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에 고문·살해된 신부…가족있는 수용자 대신해 죽음 자처
수용소 전시관 '참혹한 기억' 그대로…무더기 진열된 유품서 학살규모 짐작
아우슈비츠 '18번방'의 콜베…동료를 대신해 죽어간 성인
(오시비엥침 "대신 죽겠소."
1941년 7월 말 독일 아우슈비츠 수용소. 나치는 수감자 1명이 탈출하자 다른 수감자들에게 연대책임을 물어 10명을 처형하기로 한다.

수감자 대열에서 처형 대상자들이 정해졌으나 프란치섹 가조브니체크라는 수감자가 자신에게는 가족과 아이들이 있다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이때 수감자 무리에 있던 폴란드 출신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Maksymilian Maria Kolbe) 신부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돌봐야 할 가족이 있는 그를 대신해 자신이 죽겠다는 것이다.

콜베 신부는 동료 수감자 9명과 함께 수용소 '아사방'에 갇혔다.

이 방에 들어간 수감자들은 어떤 음식도 받지 못하고 굶어 죽어간다.

아사하는 과정에도 제대로 눕거나 앉을 수 없을 정도로 수용 공간은 비좁았다.

아사방에 갇힌 지 2주가 지나자 수감자 6명이 죽어 나갔다.

콜베 신부를 포함한 4명은 극심한 고통 속에도 숨이 붙어있었지만, 나치는 아사방을 비워 다른 수감자를 고문하고자 콜베 신부 등을 주변 감방으로 옮겨 독극물로 살해한다.

그렇게 그는 1941년 8월 14일 아우슈비츠에서 47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시신은 가톨릭교회에서 성모 승천 대축일로 섬기는 이튿날인 15일 소각됐다.

아우슈비츠 '18번방'의 콜베…동료를 대신해 죽어간 성인
콜베 신부는 1941년 2월 17일 나치에 체포돼 수용소로 보내지기 전까지 유대인 난민 쉼터 운영 등 왕성한 선교 활동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1917년 동료 수사들과 함께 '원죄 없으신 선모 마리아의 기사회'를 창설한 그는 대중매체를 활용해 선교 활동을 편 것으로도 유명하다.

1922년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펴냈고, 이후 라틴어·어린이판 잡지 등도 창간했다.

그는 수용소에서도 동료들에게 고해성사와 상담을 하며 종교적 실천을 멈추지 않았다.

나치의 협박과 폭행 속에도 말이다.

콜베 신부가 가톨릭 신자를 넘어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고 존경받는 이유다.

폴란드 남부에 있던 아우슈비츠는 1940년 6월 나치 친위대(SS) 총사령관 하인리히 힘러가 세웠다.

이곳에는 원래 폴란드 육군 병영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나치는 이를 기반으로 수용소를 붉은 벽돌의 건물 28개 동으로 재구성했다.

이곳에 대규모 학살장이 들어선 데에는 살상을 벌이되 은폐하기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아우슈비츠는 도심과 적당하게 떨어진 반면 철로가 가까워 수용자 대량 수송이 용이했다는 것이다.

아우슈비츠 '18번방'의 콜베…동료를 대신해 죽어간 성인
콜베 신부가 선종한 아우슈비츠는 첫 번째 수용소다.

나치는 이후 이곳에서 3㎞ 떨어진 곳에 비르케나우에 두 번째 수용소를 만든다.

두 수용소를 묶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라고 하는데, 비르케나우 규모는 아우슈비츠를 크게 뛰어넘는다.

하지만 소련군이 진주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나치가 비르케나우 시설과 학살의 기록을 대부분 없애고 후퇴해 피해 규모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아우슈비츠의 원래 지역명은 오시비엥침이다.

폴란드는 전후 이곳을 회복한 뒤 학살의 기억을 지우고자 본래의 이름으로 되돌렸다.

유대인과 폴란드인 등 약 150만명의 학살이 이뤄진 아우슈비츠에서는 가스실에서 숨진 이가 대부분이었으나 기아 노동을 하다 공개 교수형이나 총살, 콜베 신부처럼 아사방에서 숨진 이들도 많았다.

콜베 신부가 선종한 곳은 아우슈비츠 내 총 28개 수용소동 중 제11동(block)이다.

이른바 '고문장'으로 불린 곳이다.

23일 기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측 안내를 받아 그 고문장을 찾았다.

