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증시 메르발지수, 하루 만에 37.9% 폭락.’ 지난 8월 12일 아르헨티나 금융시장이 ‘패닉(공황)’에 빠졌다. 블룸버그통신은 이날 “메르발지수가 달러 기준으로 환산하면 48% 떨어진 것”이라며 “지난 70년간 세계 94개 증시 가운데 두 번째로 낙폭이 컸다”고 보도했다. 가장 컸던 낙폭은 스리랑카 증시가 1989년 6월 내전에 휩싸이면서 61.7% 떨어진 것이다. 아르헨티나 화폐인 페소화 가치는 이날 하루 만에 18.8% 추락했다.

아르헨티나 금융시장이 크게 요동친 것은 전날 벌어진 대선 예비선거 결과 때문이었다. 친(親)시장 우파 성향의 마우리시오 마크리 현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페론주의(페로니즘)’를 표방하는 좌파 후보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전 총리에게 크게 패배하자 투자자들은 ‘발작’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아르헨티나 현대사에서 수차례 경제 위기를 불러온 주범으로 꼽히는 페론주의가 부활할 것이란 우려에서다.

1945년 결혼한 후안 페론(왼쪽)과 에바 페론.
1945년 결혼한 후안 페론(왼쪽)과 에바 페론.
페론주의 부활 우려

페론주의는 현대 아르헨티나 정치·경제사를 이어온 좌파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을 상징한다. 1946~1955년, 1973~1974년 집권한 후안 도밍고 페론과 뮤지컬 ‘에비타’로 유명한 그의 부인 에바 페론이 내세운 정책들이 시작이다.

페론주의자들은 포퓰리즘을 추구하지만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한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한다. 정책에 따라서는 좌우를 가리지 않고 대중의 인기만 좇는다는 의미다. 1946년 집권한 페론 전 대통령은 노동자 임금 인상, 철도·전화 등 주요 산업 국유화, 사회복지 확대, 외세 불개입 등을 내세워 당시 빈곤층의 압도적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1950년대 들어 그동안 늘려 놓은 재정 지출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경제 위기가 닥쳤다.

페론 전 대통령의 부인 에바 페론 역시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노동계와 빈곤층을 위한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치며 ‘성녀(聖女)’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사치가 극에 달했다는 지적을 받았고, 횡령한 거액의 돈을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로 옮긴 것이 나중에 밝혀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아르헨, 좌파 집권 우려에 시장 패닉…페론주의 악몽 '고개'
페론주의로 점철된 아르헨 현대사

아르헨티나 현대 정치사는 페론주의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부독재에서 벗어나 민주화가 이뤄진 1983년 이후 10명의 대통령(임시직 포함) 중 7명이 페론주의를 표방했다. 카를로스 메넴(1989~1999년 재임), 에두아르도 두알데(2002~2003년), 네스토르 키르치네르(2003~2007년)와 그의 부인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2007~2015년) 등이 페론주의자로 유명하다.

첫 민주선거로 선출된 라울 알폰신 전 대통령(1983~1989년)은 중도 성향을 보였지만 수출 규제, 산업 국유화, 재정 확대 등을 통해 사실상 페론주의로 회귀했다. 그가 임기를 마친 직후인 1990년 아르헨티나의 도시 빈곤인구 비율은 50%에 육박했다.

이달 27일 치러지는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 페르난데스 전 총리 역시 페론주의자다. 그는 지난 8월 대선 예비선거에서 마크리 현 대통령을 15%포인트 이상 앞섰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두 후보의 격차는 20%포인트까지 벌어졌다. 이 격차를 유지하면 페르난데스는 결선투표 없이 곧바로 대통령직에 오를 수도 있다. 아르헨티나 대선에서는 45%의 득표율로 승리하거나 40% 이상을 득표하고 상대 후보에 10%포인트 이상 앞서면 결선투표 없이 당선이 확정된다. 이 같은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다음달 24일 최종 결선투표가 치러진다.

페르난데스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나선 인물은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이다. 그는 재임 시절 공무원 증원, 연금 확대, 기업 국유화 등 전형적인 페론주의 정책을 폈다. 페르난데스가 집권하면 배후에서 실권을 장악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경제 위기가 포퓰리즘 불러와

아르헨티나에서 좌파 포퓰리즘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이유는 경제 위기 탓이 크다. 아르헨티나는 경기 침체로 국가 빚이 크게 늘면서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까지 몰리고 있다. 이달 초 마크리 대통령은 경제 위기가 심화하자 외환시장 통제라는 ‘극약 처방’까지 내놨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발표한 긴급조치에 따르면 기업들은 달러 등 외화를 사서 외국으로 보내려면 중앙은행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기업들은 또 보유 목적으로 외화를 사들일 수 없다. 개인도 외환 거래 규제를 받는다. 한 달에 최대 1만달러(약 1200만원) 이내에서만 외화를 사들이거나 해외로 송금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국가 경제 활동과 기능을 정상화하고 일자리와 소비자를 보호하려는 조치”라고 밝혔지만 외환시장이 불안정해지면서 공식-비공식 환율 격차도 크게 벌어지고 있다. 신흥시장의 경제 동향을 분석하는 이머징마켓트레이더연합(EMTA)에 따르면 최근 역외차액결제선물환(NDF) 시장에서 페소화의 공식 환율과 비공식 환율 격차는 15%까지 벌어졌다.

아르헨티나의 NDF 시장에서는 하루에 1억5000만~4억달러 수준의 거래가 이뤄져왔다. 하지만 정부의 외화 통제 이후 거래가 거의 중단된 상태다.

IMF와 외채 협상이 관건

아르헨티나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과의 외채 협상을 어떻게 마무리할지도 주목된다. 아르헨티나의 총 외채는 2800억달러를 웃돈다. 이 가운데 1010억달러에 대해 아르헨티나 정부는 상환을 미루겠다고 올 8월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IMF가 앞서 지급한 구제금융 440억달러도 상환 연기를 요청했다.

아르헨티나 정부와 IMF는 오는 14일 추가 외채 협상을 벌일 계획이다. 이 자리에서 54억달러 규모의 추가 지원 계획 등이 구체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아르헨티나가 IMF 등의 도움으로 급한 불은 끄더라도 위기감은 바로 해소되기 힘들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친시장 정책으로 아르헨티나 경제를 개혁하겠다고 선언했던 마크리 대통령도 경제 위기의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가 집권한 지난 4년간 아르헨티나 물가는 연평균 30%가량 상승하고, 두 자릿수 실업률도 해소되지 않았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마크리 대통령 역시 전임 대통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며 “IMF의 구제금융도 치유되지 않는 상처에 붕대를 감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안정락 기자 j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