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원 한경필 음악감독 지휘로
'가을에 듣는 음악 이야기' 펼쳐
1부에서는 주세페 베르디의 중기시대를 연 걸작 오페라 ‘리골레토’의 하이라이트 무대로 꾸며졌다. 테너 김승직과 소프라노 이수연, 바리톤 김동섭이 ‘리골레토’의 세 주역인 만토바 공작과 질다, 리골레토 역을 각각 맡았다. 비극적인 결말을 암시하는 듯 음울하게 흐르는 전주곡에 이어 아리아 ‘이 여자도 저 여자도’로 본격적인 공연의 막을 올렸다. 극 초반 호색한인 만토바 공작이 자신의 여성편력을 과시하는 노래다. 김승직은 힘이 있으면서도 깨끗한 음색으로 바람둥이인 만토바 공작의 매력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만토바 공작과 질다의 듀엣곡 ‘사랑과 영혼의 태양’에 이어 소프라노의 유명한 아리아 ‘그리운 그 이름’이 흘렀다. 만토바 공작이 어릿광대 리골레토의 딸 질다를 유혹하려고 변장한 가난한 학생의 이름 ‘괄티에르 말데’를 부르며 시작하는 노래다. 독일 올덴부르크 국립극장의 전속 가수로 활동하며 질다 역으로 무대에 선 경험이 있는 이수연은 뛰어난 기교와 풍부한 감성으로 괄티에르 말데에 빠진 순진무구한 처녀의 심정을 객석에 고스란히 전달했다. 김동섭은 딸을 납치한 무리에게 저주를 퍼붓는 ‘천벌 받을 놈들아’와 리골레토와 질다가 함께 부르는 ‘복수하리 무서운 복수를’을 통해 아버지의 간절함과 안타까움, 복수에 찬 분노를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묵직하게 그려냈다. 김승직이 이 작품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아리아 ‘여자의 마음’을 열창하며 1부 공연은 마무리됐다.
무대 장치와 조명, 의상을 갖추지 않고 배역도 한정적인 무대였지만 가수들은 놀라운 집중력으로 극중 인물에 몰입해 감정선을 살려냈다. 오스트리아 티롤주립극장에서 수석지휘자로 활동하며 연간 수십 회의 오페라 공연을 올리는 홍 감독의 장기와 기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무대였다. 가수들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세밀한 반주, 아리아와 아리아 사이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구성에 관객의 이해를 돕는 자막을 더해 객석을 ‘리골레토’의 세계로 빠져들게 했다.
신비롭고 매혹적인 ‘세헤라자데’
2부에서는 김연아 선수의 세계피겨선수권대회 프리스케이팅 프로그램 곡으로 잘 알려진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관현악곡 ‘세헤라자데’가 연주됐다. 아라비안나이트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슬람 설화집 ‘천일야화’를 기반으로 한 표제음악이다. 천일야화는 술탄 샤리야르의 신부가 된 세헤라자데가 매일 밤 신랑에게 들려주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다. 작곡가는 세헤라자데가 샤리야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습과 천일야화 속 몇 가지 이야기를 음악적 상상력을 발휘해 4악장으로 구성했다.
홍 감독은 악장마다 숨어 있는 신비로움과 긴장감, 모험, 애절함을 세밀하게 파고들어 객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무대를 펼쳐 보였다. 금관악기의 합주가 왕의 위압감을 드러내며 시작한 1악장은 한경필 악장 김현남이 왕비 세헤라자데의 주제를 신비롭고 이국적인 선율로 연주하는 바이올린 솔로로 이어졌다. 주제 선율을 따라가는 악기들의 다채로운 변주가 화려함을 더해갔다. 한경필 단원들의 합이 돋보이는 연주였다. 3악장에서는 신비로운 현악의 선율이 왕자와 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우아하면서도 관능적으로 펼쳐냈다.
이전 악장들의 여러 주제가 어우러지면서 바그다드의 축제(4악장)가 변화무쌍하고 현란하게 전개됐다. 마침내 바이올린 독주의 세헤라자데 주제와 저음현의 차분한 왕의 주제가 아름다운 결합을 알리며 마무리되자 “브라보”란 외침과 함께 환호가 터져나왔다. 기립박수가 한참 이어졌다. ‘가을에 듣는 음악 이야기’라는 부제에 맞게 클래식 선율의 극적 여운이 오랫동안 남는 무대였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