내부가 전시관 형태로 바뀌었고, 학살이 있은 지도 80년이 다 돼 갔지만 오래전 참혹했던 기억은 그대로인듯했다.

그만큼 발걸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아우슈비츠 '18번방'의 콜베…동료를 대신해 죽어간 성인
고문장 건물 출입문을 통해 1층에 들어서자 오른쪽으로 수용자들의 처형 방식을 정하는 재판장 사무실이 먼저 보였다.

유리창을 통해 내부를 들여다보니 테이블 뒤쪽으로 나치 총통 아돌프 히틀러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재판장 사무실에서 어떤 식으로 죽일지가 결정된 수용자는 복도를 따라 왼쪽 야외 아니면 오른쪽 아래 지하방으로 이동한다.

왼쪽은 총살, 오른쪽은 콜베 신부가 맞았던 아사, 독살을 의미한다.

콜베 신부가 끌려간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 복도 끝에 머물자 그를 가둔 아사방이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방이라기보다는 숨 막히는 공간이었다.

아사방은 이곳을 찾는 이들이 나치의 학살을 또렷이 기억하도록 전면 벽체 3분의 2가량을 개방해 내부를 보도록 했다.

걸음을 뒤로 물려 다시 지하 복도를 따라가자 콜베 신부가 마지막 순간을 보낸 18번 방이 나타났다.

방 번호를 뜻하는 '18'이라는 숫자는 굳게 닫힌 철문 위 하얀색 바탕 위에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이곳에서 콜베 신부는 페놀을 맞고 숨을 거둔다.

18번방 안에는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에 오른 이듬해인 1979년 6월 2일 아우슈비츠를 찾아 콜베 신부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기증한 초와 월계관이 남아있다.

콜베 신부는 1977년 10월 17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됐다.

1982년 10월 10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그를 성인품에 올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콜베 신부의 감방에서 침묵기도를 올렸다.

아우슈비츠 '18번방'의 콜베…동료를 대신해 죽어간 성인
지하에서 다시 1층으로 올라오니 총살장으로 통하는 출입문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나치는 이들을 총살하기 전 양팔을 뒤로 묶은 뒤 커다란 나무 거취대에 걸어 뒤로 들어 올리는 고문을 가했다.

그렇게 양팔이 부러진 수용자는 총살장까지 10여m를 기어가게 했다고 한다.

나치는 수용자가 죽어가는 과정을 조롱하며 인간성을 모조리 짓밟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학살 희생자들의 유품이 보관됐고, 일부는 전시를 통해 공개한다.

전시관에 놓인 희생자들의 신발, 옷가지, 머리카락, 안경, 짐을 싼 가방, 장애인 보조기구 등 최소 수만점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우슈비츠에서 처음 나온 희생자 머리카락 양만 수 톤에 달했다고 한다.

여태껏 보지 못한 엄청난 양의 구둣솔이 전시관 유리창 안에 쌓인 상태로 진열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우슈비츠 '18번방'의 콜베…동료를 대신해 죽어간 성인
아우슈비츠 '18번방'의 콜베…동료를 대신해 죽어간 성인
수용소 전시관 안내를 맡은 관계자는 "구둣솔은 보통 한 가정당 하나가 있잖아요.

전시된 구둣솔 양만 보더라도 아우슈비츠에서 희생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라며 애도했다.

희생자들을 대량 학살한 독가스실과 이들의 시신을 태워 없앤 소각장도 보존돼 관람객들에게 개방된 상태였다.

나치는 독가스실을 집단 샤워장으로 속여 수용자들을 가둔 뒤 집단 살해했다.

독살용 치클론 가스를 떨어뜨린 네모난 구멍이 가스실 천장 곳곳에 보였다.

그곳을 통해 들어온 햇볕이 내부를 희미하게 비췄다.

이 가스실 뒤편으로는 탈출을 시도한 수용자 등을 조사, 고문, 살해한 나치 친위대 사무실 터가 있었다.

많은 이가 이곳에서 숨져갔다.

현재는 이 공터에 공개 교수형 시설만 남았7다.

아우슈비츠 초대 소장인 루돌프 회스는 전후 폴란드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바로 이곳으로 끌려와 처형당했다.

아우슈비츠 '18번방'의 콜베…동료를 대신해 죽어간 성인
아우슈비츠 '18번방'의 콜베…동료를 대신해 죽어간 성인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