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인 이춘재(56)가 14건의 살인과 성폭행·성폭행 미수 30여 건의 범죄를 자신이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DNA(유전자) 증거물과 목격자 증언, 프로파일링 수사 등으로 경찰이 범죄 혐의를 좁혀오자 여죄까지 털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9차 조사까지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던 이씨가 태도를 바꾸면서 관련 수사도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증거·증언 속속 나오자 자백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2일 “이씨가 군대 전역 후인 1986년 1월부터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붙잡힌 1994년 1월까지 8년 사이에 14건의 살인과 30여 건의 성폭행·성폭행 미수 사건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고 밝혔다.
이씨가 자백한 살인 14건은 화성연쇄살인사건 10건 중 모방 범죄로 드러난 8차 사건을 제외한 9건과 화성사건을 전후한 시기 화성 일대에서 발생한 3건, 청주에서 일어난 2건이다. 화성사건 외에도 추가로 5건의 살인을 저질렀다고 자백한 것이다. 경찰은 해당 사건들의 발생 장소와 일시 등은 수사가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밝히지 않았다.
경찰은 이씨가 범행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진술했다고 밝혔다. 반기수 경기남부지청 수사본부장은 “이씨가 일부 사건은 그림까지 그려가며 구체적으로 진술했다”며 “진술의 신빙성을 확인하기 위해 수사 기록과 관련 증거, 사건 관계자를 면밀히 수사할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범행을 부인하던 이씨가 자백을 결심한 것은 추가 증거와 증언들이 나오면서 심리적 압박이 커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경찰은 지난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부터 4차 사건(1986년 12월 14일)에서 이씨의 DNA가 검출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미 DNA가 나온 5·7·9차 사건을 비롯해 총 4개 사건에서 이씨의 DNA가 나왔다. 목격자와 피해자들의 증언도 속속 나왔다. 경찰은 최근 7차 사건(1988년 9월 7일)에서 유력 용의자를 목격한 당시 버스 안내양 엄모씨로부터 “기억 속의 범인이 이씨가 맞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경찰은 엄씨의 과거 기억을 끌어내기 위해 최면 수사 기법도 동원했다.
범죄학 전문가들은 프로파일링 수사도 한몫한 것으로 평가한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이씨와 같은 사이코패스는 주도적 입장이 되려 하는데, 이런 성향을 이용해 자백을 이끌어낸 것으로 보인다”며 “아홉 차례 동안 프로파일러들과 유대관계를 쌓으면서 이씨도 마음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남은 미제사건도 해결될까
이씨가 추가 범죄를 시인하면서 이씨가 거주했던 지역에서 발생한 미제 살인사건들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1988년 1월 수원에서 발생한 여고생 살인사건은 이씨의 추가 범행으로 의심되고 있다. 이 사건은 시신에 남은 결박 흔적 등이 화성연쇄살인사건과 비슷하다. 발생 시기도 6차 사건과 7차 사건 사이에 발생해 이씨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
이씨의 소행으로 의심받는 범행은 청주에도 있다. 이씨는 1991년 7월 A씨와 결혼한 뒤 1993년 4월 주소지를 청주로 옮겼다. 경찰에 따르면 1992년 4월 청주시 강내면과 봉명동에서는 2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27명의 형사를 투입했지만 3개월 넘게 범인을 검거하지 못해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그해 6월 복대동에서도 20대 여성이 피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 관계자는 “현재 경기남부지청과 청주 흥덕경찰서·청원경찰서 문서고에서 이씨가 자백한 범죄 당시의 사건 기록을 살펴보고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