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케임브리지 카운티타운은 도시 전역에 케임브리지대 소속 31개 칼리지가 자리잡고 있는 대학도시다. 1일 도심 곳곳의 수백 년 된 고딕양식 대학 건물을 지나 차를 타고 북서쪽으로 20분가량 가니 드넓은 벌판에 세워진 현대식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미국 실리콘밸리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산학 클러스터로 꼽히는 ‘케임브리지 클러스터’다. 케임브리지대 주도로 세워진 이 클러스터의 성공은 △학생들의 창업 열정 △대학의 적극적인 지원 △기업의 자발적인 참여 등 산학 협력을 위한 ‘3박자’가 골고루 갖춰진 데서 비롯됐다는 분석이다.
케임브리지대 전기공학과 학생들이 1일 클러스터 인근 산학융합연구실에서 차세대 반도체 공정실험을 하고 있다.  /강경민 기자
케임브리지대 전기공학과 학생들이 1일 클러스터 인근 산학융합연구실에서 차세대 반도체 공정실험을 하고 있다. /강경민 기자
실용화 주도하는 대학 연구실

케임브리지 클러스터는 ‘실리콘펜’으로도 불린다. 저지대(펜·fen)에 자리잡은 클러스터를 실리콘밸리에 빗댄 표현이다. 클러스터 인근에는 칼리지 소속 산학융합연구실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케임브리지대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둘러본 방대한 규모의 연구실은 대기업 연구소를 방불케 했다.

이곳에선 첨단 신소재 그리핀부터 TV 디스플레이, 3㎚ 초미세 메모리칩 개발실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삼성과 LG 등 한국 기업에서 제공한 최첨단 연구설비도 눈에 띄었다. 케임브리지대 관계자는 “세계 대학 중 이런 연구시설을 갖춘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며 “이곳에서 개발한 기술을 통해 창업에 나서는 학생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실에서 만난 학생들에게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창업에 관심이 있느냐고 묻자 하나같이 “그렇다”고 답했다.

클러스터 입주 기업의 업종은 정보기술(IT), 반도체, 기계공학, 바이오 등 다양하다. 상당수가 케임브리지대의 교수·학생들이 개발한 기술을 토대로 설립된 스타트업이다. 일본 소프트뱅크가 2016년 인수한 세계적 반도체 설계기업인 ARM도 케임브리지대 학생들이 이곳에서 창업했다. 1500여 개 입주기업이 지난해 올린 매출은 130억파운드(약 19조2300억원)에 이른다.

케임브리지 클러스터의 시초는 1970년 트리니티칼리지가 설립한 사이언스파크다. 이어 세인트존스칼리지 이노베이션센터와 피터하우스칼리지 테크놀로지파크 등 10여 곳의 단지가 속속 들어섰다. 대학 연구실에서 개발한 우수한 기초공학 연구 결과물을 적극적으로 상업화하겠다는 것이 케임브리지 클러스터의 목표다.

첨단기술 '産學 허브'로 떠오른 케임브리지…글로벌 기업 끌어모아
대학 덕분에 부활한 지역경제

케임브리지 클러스터는 정부 지원 없이 독자 성장했다. 사이언스파크 설립 당시 영국 정부는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는 대학의 계획에 반대했다. 수백 년 된 건축물과 방대한 녹지가 펼쳐져 있는 케임브리지에 산학단지가 들어서면 무분별한 개발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개발 규제 때문에 1960년대 후반까지도 케임브리지대 인근에는 드넓은 목초지만 무성했다.

케임브리지대는 클러스터가 조성되면 지역경제에 기여할 수 있다고 정부를 설득했다. 우여곡절 끝에 1970년 사이언스파크가 설립되자 세계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우수한 대학 인력을 채용하는 동시에 창업기업과 기술협력을 하기 위해서였다. 케임브리지대는 영국 대학평가기관인 QS가 올초 발표한 공학기술, 자연과학, 생명공학·의학 등 이공계 전 분야에서 세계 1000개 대학 중 5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침체된 지역경제도 부활했다.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케임브리지의 평균 취업률은 런던의 세 배를 웃돌았다. 파이낸셜타임스는 1980년 ‘케임브리지 현상’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케임브리지 지역경제의 부활을 소개했다. 이후 케임브리지 현상이라는 용어는 대학의 기업 유치를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를 뜻하는 신조어가 됐다.

창업 적극 독려하는 대학

케임브리지대는 2006년 별도의 산학지원 조직인 케임브리지 엔터프라이즈를 설립했다. 케임브리지 엔터프라이즈는 창업을 원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최장 8년간 기술이전을 지원한다. 기술 사업화가 가능한지,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유치할 수 있는지 등을 판단한다.

창업 후에도 지원은 계속된다. 케임브리지 엔터프라이즈는 스타트업에 관리매니저뿐 아니라 재무, 마케팅 등 지원인력도 파견한다. 대부분의 스타트업 구성원이 연구원 출신이어서 재무와 마케팅 분야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회사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면 파견 인력은 복귀한 뒤 다시 다른 스타트업에 파견된다.

삼성과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기업들은 케임브리지 스타트업의 지식재산권을 적극적으로 사들이고 있다. 창업에 성공한 학생들이 대기업에 지식재산권을 매각한 대가로 받은 자금을 토대로 또 다른 창업에 나서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돼 있다는 것이 케임브리지대의 설명이다.

케임브리지=강경민 특파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