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명저] "대중의 칭찬만 좇는 지식인은 사회의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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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장 자크 루소(1712~1778)의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는 지식인의 곡학아세(曲學阿世)와 위선을 맹렬하게 비판한 책이다. 루소는 지식 발전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기는커녕 권력의 도구로 오용되면서 사회 풍속을 타락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학문과 예술이 권위를 앞세워 대중에게 ‘불량 지식’을 강요하고, 기득권에 아부하고 있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물론 공격 대상은 학문 자체가 아니라 개인적 욕심과 오만으로 덧칠된 지식인들의 ‘학문 남용’ 행태다. “학문과 예술을 배우고 습득한 사람들이 세상에 끼치는 해악”에 주목한 것이다. 루소는 진리를 구하기보다 대중의 칭찬을 갈망하는 학자는 ‘사회의 적’이며, 그런 학문과 예술은 ‘껍데기’라고 거칠게 공격했다.
'지적 기교'에 매달리는 불량 지식인들
루소가 살다간 18세기는 계몽주의 시대로 불린다. 인간의 이성과 사회의 진보에 무한한 신뢰를 보내던 시대에 루소는 용감하게도 ‘지식의 폐해’를 강조했다. 학문이 ‘사회 진보에 도움이 된다’는 통념을 거부하고 ‘사회를 퇴보시킨다’고 주장했다.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루소의 도발적 주장은 동시대 계몽사상가들의 큰 반발과 따돌림을 불렀다. 하지만 “루소와 더불어 하나의 세계가 시작한다”고 한 괴테의 평가처럼, 루소는 그 치열함을 통해 ‘진리를 위해 일생을 바친 철학자’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루소는 명예를 드높이는 일에만 집착하고, 얄팍한 학문과 지식으로 치장한 ‘못된 지식인’을 경계했다. 학자라는 이름 아래 사회 내부의 불신을 조장하고, 대중에게 왜곡된 지식을 제공하며 공동체를 타락시키고 있다고 통탄했다.
루소 등장 이전의 유럽은 강력한 왕권을 옹호하는 ‘절대군주 시대’였다. 루소는 “상당수 지식인이 학문을 통해 정의 구현과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하기보다 권력에 아부하며 이름을 상류사회 사교계에 널리 알리는 데 치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교계를 들락날락거리는 학자의 행태를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남은 미덕”이라고 표현했다.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했던 계몽사상가 볼테르도 사교계 출입이 잦아지면서 그의 비난 세례를 받아야 했다.
루소는 그럴듯한 주장을 펼치며 진리와 오류를 오히려 분간하기 어렵게 만드는 학자들의 수법을 ‘지적 기교’로 불렀다. 많은 지식인이 지적 기교를 동원해 사람들의 칭찬을 듣기 쉬운 작품을 쓰는 데 매달리며 자신을 더 사교적으로 보이는 데 치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문학가들도 루소의 비판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인용해 시인들의 오만과 부정직함을 비판했다. “시인들은 재능으로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 속임으로써 스스로를 현인이라 자처한 사람들이다.”
귀족적이고 탐미적 성향이 강했던 당시의 로코코 예술과 예술가들에 대해서도 비판의 날을 세웠다. 루소는 예술이 본연의 역할은커녕 “인간의 정신을 흐리고 나라를 어렵게 한다”며 깊은 불신을 감추지 않았다. “오늘의 예술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지켜주기보다 왕족·귀족들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가 학문과 예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 학문 세계의 주류이던 귀족들의 타락상에 대한 비판과 경고가 목적이었다. 루소는 “일신의 출세를 위해 연구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지식과 예술이 권력의 도구로 오용된다”며 ‘지식의 폐해’를 질타했다. 또 ‘공부한 사람이 많은 사회는 더 도덕적이고 정직하고 정의로워지는가’라고 자문한 뒤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학문으로 조장된 오만과 탐욕, 간교함과 위선, 독선과 시기, 이기심과 비열함이 사회를 불신과 악덕이 우글거리는 정글로까지 변화시키고 있다”고 강조했다.
"얕은 지식을 '정중함'으로 포장하기도"
학자 특유의 ‘정중한 태도’에 대해서도 삐딱한 시선을 보인다. 얼치기 학자일수록 얕은 지식을 정중함과 격식을 통해 감추고 진실을 가린다는 게 루소의 날 선 진단이다. “마음이 타락할수록 겉모습은 더 그럴듯하게 포장하려 한다. 마음속에 온갖 악이 똬리를 틀고 있어도 예의 바른 말과 몸짓으로 사악한 의도를 가린다.”
루소는 학문·예술의 타락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참된 지식’ 교육을 강조한다. 단순한 지식 습득이 아니라 건전한 정신을 함양하는 도덕적 교양에 교육의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잘못된 교육을 받은 학자들은 혼자만의 이상한 말을 만들고,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시를 쓰게 된다고 우려했다. “참교육이 아니라면 진리와 오류를 분별할 줄 모른 채 그럴듯한 주장으로 남들의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기교만을 습득할 뿐이다.”
