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셀라론의 계단'에 반하다…그 여자 '하얀 비밀 골목'을 거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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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향기
그 남자 그 여자의 여행 -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그 남자 그 여자의 여행 -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정열의 나라 브라질은 두 팔을 벌려 그들이 가진 정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여행자에게는 어쩌면 브라질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진실된 친구 같을지도 모르겠다. 브라질의 영토는 러시아 캐나다 미국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크며, 인구는 2억 명이 넘는다. 그야말로 거대한 나라다. 즉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는 얘기. 이 중에서도 리우데자네이루는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브라질의 도시 중 하나다.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리우데자네이루는 시이며, 리우데자네이루주에 속해 있다. 이번 그 남자 그 여자의 여행지는 리우데자네이루주에 속해 있는 리우데자네이루와 파라티다. 대도시와 어촌 마을, 상반된 두 매력에 빠져보자.
그 남자: 여행지에서의 벽
색색 타일로 완성한 셀라론의 계단
아주 가까운 옛날, 칠레 예술가이자 여행가 셀라론이 살고 있었다. 세계를 여행하던 그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아름다움에 심취해 빈민가에 정착했다. 자신이 머무른 공간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을까? 그는 빈민가에 불과하던 마을을 타일로 아름답게 가꿔가기 시작했고, 그의 꿈에 감동한 여행자들은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타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하나둘 모여든 다양한 조각은 세상에 둘도 없는 ‘셀라론의 계단’이라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냈다. 햇살이 아름답던 어느 날, 셀라론은 그의 꿈이 담긴 계단에서 행복한 미소와 함께 조용히 눈을 감았다.
수많은 여행자가 보낸 색색의 타일로 완성됐다는 셀라론의 계단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가장 먼저 만나고 싶었던 곳이다. 지저분한 골목이 수많은 타일로 새롭게 태어난 곳, 그럼에도 예술과 삶이 공존하는 곳.
브라질 국기의 초록색과 노란색 타일로 꾸며진 계단을 올라설 때마다 브라질의 진한 향기가 온몸에 전해진다. 계단을 사이에 두고 높게 솟은 두 개의 벽은 붉은색 조각들로 거대한 도화지를 만들었다. 그 안에 그려진 세상의 이야기들. 에펠탑 아래 펼쳐진 초원을 뛰노는 말들이 보인다. 푸른 바다를 굽어보는 파란 등대의 푸른 불빛을 받은 연인들은 조용히 탱고를 추고 있고, 마이클 잭슨과 밥 말리가 함께 부르는 이매진(imagine) 선율에 모아이 석상이 살며시 미소를 짓는다. 정해진 룰 없이 마음 가는 대로 배열된 수천, 수만 개의 조각은 저마다의 목소리로 자유로운 세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셀라론의 꿈이 그려낸 이곳에서는 정치도, 계급도, 차별도 없이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
전 세계 각양각색 타일…빈민가 골목에 예술을 입히다
원색의 해안가 마을 파라티
벽을 사이에 두고 존재하는 두 개의 공간
셀라론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서 한참을 걸었을까. 서늘한 기운에 주위를 둘러보니 타일로 만들어진 예쁜 벽이 어느새 험한 벽화가 그려진 골목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뿔싸! 잊고 있었다. 이곳은 리우데자네이루에서도 험하기로 소문난 빈민가가 아닌가? 밝은 햇살이 자취를 감춘 골목은 무겁게 내려앉은 어두운 기운에 덮여 있다.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흐른다. 되돌아갈까? 아니면 무작정 앞으로 뛰어 달려 나갈까? 이런 급작스러운 행동들이 초점 없는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지는 않을까? 그냥 태연한 척 걷자. 지금까지처럼 아무렇지 않게 사진을 찍으면서 태연하게 걷자. 그 순간 만났다. 어쩌면 내가 가장 보고 싶었던 그들의 진솔한 삶이 담긴 벽을…. 벽 한가득 어지러운 낙서와 수명이 다한 채 대롱대롱 매달린 전선들, 한쪽 벽면에 얼룩져 있는 방뇨의 흔적, 무기력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며 하품하는 여인, 이런 분위기와는 대조적인 원색의 그래피티로 뒤덮인 창고 문. 골목이 형성된 이후로 줄곧 그 자리를 지켜온 듯한 벽은 그 자체로 많은 세월이 담긴 삶의 진면목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리우데자네이루 빈민가의 삶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싶었던 작가로서의 나의 바람이 이뤄졌다.
