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연쇄살인사건 명명한 당시 김종식 사건기자의 '씁쓸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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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년 3차 살인사건때 투입…"조기검거 기여 못해 지금도 아쉬워"
"경찰의 끈질긴 노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경찰과 마찬가지로 언론인으로서 조기 검거에 기여하지 못한 점이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 김종식(63) 전 연합뉴스 기자는 19일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용의자가 특정됐다는 보도에 경찰 출입 기자였던 사건 당시를 떠올리며 전직 언론인으로서 씁쓸한 소회를 전했다.
김 전 기자가 사건 현장에 투입된 것은 1986년 12월 12일 밤 화성군 태안면 안녕리 축대 근처에서 권모(당시 24세)씨가 양손이 스타킹으로 결박당한 채 머리에 속옷이 씌워진 상태로 살해당한 3차 사건.
태안면사무소 인근 화성경찰서 태안지소에 수사본부가 차려졌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갔다.
수사본부를 방문한 지역 국회의원 비서관이라고 경찰들을 안심시킨 뒤 면사무소에서 이들이 복사하는 수사보고서를 입수했다.
"1986년 9월과 10월 1차 사건과 2차 사건이 발생했는데 지역신문에 1∼2단으로 조그맣게 변사 기사로 났어요.
3차 사건이 났는데 또 태안면이었고 보고서를 확인하곤 놀랐습니다.
전화로 기사를 불렀고 이후 방송·신문사 기자들이 속속 수사본부로 집결했죠."
3차 사건이 발생한 지 12일 만에 태안면 인근인 정남면 관항리 농수로 근처에서 이모(당시 23세)씨가 역시 스타킹으로 결박된 채 숨진 4차 사건이 발생했고 김 전 기자는 그때부터 기사에 '부녀자연쇄강간살인사건'으로 사건명을 붙였다고 회고했다.
이후 언론은 화성 일대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을 '화성연쇄살인사건'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1년 4월 10차 사건까지 이어지며 연쇄살인사건으로 명명한 데 대해 자책하기도 했다.
김 전 기자는 유력 용의자로 지목된 A(56)씨의 DNA가 검출된 3개 사건 가운데 5차 사건의 경우 사건 현장과 관계자들을 취재하다 경찰과 심한 몸싸움을 벌였다고 기억했다.
A씨가 잔혹하고 치밀한 수법으로 처제를 성폭행한 뒤 살해하고 무기수로 복역 중이라는 소식에 당시 취재 과정에서 예상했던 범인과 대체로 비슷하다고도 했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 나오는 엉뚱한 용의자 체포·고문, 여경을 투입한 함정수사, 무속신앙 의지 등 과학수사 기법이 미천했던 당시 경찰의 애환을 회고하기도 했다.
김 전 기자는 그러면서도 "최악의 미제사건을 포기하지 않고 매달린 경찰은 칭찬받아 마땅하다"며 "공소시효가 지났지만, 유가족의 아픔을 어느 정도 달래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특히 "당시 사건을 취재한 기자로서 분석 기사와 비판 기사 등을 통한 범인의 조기검거에 일조하지 못한 점이 여전히 아쉽다"며 "후배 기자들은 화성연쇄살인사건과 같은 강력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역할을 다 해줬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연합뉴스
"경찰의 끈질긴 노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경찰과 마찬가지로 언론인으로서 조기 검거에 기여하지 못한 점이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 김종식(63) 전 연합뉴스 기자는 19일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용의자가 특정됐다는 보도에 경찰 출입 기자였던 사건 당시를 떠올리며 전직 언론인으로서 씁쓸한 소회를 전했다.
김 전 기자가 사건 현장에 투입된 것은 1986년 12월 12일 밤 화성군 태안면 안녕리 축대 근처에서 권모(당시 24세)씨가 양손이 스타킹으로 결박당한 채 머리에 속옷이 씌워진 상태로 살해당한 3차 사건.
태안면사무소 인근 화성경찰서 태안지소에 수사본부가 차려졌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갔다.
수사본부를 방문한 지역 국회의원 비서관이라고 경찰들을 안심시킨 뒤 면사무소에서 이들이 복사하는 수사보고서를 입수했다.
"1986년 9월과 10월 1차 사건과 2차 사건이 발생했는데 지역신문에 1∼2단으로 조그맣게 변사 기사로 났어요.
3차 사건이 났는데 또 태안면이었고 보고서를 확인하곤 놀랐습니다.
전화로 기사를 불렀고 이후 방송·신문사 기자들이 속속 수사본부로 집결했죠."
3차 사건이 발생한 지 12일 만에 태안면 인근인 정남면 관항리 농수로 근처에서 이모(당시 23세)씨가 역시 스타킹으로 결박된 채 숨진 4차 사건이 발생했고 김 전 기자는 그때부터 기사에 '부녀자연쇄강간살인사건'으로 사건명을 붙였다고 회고했다.
이후 언론은 화성 일대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을 '화성연쇄살인사건'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1년 4월 10차 사건까지 이어지며 연쇄살인사건으로 명명한 데 대해 자책하기도 했다.
김 전 기자는 유력 용의자로 지목된 A(56)씨의 DNA가 검출된 3개 사건 가운데 5차 사건의 경우 사건 현장과 관계자들을 취재하다 경찰과 심한 몸싸움을 벌였다고 기억했다.
A씨가 잔혹하고 치밀한 수법으로 처제를 성폭행한 뒤 살해하고 무기수로 복역 중이라는 소식에 당시 취재 과정에서 예상했던 범인과 대체로 비슷하다고도 했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 나오는 엉뚱한 용의자 체포·고문, 여경을 투입한 함정수사, 무속신앙 의지 등 과학수사 기법이 미천했던 당시 경찰의 애환을 회고하기도 했다.
김 전 기자는 그러면서도 "최악의 미제사건을 포기하지 않고 매달린 경찰은 칭찬받아 마땅하다"며 "공소시효가 지났지만, 유가족의 아픔을 어느 정도 달래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특히 "당시 사건을 취재한 기자로서 분석 기사와 비판 기사 등을 통한 범인의 조기검거에 일조하지 못한 점이 여전히 아쉽다"며 "후배 기자들은 화성연쇄살인사건과 같은 강력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역할을 다 해줬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