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아찌아 약속 홀로 지키는 정덕영 씨 "왜 계속 가르치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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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교육 온갖 지원 물거품…민간인 350여명이 십시일반 후원
"찌아찌아족, 좋을 때 열광했다가 식으면 비난하는 풍토 아냐"
"한글을 왜 찌아찌아족에게 계속 가르치냐고요? 약속했으니까 지켜야죠."
2010년 3월부터 인도네시아 부톤섬에서 찌아찌아어를 한글교재로 가르쳐온 정덕영(58) 씨는 2일 연합뉴스와 현지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정씨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20년간 근무하다 퇴직 후 외국인 근로자와 다문화가정에 한글과 한국어를 가르쳤다.
그는 2006년 7월 KBS '우리말겨루기'에 출전해 우승할 정도로 실력을 갖췄고, 고려대에서 한국어 교육 석사학위를 받았다.
정씨는 2010년 3월 찌아찌아족을 가르칠 교사로 훈민정음학회를 통해 처음으로 부톤섬에 파견됐다.
그는 "언어에 대한 관심도 많고 모험심도 컸던 것 같다"며 "찌아찌아족을 가르칠 교사를 뽑는다고 하니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그런데 정씨는 2010년 12월 재정·행정적인 문제로 돌아와야 했고, 2012월 1월 부톤섬에 세종학당이 설치돼 다시 파견됐으나 역시 재정적 문제 등으로 7개월 만에 철수했다.
결국 2014년 3월 정씨의 지인과 동창을 주축으로 '한국찌아찌아문화교류협회'를 창립해 같은 해 4월 다시 부톤섬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자리를 지켰다.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부족어 표기법으로 채택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초기에는 중앙정부·지자체 등에서 부톤섬에 문화원을 설립하고 도시개발을 해주겠다는 등 온갖 지원을 약속하더니 제대로 지켜진 게 하나도 없다.
정씨는 친인척과 지인, 협회 회원 등 350여명의 소액 기부금으로 본인 체재비는 물론 교재비, 보조 교사 2∼3명 월급, 비자발급 비용 등 모든 활동비를 충당하고 있다.
언덕배기에 있는 그의 집에는 물이 나흘째 안 나오는 등 성한 곳이 없다.
'귀신 사는 집'이라고 소문난 저렴한 곳을 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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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후원자들의 성원이 없었더라면 10년이 다 되도록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한글을 거기서 왜 가르치느냐'는 말을 한국에서는 들어봤지만, 이곳에서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며 "서로 배우고 싶다고,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는데 어떻게 외면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
지금까지 1천여명이 한글을, 또 다른 1천여명이 한국어를 그로부터 배웠다.
한 푼이라도 아껴 써야 하는 형편인지라, 찌아찌아어 한글교재는 얇은 복사본으로 만들어 배포하고, 한국어 수업은 교재 없이 진행한다.
정씨는 "처음 부톤섬에 왔을 때 찌아찌아족 아이들에게 '한글이 너희들의 글이 됐다' 말하고 함께 여러 가지 꿈을 꿨다"며 "그렇게 희망을 심어줘 놓고 관심이 떨어졌다 해서 손바닥 뒤집듯 떠나버릴 수 없지 않으냐"고 되물었다.
이어 "이곳 사람들은 좋을 때는 열광했다가, 식으면 비난하는 그런 풍토를 가지고 있지 않다"며 "시장을 비롯한 관료들도 적당한 관심과 또 적당한 무관심으로 대해줘 10년 가까이 교육이 이어질 수 있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정씨가 걱정하는 것은 단 한 가지이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부톤섬을 떠나게 될 때, 한글·한국어 교육의 맥이 끊기는 것만은 막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인 교사가 직접 가르치는 것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현지인이 한글·한국어 교수법을 제대로 배워 가르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연합뉴스
"찌아찌아족, 좋을 때 열광했다가 식으면 비난하는 풍토 아냐"
"한글을 왜 찌아찌아족에게 계속 가르치냐고요? 약속했으니까 지켜야죠."
2010년 3월부터 인도네시아 부톤섬에서 찌아찌아어를 한글교재로 가르쳐온 정덕영(58) 씨는 2일 연합뉴스와 현지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정씨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20년간 근무하다 퇴직 후 외국인 근로자와 다문화가정에 한글과 한국어를 가르쳤다.
그는 2006년 7월 KBS '우리말겨루기'에 출전해 우승할 정도로 실력을 갖췄고, 고려대에서 한국어 교육 석사학위를 받았다.
정씨는 2010년 3월 찌아찌아족을 가르칠 교사로 훈민정음학회를 통해 처음으로 부톤섬에 파견됐다.
그는 "언어에 대한 관심도 많고 모험심도 컸던 것 같다"며 "찌아찌아족을 가르칠 교사를 뽑는다고 하니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그런데 정씨는 2010년 12월 재정·행정적인 문제로 돌아와야 했고, 2012월 1월 부톤섬에 세종학당이 설치돼 다시 파견됐으나 역시 재정적 문제 등으로 7개월 만에 철수했다.
결국 2014년 3월 정씨의 지인과 동창을 주축으로 '한국찌아찌아문화교류협회'를 창립해 같은 해 4월 다시 부톤섬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자리를 지켰다.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부족어 표기법으로 채택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초기에는 중앙정부·지자체 등에서 부톤섬에 문화원을 설립하고 도시개발을 해주겠다는 등 온갖 지원을 약속하더니 제대로 지켜진 게 하나도 없다.
정씨는 친인척과 지인, 협회 회원 등 350여명의 소액 기부금으로 본인 체재비는 물론 교재비, 보조 교사 2∼3명 월급, 비자발급 비용 등 모든 활동비를 충당하고 있다.
언덕배기에 있는 그의 집에는 물이 나흘째 안 나오는 등 성한 곳이 없다.
'귀신 사는 집'이라고 소문난 저렴한 곳을 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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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후원자들의 성원이 없었더라면 10년이 다 되도록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한글을 거기서 왜 가르치느냐'는 말을 한국에서는 들어봤지만, 이곳에서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며 "서로 배우고 싶다고,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는데 어떻게 외면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
지금까지 1천여명이 한글을, 또 다른 1천여명이 한국어를 그로부터 배웠다.
한 푼이라도 아껴 써야 하는 형편인지라, 찌아찌아어 한글교재는 얇은 복사본으로 만들어 배포하고, 한국어 수업은 교재 없이 진행한다.
정씨는 "처음 부톤섬에 왔을 때 찌아찌아족 아이들에게 '한글이 너희들의 글이 됐다' 말하고 함께 여러 가지 꿈을 꿨다"며 "그렇게 희망을 심어줘 놓고 관심이 떨어졌다 해서 손바닥 뒤집듯 떠나버릴 수 없지 않으냐"고 되물었다.
이어 "이곳 사람들은 좋을 때는 열광했다가, 식으면 비난하는 그런 풍토를 가지고 있지 않다"며 "시장을 비롯한 관료들도 적당한 관심과 또 적당한 무관심으로 대해줘 10년 가까이 교육이 이어질 수 있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정씨가 걱정하는 것은 단 한 가지이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부톤섬을 떠나게 될 때, 한글·한국어 교육의 맥이 끊기는 것만은 막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인 교사가 직접 가르치는 것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현지인이 한글·한국어 교수법을 제대로 배워 가르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