여행자라는 이름으로 거리를 걷다 보면 두 개의 공간이 존재함을 깨닫게 된다. 벽을 사이에 두고 존재하는 두 개의 공간. 하나는 벽 외부의 여행자를 위한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벽 안쪽에 존재하는 주거인들의 공간이다. 셀라론의 계단이 여행자를 위한 공간이라면 빈민가에서 만난 공간은 주거인들의 공간인 셈이다. 이방인의 꿈이 담긴 벽과 세월의 깊이가 묻어나던 달동네의 벽은 모두 진실함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은 남미에서 만난 수많은 자연의 경이로움과도 닮아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 주던 남미에서의 인연들. 그들과의 작별인사가 쉽지 않았던 것은 그 속에 담긴 진실함이 그 어느 곳에서 마주했던 진실함보다 더 깊고, 더 진했기 때문이리라.
그 여자: 하얀 마을의 골목을 찾아서
새하얀 벽과 운치 있는 돌길이 인상적인 파라티
10년 가까이 밤낮으로 일만 했으니 1년쯤은 쉬어도 괜찮겠지. 그런 마음에 올라선 길이었고, 그 시작은 늦가을이었다. 추위를 극도로 싫어하는 우린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곧장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왔지만 보통은 시차 적응을 위해 지구가 도는 방향대로 따라 도는 게 ‘여행의 정석’이라고 했다. 하지만 여행에 정도가 어디 있고, 정석이 어디 있으랴? 가끔 인터넷 카페에서 ‘이 일정 동안 이 루트로 여행하는 게 가능할까요?’라고 묻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글쎄, 가능하기도 하고 가능하지 않기도 하다. 여행은, 아니 세상은 탁자에 펼쳐놓은 지도처럼 평면적이고 단순하지가 않다. 우리가 애초 중남미, 북미, 유럽을 각각 4개월 여행하기로 계획했었지만 중남미에서만 벌써 7개월째 머무르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파라티도 원래 계획엔 없었으나 함께 여행하던 친구의 말에 이끌려 들르게 된 곳이다. 내가 경험한 파라티는 ‘직접 가보지 않고 이 마을을 그려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곳이다. ‘브라질은 위험한 나라 아니냐?’는 고정관념이 조금이라도 머릿속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터. 파라티는 브라질의 악명 높은 두 도시인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 사이 어디쯤에 있는 바닷가 마을인데, 우리가 여행한 도시를 놓고 치안 순위를 따졌을 때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곳이 이곳이다.
파라티의 첫인상은 ‘하얗다’였다. 구시가지로 들어서면 온통 새하얀 벽과 운치 있는 옛 돌길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다음은 벽 안쪽의 문과 창문들이 눈에 띄는데, 여기서 파라티를 묘사하기 위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접사를 꼽자면 ‘새-’이다. 새하얀색 벽을 스케치북 삼아 새파란 문을 그려 넣고, 문틀은 새빨갛게 칠한다. 이번엔 샛노란색 창문에 진녹색 테두리, 뭐 내키는 대로 샛노란색 문과 창문에 샛노란색 문틀과 창틀도 좋다. 갈색, 하늘색, 주황색, 보라색 등 쓰고 싶은 색이 있다면 어떤 색도 섞지 않은 원색 그대로를 칠하면 된다. 어느 누가 집들을 이와 같이 칠하기 시작했을까? 벽 전체를 색색이 칠한 마을은 봤어도 파라티 같은 방식으로 칠한 마을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저 색과 저 색을 함께 쓸 수 있지?’ 하는 의문이 드는 조합조차도 이곳에선 화가의 예술 작품처럼 멋진 조화를 이루며 발색했다.
골목마다 독특하고 개성 있는 볼거리
외벽의 특색만큼이나 가게 하나, 갤러리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이 독특하고 개성 있는 볼거리가 넘쳐난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특이한 점은 간판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가게를 상징하는 물건이 대문 앞에 걸려 있거나 그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시계방에는 눈길을 끄는 예쁜 시계가 걸려 있거나 옷가게에는 남미 특유의 강렬한 옷들이 줄줄이 걸려 있고, 화가의 작업실에는 커다란 색연필이 그려져 있는 식이다. 원래 평화롭고 안전하면 지루하기 십상인데 이곳은 골목마다 신기한 것, 재미있는 것, 심지어 인생 철학까지 존재하니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마치 미와 지성을 두루 갖췄는데 섹시하기까지 한 ‘만인의 이상형’ 같다고나 할까.
