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밑이 어두웠다…3년만에 가능했을 화성사건해결 33년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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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처제 살인범으로 잡고도 DNA 추출·분석기법 없어 '허송세월'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살인의 추억'의 유명한 대사 "밥은 먹고 다니냐."
같은 영화 포스터에 큼직하게 적혀있는 문구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1986∼1991년 온 국민을 몸서리치게 했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살아는 있는지, 그 궁금증과 반드시 잡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이 영화의 주제를 대변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많은 국민이 그 염원에 지금까지도 공감해왔다. 그런데 첫 연쇄살인사건 발생 33년만인 18일 드디어 밝혀진 유력 용의자 A(56)씨는 황당하게도 지난 1994년 1월 충북 청주에서 처제를 강간 살인한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 넘게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었다.
경찰은 마지막 10차 살인사건이 발생한 1991년 4월 이후 3년여만에 비록 다른 사건이기는 하지만 희대의 살인마를 잡아놓고도 수십년간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장기미제사건 리스트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두웠던 셈이다.
눈앞에 있던 진범을 바로 알아보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당시 과학수사 기법이 걸음마 단계였다는 불가항력적 요인에 있다.
지금은 각 경찰서에 과학수사팀이 꾸려져 강력사건은 물론이고 화재 등 대부분 사건·사고 현장에 과학수사 요원이 투입돼 현장 감식, 증거 확보 및 분석으로 범인을 밝혀내거나 사고 경위, 원인을 파악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화성연쇄살인사건 발생 당시만 해도 DNA 분석은 낯선 용어였다.
모방 범죄로 밝혀진 1988년 9월 8차 사건에 이르러서야 국내에서 처음으로 DNA 분석기법이 동원됐다.
과학수사 기법이 발달하지 않았던 터라 1991년엔 DNA 분석을 일본에 의뢰해야 했다.
이 의뢰에서도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나마 2009년 12월 'DNA 신원확인 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범죄자 DNA와 미제사건 용의자의 DNA를 보관하게 됐지만, 이때는 이미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모든 사건 공소시효가 만료된 뒤였다.
2016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장기미제 강력사건 지원팀'을 꾸려 공소시효가 폐지된 장기 미해결 살인사건 현장 등에서 수집·보관해 온 DNA에 신기술을 적용해 재분석하는 작업을 하며 장기미제사건 해결의 결정적 실마리 마련에 힘썼지만, 이마저도 2000년 8월 이후 발생한 살인사건이 대상이었다.
최근 DNA 분석기술 발달로 장기미제로 남겨졌던 사건들의 실체가 속속 밝혀지자, 경찰이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보관 중이던 화성연쇄살인사건 관련 증거품을 국과수에 보내 재분석을 의뢰하면서 이제라도 유력용의자를 특정해 낸 성과를 냈다지만, '좀 더 빨리 찾을 순 없었을까'하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는 대목들이다.
DNA 분석기법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불가항력적 요인은 차치하더라도 1994년 청주 처제 살인사건의 잔혹함과 시신 유기 등 범죄의 치밀함, 범인의 나이대 등을 고려해 화성연쇄살인사건과의 연계성을 의심하고 면밀히 따져봤더라면 유가족들의 비통함을, 피해자들의 원통함을 하루라도 빨리 달랠 수 있지 않았을까. /연합뉴스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살인의 추억'의 유명한 대사 "밥은 먹고 다니냐."
같은 영화 포스터에 큼직하게 적혀있는 문구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1986∼1991년 온 국민을 몸서리치게 했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살아는 있는지, 그 궁금증과 반드시 잡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이 영화의 주제를 대변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많은 국민이 그 염원에 지금까지도 공감해왔다. 그런데 첫 연쇄살인사건 발생 33년만인 18일 드디어 밝혀진 유력 용의자 A(56)씨는 황당하게도 지난 1994년 1월 충북 청주에서 처제를 강간 살인한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 넘게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었다.
경찰은 마지막 10차 살인사건이 발생한 1991년 4월 이후 3년여만에 비록 다른 사건이기는 하지만 희대의 살인마를 잡아놓고도 수십년간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장기미제사건 리스트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두웠던 셈이다.
눈앞에 있던 진범을 바로 알아보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당시 과학수사 기법이 걸음마 단계였다는 불가항력적 요인에 있다.
지금은 각 경찰서에 과학수사팀이 꾸려져 강력사건은 물론이고 화재 등 대부분 사건·사고 현장에 과학수사 요원이 투입돼 현장 감식, 증거 확보 및 분석으로 범인을 밝혀내거나 사고 경위, 원인을 파악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화성연쇄살인사건 발생 당시만 해도 DNA 분석은 낯선 용어였다.
모방 범죄로 밝혀진 1988년 9월 8차 사건에 이르러서야 국내에서 처음으로 DNA 분석기법이 동원됐다.
과학수사 기법이 발달하지 않았던 터라 1991년엔 DNA 분석을 일본에 의뢰해야 했다.
이 의뢰에서도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나마 2009년 12월 'DNA 신원확인 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범죄자 DNA와 미제사건 용의자의 DNA를 보관하게 됐지만, 이때는 이미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모든 사건 공소시효가 만료된 뒤였다.
2016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장기미제 강력사건 지원팀'을 꾸려 공소시효가 폐지된 장기 미해결 살인사건 현장 등에서 수집·보관해 온 DNA에 신기술을 적용해 재분석하는 작업을 하며 장기미제사건 해결의 결정적 실마리 마련에 힘썼지만, 이마저도 2000년 8월 이후 발생한 살인사건이 대상이었다.
최근 DNA 분석기술 발달로 장기미제로 남겨졌던 사건들의 실체가 속속 밝혀지자, 경찰이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보관 중이던 화성연쇄살인사건 관련 증거품을 국과수에 보내 재분석을 의뢰하면서 이제라도 유력용의자를 특정해 낸 성과를 냈다지만, '좀 더 빨리 찾을 순 없었을까'하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는 대목들이다.
DNA 분석기법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불가항력적 요인은 차치하더라도 1994년 청주 처제 살인사건의 잔혹함과 시신 유기 등 범죄의 치밀함, 범인의 나이대 등을 고려해 화성연쇄살인사건과의 연계성을 의심하고 면밀히 따져봤더라면 유가족들의 비통함을, 피해자들의 원통함을 하루라도 빨리 달랠 수 있지 않았을까.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