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후 살인 14건 포함해 무려 40여건 무더기 자백
과거 범행 한창때 메모했다면 가능한 일…허세 가능성도
이춘재 '살인자의 기억법' 과연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인 이춘재(56) 씨가 화성살인사건 9건을 포함해 다른 살인 및 성폭행ㆍ성폭행 미수 사건 40여건을 자신이 저질렀다고 무더기로 자백하고 나섰으나,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면밀한 검증이 필요해 보인다.

무려 30여년 전 과거에 이뤄진 사건들을 모두 기억해 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에 우선 고개가 갸우뚱해지기 때문이다.

살인사건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흉악, 잔혹 범죄인만큼 뇌리에 또렷이 남아있다고 해도, 30여차례에 달하는 성폭행과 성폭행 미수사건까지 일일이 기억해 내기는 쉽지 않아 보여서다.

이에 따라 경찰은 이 씨의 과거 행적을 토대로 화성사건을 전후한 시기에 발생한 전국의 미제 살인·성범죄 사건을 면밀히 살펴 자백 내용의 사실관계 및 또 여죄 여부를 따져볼 방침이다.
이춘재 '살인자의 기억법' 과연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2일 경찰 등에 따르면 이 씨는 군대 전역 후인 1986년 1월부터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붙잡힌 1994년 1월까지 8년 사이에 14건의 살인 사건과 30여건의 성폭행·성폭행 미수 사건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살인 14건은 총 10차례의 화성연쇄살인사건 중 모방 범죄로 드러난 8차 사건을 제외한 9건과 화성사건을 전후한 시기 화성 일대에서 발생한 3건, 청주에서 일어난 2건이다.

성범죄의 경우 발생 시기와 장소 등에 대해 아직 확인된 바 없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그간의 대면조사에서 이 씨의 자발적이고 구체적인 진술이 나왔으나, 현재 단계에선 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는 분위기다.

기억이 단편적이거나 범행시점 등에 대한 기억에 편차가 있다는 것이다.
이춘재 '살인자의 기억법' 과연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만약에 그가 이런 사건들을 모두 기억해 냈다면, 그것은 범죄행각을 한창 벌여나갔을 당시 살인을 비롯해 자신의 범죄를 일일이 메모했을 경우에는 가능할 수도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 씨의 이번 '자발적' 자백은 과거 범죄를 저질러 검거됐을 때 혐의를 부인하거나 범행을 축소하는 태도를 보인 것과는 대조를 보여 신빙성 확인작업이 반드시 병행될 필요가 있다.

기록으로 확인된 이 씨 검거 사건은 1989년 수원 강도예비 사건, 1994년 청주 처제 성폭행 살해사건 등 달랑 2건이다.

이 씨는 1989년 9월 26일 새벽 수원시의 한 집에 흉기를 들고 들어간 혐의로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심에서 징역 1년 6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항소한 그는 "얼굴을 모르는 청년으로부터 폭행당한 뒤 그를 뒤쫓다가 피해자의 집에 들어간 것일 뿐, 금품을 빼앗으려고 흉기를 휴대한 채 침입한 게 아니다"라며 엉뚱한 자기변호를 했다.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이 씨는 화성 9차·10차 사건을 벌이고, 1993년 4월 청주로 이사해 처제를 살해하는 잔혹 범죄를 저질렀다.

이 씨는 1994년 1월 청주에서 자신의 집에 놀러 온 처제(당시 20세) 씨에게 수면제를 탄 음료를 먹이고 성폭행한 뒤 둔기로 수차례 때려 살해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는 범행 후 장인을 찾아가 "뭐 도와드릴 일 없느냐"라며 태연한 모습을 보이고, 처제가 납치된 것 같다며 장인과 함께 파출소를 찾아가 실종신고를 하기도 했다.

검거된 뒤 경찰 조사에서는 명백한 증거에도 발뺌하고 "강간하면 징역을 몇 년 살고, 살인은 몇 년 사느냐"고 묻는 등 뻔뻔한 행태를 보였다.
이춘재 '살인자의 기억법' 과연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된 이 씨가 이번에 화성사건을 비롯한 14건의 살인 사건과 30여건의 성범죄 사건을 스스로 털어놨다고는 하나, 과거 기록으로 드러난 진술 태도에 미뤄볼 때 진술의 신빙성을 담보할 만한 보다 꼼꼼한 검증작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반대로 사실상 가석방이 무산됐다고 판단한 이 씨가 자포자기 심정으로 허위 진술을 했거나, 소위 '소영웅심리'로 하지도 않은 범죄사실에 대해 허세를 부리며 자랑스레 늘어놨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상태다.

대면조사로 자신을 압박해온 경찰에게 커다란 '범죄 보따리'를 던져놓고 '본령'격인 화성사건에만 전념하지 못하도록 판을 바꾸려는 시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경찰은 옷가지로 매듭을 지어 몸을 결박하는 이 씨만의 독특한 '시그니처'가 보이는 범행 수법과 뒤처리 방식이 있는 사건을 포함해 화성사건을 전후한 시기에 전국에서 발생한 미제 사건을 면밀히 들여다볼 방침이다.
이춘재 '살인자의 기억법' 과연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