반나절이면 둘러볼 만큼 작은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걸음은 직선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모든 골목을 지그재그로 활보하느라 매우 더뎠다. 구경도 구경이지만 한 달에 한 번 보름달이 뜨는 날, 마을 중 한 골목에 바닷물이 밀려 들어와 장관을 이룬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이 보름달이 뜨는 날이다. 사실 보름달이 뜨는 날인지 그냥 밀물 때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골목길이 정확히 어느 골목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동네 사람들에게도 물어봤지만 ‘아! 그런 곳이 있기는 하지. 근데 어딘지는 잘 모르겠네. 바다가 저쪽이니까 저쪽으로 한 번 가 봐’ 정도의 모호한 답변만 돌아왔다. 여행자는 알지만 현지인은 모르는 그 골목은 대체 어디일까.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사람은 애타게 찾고 있는데, 정작 동네 사람은 관심도 없는 그 골목을 찾아 몇 시간을 헤맸을까. 마침내 만난 아름다운 반영 앞에서 우린 아이처럼 기뻐했다. 그 남자는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고, 난 어느 집 대문 앞에 앉아 우두커니 아름다움을 바라봤다. 바다에서 밀려들어온 물이 시나브로 다 빠져나가자 골목은 비 온 뒤 젖은 정도의 물기밖에 남지 않았고, 색이 조금 짙어진 돌길도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평정을 되찾았다.
방금 전까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니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꿈을 꾼 것 같았다. 한국에서 사표를 내고 떠나왔다는 사실도, 떠나온 지 7개월이 훌쩍 지나버렸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내 옆에 항상 그가 있었다는 사실까지도 이 모든 게 긴 꿈을 꾼 것만 같았다. 4개월을 계획했던 중남미 여행. 귀가 얇은 우리의 여행은 늘 정해진 루트에서 조금씩 벗어나 삐뚤빼뚤하게 지나왔고, 시간은 두 배 가까이 지체됐다. 그래서 더 자유롭고, 그래서 더 즐거울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이제 나는 안다.
리우데자네이루 = 글 정민아 여행작가 jma7179@naver.com
글·사진 오재철 여행작가 nixboy99@daum.net
여행메모
리우데자네이루는 상파울루에 이어 브라질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1763년부터 1960년까지 브라질의 수도였으며, 현재는 리우데자네이루주의 주도다. 세계 3대 미항으로 꼽히며,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파라티 역시 리우데자네이루주에 속해 있으며,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 사이에 있는 휴양 마을이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약 260㎞ 떨어져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의 9월은 평균 최저기온 19.2도, 최고기온 25도로 한국의 9월과 비슷한 날씨를 보인다. 시차는 한국보다 12시간 느리다.
그 남자: 여행지에서의 벽
색색 타일로 완성한 셀라론의 계단
아주 가까운 옛날, 칠레 예술가이자 여행가 셀라론이 살고 있었다. 세계를 여행하던 그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아름다움에 심취해 빈민가에 정착했다. 자신이 머무른 공간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을까? 그는 빈민가에 불과하던 마을을 타일로 아름답게 가꿔가기 시작했고, 그의 꿈에 감동한 여행자들은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타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하나둘 모여든 다양한 조각은 세상에 둘도 없는 ‘셀라론의 계단’이라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냈다. 햇살이 아름답던 어느 날, 셀라론은 그의 꿈이 담긴 계단에서 행복한 미소와 함께 조용히 눈을 감았다.
수많은 여행자가 보낸 색색의 타일로 완성됐다는 셀라론의 계단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가장 먼저 만나고 싶었던 곳이다. 지저분한 골목이 수많은 타일로 새롭게 태어난 곳, 그럼에도 예술과 삶이 공존하는 곳.