루소의 논지를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것도 꽤 된다. “소수의 천재만 학문을 연마해야 한다” “분별없는 교육과 학문보다는 차라리 무지가 낫다”는 주장들이 그렇다. 일견 과격해 보이지만 높은 교육열을 자랑하는 한국 사회에 부패와 반칙이 만연하는 현실을 볼 때 곱씹고 생각해볼 대목도 적지 않다. 국가사회주의의 선구자로 비판받는 것과 별개로 루소의 ‘위대한 부정(否定)’의 정신은 후세가 ‘현대’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작은 하나의 초석이 됐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
물론 공격 대상은 학문 자체가 아니라 개인적 욕심과 오만으로 덧칠된 지식인들의 ‘학문 남용’ 행태다. “학문과 예술을 배우고 습득한 사람들이 세상에 끼치는 해악”에 주목한 것이다. 루소는 진리를 구하기보다 대중의 칭찬을 갈망하는 학자는 ‘사회의 적’이며, 그런 학문과 예술은 ‘껍데기’라고 거칠게 공격했다.
'지적 기교'에 매달리는 불량 지식인들
루소가 살다간 18세기는 계몽주의 시대로 불린다. 인간의 이성과 사회의 진보에 무한한 신뢰를 보내던 시대에 루소는 용감하게도 ‘지식의 폐해’를 강조했다. 학문이 ‘사회 진보에 도움이 된다’는 통념을 거부하고 ‘사회를 퇴보시킨다’고 주장했다.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루소의 도발적 주장은 동시대 계몽사상가들의 큰 반발과 따돌림을 불렀다. 하지만 “루소와 더불어 하나의 세계가 시작한다”고 한 괴테의 평가처럼, 루소는 그 치열함을 통해 ‘진리를 위해 일생을 바친 철학자’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루소는 명예를 드높이는 일에만 집착하고, 얄팍한 학문과 지식으로 치장한 ‘못된 지식인’을 경계했다. 학자라는 이름 아래 사회 내부의 불신을 조장하고, 대중에게 왜곡된 지식을 제공하며 공동체를 타락시키고 있다고 통탄했다.
루소 등장 이전의 유럽은 강력한 왕권을 옹호하는 ‘절대군주 시대’였다. 루소는 “상당수 지식인이 학문을 통해 정의 구현과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하기보다 권력에 아부하며 이름을 상류사회 사교계에 널리 알리는 데 치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교계를 들락날락거리는 학자의 행태를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남은 미덕”이라고 표현했다.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했던 계몽사상가 볼테르도 사교계 출입이 잦아지면서 그의 비난 세례를 받아야 했다.
루소는 그럴듯한 주장을 펼치며 진리와 오류를 오히려 분간하기 어렵게 만드는 학자들의 수법을 ‘지적 기교’로 불렀다. 많은 지식인이 지적 기교를 동원해 사람들의 칭찬을 듣기 쉬운 작품을 쓰는 데 매달리며 자신을 더 사교적으로 보이는 데 치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문학가들도 루소의 비판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인용해 시인들의 오만과 부정직함을 비판했다. “시인들은 재능으로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 속임으로써 스스로를 현인이라 자처한 사람들이다.”
귀족적이고 탐미적 성향이 강했던 당시의 로코코 예술과 예술가들에 대해서도 비판의 날을 세웠다. 루소는 예술이 본연의 역할은커녕 “인간의 정신을 흐리고 나라를 어렵게 한다”며 깊은 불신을 감추지 않았다. “오늘의 예술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지켜주기보다 왕족·귀족들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가 학문과 예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 학문 세계의 주류이던 귀족들의 타락상에 대한 비판과 경고가 목적이었다. 루소는 “일신의 출세를 위해 연구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지식과 예술이 권력의 도구로 오용된다”며 ‘지식의 폐해’를 질타했다. 또 ‘공부한 사람이 많은 사회는 더 도덕적이고 정직하고 정의로워지는가’라고 자문한 뒤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학문으로 조장된 오만과 탐욕, 간교함과 위선, 독선과 시기, 이기심과 비열함이 사회를 불신과 악덕이 우글거리는 정글로까지 변화시키고 있다”고 강조했다.
"얕은 지식을 '정중함'으로 포장하기도"
학자 특유의 ‘정중한 태도’에 대해서도 삐딱한 시선을 보인다. 얼치기 학자일수록 얕은 지식을 정중함과 격식을 통해 감추고 진실을 가린다는 게 루소의 날 선 진단이다. “마음이 타락할수록 겉모습은 더 그럴듯하게 포장하려 한다. 마음속에 온갖 악이 똬리를 틀고 있어도 예의 바른 말과 몸짓으로 사악한 의도를 가린다.”
루소는 학문·예술의 타락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참된 지식’ 교육을 강조한다. 단순한 지식 습득이 아니라 건전한 정신을 함양하는 도덕적 교양에 교육의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잘못된 교육을 받은 학자들은 혼자만의 이상한 말을 만들고,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시를 쓰게 된다고 우려했다. “참교육이 아니라면 진리와 오류를 분별할 줄 모른 채 그럴듯한 주장으로 남들의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기교만을 습득할 뿐이다.”
루소의 논지를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것도 꽤 된다. “소수의 천재만 학문을 연마해야 한다” “분별없는 교육과 학문보다는 차라리 무지가 낫다”는 주장들이 그렇다. 일견 과격해 보이지만 높은 교육열을 자랑하는 한국 사회에 부패와 반칙이 만연하는 현실을 볼 때 곱씹고 생각해볼 대목도 적지 않다. 국가사회주의의 선구자로 비판받는 것과 별개로 루소의 ‘위대한 부정(否定)’의 정신은 후세가 ‘현대’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작은 하나의 초석이 됐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