전 국민회의 의원이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항의하며 머리를 모두 밀었고, 1998년 나주시장 공천헌금 의혹에 연루돼 검찰 수사를 받던 정호선 전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은 국회 의원회관 로비에서 "공천뇌물로 2억원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며 삭발했다.
삭발과 단식 투쟁을 병행한 사례도 있었다.
더불어민주당 설훈 의원은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하자 '탄핵 철회'를 주장하며 삭발과 함께 단식에 들어갔다.
당시 새천년민주당 소속이었던 그는 당 지도부의 총사퇴를 주장하며 거세게 항의했다.
2000년대 중반 들어서는 집단 삭발이 유행처럼 번졌다.
2007년 한나라당 의원 3명(김충환·신상진·이군현)은 사학법 재개정을 촉구하며 단체 삭발했고, 결국 재개정안은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의 입장 선회로 국회에서 통과됐다.
2010년 자유선진당 류근찬 의원을 비롯한 5명의 의원은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 방침에 반발, 2010년 1월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집단 삭발식을 했는데 그해 6월 세종시 수정안은 국회에서 부결됐다.
국가사업을 둘러싼 지역갈등으로 인해 국회의원이 머리를 자른 사례는 1년 뒤에도 나왔다.
2011년 민주당 장세환 의원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 본사의 전북 이전을 촉구하기 위해 역시 국회 본청 앞에서 삭발했다.
2013년에는 정부의 헌법재판소 정당해산 심판 청구 조치에 반발, 김선동·김재연 등 통합진보당 의원 5명과 지방의원들이 대거 삭발하고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말 헌법재판소의 정당해산 판결을 막지는 못했다.
이후 한동안 여의도에서 삭발 정치인은 찾기 힘들었다.
그러다 6년 만인 올해 5월 한국당 김태흠·성일종·이장우·윤영석 의원과 이창수 충남도당위원장 등 5명이 국회에서 선거제 개편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검경수사권 조정안 등의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 처리 원천무효를 주장하며 다시 삭발 테이프를 끊었다.
그로부터 4개월 만인 '조국 정국'에서 다음 주자들이 속출했다.
무소속 이언주 의원이 지난 10일 삭발한 데 이어 한국당 박인숙 의원도 다음 날 가세하며 조 장관을 임명한 문재인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