브라질 국기의 초록색과 노란색 타일로 꾸며진 계단을 올라설 때마다 브라질의 진한 향기가 온몸에 전해진다. 계단을 사이에 두고 높게 솟은 두 개의 벽은 붉은색 조각들로 거대한 도화지를 만들었다. 그 안에 그려진 세상의 이야기들. 에펠탑 아래 펼쳐진 초원을 뛰노는 말들이 보인다. 푸른 바다를 굽어보는 파란 등대의 푸른 불빛을 받은 연인들은 조용히 탱고를 추고 있고, 마이클 잭슨과 밥 말리가 함께 부르는 이매진(imagine) 선율에 모아이 석상이 살며시 미소를 짓는다. 정해진 룰 없이 마음 가는 대로 배열된 수천, 수만 개의 조각은 저마다의 목소리로 자유로운 세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셀라론의 꿈이 그려낸 이곳에서는 정치도, 계급도, 차별도 없이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
전 세계 각양각색 타일…빈민가 골목에 예술을 입히다
원색의 해안가 마을 파라티
벽을 사이에 두고 존재하는 두 개의 공간
셀라론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서 한참을 걸었을까. 서늘한 기운에 주위를 둘러보니 타일로 만들어진 예쁜 벽이 어느새 험한 벽화가 그려진 골목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뿔싸! 잊고 있었다. 이곳은 리우데자네이루에서도 험하기로 소문난 빈민가가 아닌가? 밝은 햇살이 자취를 감춘 골목은 무겁게 내려앉은 어두운 기운에 덮여 있다.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흐른다. 되돌아갈까? 아니면 무작정 앞으로 뛰어 달려 나갈까? 이런 급작스러운 행동들이 초점 없는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지는 않을까? 그냥 태연한 척 걷자. 지금까지처럼 아무렇지 않게 사진을 찍으면서 태연하게 걷자. 그 순간 만났다. 어쩌면 내가 가장 보고 싶었던 그들의 진솔한 삶이 담긴 벽을…. 벽 한가득 어지러운 낙서와 수명이 다한 채 대롱대롱 매달린 전선들, 한쪽 벽면에 얼룩져 있는 방뇨의 흔적, 무기력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며 하품하는 여인, 이런 분위기와는 대조적인 원색의 그래피티로 뒤덮인 창고 문. 골목이 형성된 이후로 줄곧 그 자리를 지켜온 듯한 벽은 그 자체로 많은 세월이 담긴 삶의 진면목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리우데자네이루 빈민가의 삶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싶었던 작가로서의 나의 바람이 이뤄졌다.
여행자라는 이름으로 거리를 걷다 보면 두 개의 공간이 존재함을 깨닫게 된다. 벽을 사이에 두고 존재하는 두 개의 공간. 하나는 벽 외부의 여행자를 위한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벽 안쪽에 존재하는 주거인들의 공간이다. 셀라론의 계단이 여행자를 위한 공간이라면 빈민가에서 만난 공간은 주거인들의 공간인 셈이다. 이방인의 꿈이 담긴 벽과 세월의 깊이가 묻어나던 달동네의 벽은 모두 진실함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은 남미에서 만난 수많은 자연의 경이로움과도 닮아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 주던 남미에서의 인연들. 그들과의 작별인사가 쉽지 않았던 것은 그 속에 담긴 진실함이 그 어느 곳에서 마주했던 진실함보다 더 깊고, 더 진했기 때문이리라.
그 여자: 하얀 마을의 골목을 찾아서
새하얀 벽과 운치 있는 돌길이 인상적인 파라티
10년 가까이 밤낮으로 일만 했으니 1년쯤은 쉬어도 괜찮겠지. 그런 마음에 올라선 길이었고, 그 시작은 늦가을이었다. 추위를 극도로 싫어하는 우린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곧장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왔지만 보통은 시차 적응을 위해 지구가 도는 방향대로 따라 도는 게 ‘여행의 정석’이라고 했다. 하지만 여행에 정도가 어디 있고, 정석이 어디 있으랴? 가끔 인터넷 카페에서 ‘이 일정 동안 이 루트로 여행하는 게 가능할까요?’라고 묻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글쎄, 가능하기도 하고 가능하지 않기도 하다. 여행은, 아니 세상은 탁자에 펼쳐놓은 지도처럼 평면적이고 단순하지가 않다. 우리가 애초 중남미, 북미, 유럽을 각각 4개월 여행하기로 계획했었지만 중남미에서만 벌써 7개월째 머무르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파라티도 원래 계획엔 없었으나 함께 여행하던 친구의 말에 이끌려 들르게 된 곳이다. 내가 경험한 파라티는 ‘직접 가보지 않고 이 마을을 그려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곳이다. ‘브라질은 위험한 나라 아니냐?’는 고정관념이 조금이라도 머릿속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터. 파라티는 브라질의 악명 높은 두 도시인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 사이 어디쯤에 있는 바닷가 마을인데, 우리가 여행한 도시를 놓고 치안 순위를 따졌을 때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곳이 이곳이다.
파라티의 첫인상은 ‘하얗다’였다. 구시가지로 들어서면 온통 새하얀 벽과 운치 있는 옛 돌길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다음은 벽 안쪽의 문과 창문들이 눈에 띄는데, 여기서 파라티를 묘사하기 위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접사를 꼽자면 ‘새-’이다. 새하얀색 벽을 스케치북 삼아 새파란 문을 그려 넣고, 문틀은 새빨갛게 칠한다. 이번엔 샛노란색 창문에 진녹색 테두리, 뭐 내키는 대로 샛노란색 문과 창문에 샛노란색 문틀과 창틀도 좋다. 갈색, 하늘색, 주황색, 보라색 등 쓰고 싶은 색이 있다면 어떤 색도 섞지 않은 원색 그대로를 칠하면 된다. 어느 누가 집들을 이와 같이 칠하기 시작했을까? 벽 전체를 색색이 칠한 마을은 봤어도 파라티 같은 방식으로 칠한 마을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저 색과 저 색을 함께 쓸 수 있지?’ 하는 의문이 드는 조합조차도 이곳에선 화가의 예술 작품처럼 멋진 조화를 이루며 발색했다.
골목마다 독특하고 개성 있는 볼거리
외벽의 특색만큼이나 가게 하나, 갤러리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이 독특하고 개성 있는 볼거리가 넘쳐난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특이한 점은 간판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가게를 상징하는 물건이 대문 앞에 걸려 있거나 그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시계방에는 눈길을 끄는 예쁜 시계가 걸려 있거나 옷가게에는 남미 특유의 강렬한 옷들이 줄줄이 걸려 있고, 화가의 작업실에는 커다란 색연필이 그려져 있는 식이다. 원래 평화롭고 안전하면 지루하기 십상인데 이곳은 골목마다 신기한 것, 재미있는 것, 심지어 인생 철학까지 존재하니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마치 미와 지성을 두루 갖췄는데 섹시하기까지 한 ‘만인의 이상형’ 같다고나 할까.
반나절이면 둘러볼 만큼 작은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걸음은 직선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모든 골목을 지그재그로 활보하느라 매우 더뎠다. 구경도 구경이지만 한 달에 한 번 보름달이 뜨는 날, 마을 중 한 골목에 바닷물이 밀려 들어와 장관을 이룬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이 보름달이 뜨는 날이다. 사실 보름달이 뜨는 날인지 그냥 밀물 때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골목길이 정확히 어느 골목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동네 사람들에게도 물어봤지만 ‘아! 그런 곳이 있기는 하지. 근데 어딘지는 잘 모르겠네. 바다가 저쪽이니까 저쪽으로 한 번 가 봐’ 정도의 모호한 답변만 돌아왔다. 여행자는 알지만 현지인은 모르는 그 골목은 대체 어디일까.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사람은 애타게 찾고 있는데, 정작 동네 사람은 관심도 없는 그 골목을 찾아 몇 시간을 헤맸을까. 마침내 만난 아름다운 반영 앞에서 우린 아이처럼 기뻐했다. 그 남자는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고, 난 어느 집 대문 앞에 앉아 우두커니 아름다움을 바라봤다. 바다에서 밀려들어온 물이 시나브로 다 빠져나가자 골목은 비 온 뒤 젖은 정도의 물기밖에 남지 않았고, 색이 조금 짙어진 돌길도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평정을 되찾았다.
방금 전까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니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꿈을 꾼 것 같았다. 한국에서 사표를 내고 떠나왔다는 사실도, 떠나온 지 7개월이 훌쩍 지나버렸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내 옆에 항상 그가 있었다는 사실까지도 이 모든 게 긴 꿈을 꾼 것만 같았다. 4개월을 계획했던 중남미 여행. 귀가 얇은 우리의 여행은 늘 정해진 루트에서 조금씩 벗어나 삐뚤빼뚤하게 지나왔고, 시간은 두 배 가까이 지체됐다. 그래서 더 자유롭고, 그래서 더 즐거울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이제 나는 안다.
리우데자네이루 = 글 정민아 여행작가 jma7179@naver.com
글·사진 오재철 여행작가 nixboy99@daum.net
여행메모
리우데자네이루는 상파울루에 이어 브라질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1763년부터 1960년까지 브라질의 수도였으며, 현재는 리우데자네이루주의 주도다. 세계 3대 미항으로 꼽히며,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파라티 역시 리우데자네이루주에 속해 있으며,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 사이에 있는 휴양 마을이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약 260㎞ 떨어져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의 9월은 평균 최저기온 19.2도, 최고기온 25도로 한국의 9월과 비슷한 날씨를 보인다. 시차는 한국보다 12시간 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