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크런 32兆·피해자 10만…저축銀 PF대출 부실로 드러난 최대 금융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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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본시장을 뒤흔든 사건
(31) 2011년 저축은행 사태
(31) 2011년 저축은행 사태
“평생 모은 돈인데 우짜노!”
겨울비가 내리던 2011년 2월 17일 부산시 우동(佑洞). 부산2저축은행 해운대지점에 수백 명의 고객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같은 부산저축은행그룹 관계사인 부산·대전저축은행의 영업정지 소식에 놀라 달려온 예금자들이었다. 정부가 원금을 보장하는 5000만원 이하 예금자까지 인출 요구가 쏟아지면서 대기표 1000여 장이 순식간에 동났다.
이튿날 상황은 더 나빠져 있었다. 혹시나 돈을 못 찾을까 밤잠을 설친 예금자들이 새벽부터 점포 입구를 에워쌌다. 번호표를 받으려는 대기 줄이 수십m나 이어졌다. 오후 3시를 넘기자 대기 번호는 6000번을 돌파했다. 직원이 “지금부터는 한 달 뒤에나 업무를 볼 수 있다”고 안내하자 곳곳에서 항의가 빗발쳤다.
다른 관계사인 중앙부산·전주저축은행과 보해저축은행에서도 비슷한 광경이 벌어졌다. 버틸 수 있는 기간은 길어야 며칠, 고객의 예금을 모두 부실 대출에 털어넣은 저축은행들의 창고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국내 최대인 부산저축은행그룹에서 불붙은 대량인출사태(뱅크런)는 정상영업을 하던 남은 90여 개 저축은행으로 전염병처럼 번져나갔다. 2010년 말 사상 최대인 76조원에 달했던 예금 가운데 32조원이 2012년까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 기간 24곳의 저축은행이 셔터를 내렸고, 약 10만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 뒤이어 예금보험공사는 27조원에 달하는 공적자금을 투입한다. 역사상 최대 금융비리 수사로 이어지는 ‘저축은행 사태’의 시작이었다. ‘서민 돕는’ 무진회사
저축은행의 근대적인 뿌리는 일본의 무진업(無盡業)이었다. ‘(서민을 돕는 데) 다함이 없다’는 뜻의 무진업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급증한 일본인과 더불어 국내에 뿌리를 내렸다. 1936년 일제가 공포한 조선무진업령에 따르면 무진업은 ‘정기적으로 곗돈을 부은 뒤 추첨 또는 입찰 방식으로 목돈을 빌려주는 거래’였다. 영리 목적으로 계주를 전담한다는 점을 빼면 전통적인 상호신용계(契)와 비슷했다. 매일 소상공인에게 본전과 이자를 거둬들이는 일수(日收)업을 병행하기도 했다.
무진회사는 정부가 한국·중앙무진 등을 모태로 1962년 서민금융을 전담하는 국민은행을 발족하면서 일시적으로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 공업화 시대에 서민금융 수요가 급팽창하자 다시 사설 업체가 난립하기 시작했다. 각종 금융사고와 고리대금업 폐해가 잇따르자 박정희 정부는 1972년 ‘8·3 사채동결 조치’와 더불어 ‘상호신용금고법’을 시행했다. 이 법에 따라 350곳의 무진회사가 1973년 3월까지 정부 통제를 받는 상호신용금고로 변신했다.
정부는 가급적 많은 무진회사를 양성화하기 위해 ‘이자제한법’ 적용에서 제외해주는 혜택을 제공했다. 대신 친숙한 지역 소상공인에게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라는 취지에서 ‘단일 점포 유지’와 ‘소액대출 제한’ 같은 족쇄를 채웠다. 이 족쇄는 훗날 단계적으로 모두 풀려나간다.
‘유사 은행’으로 변신
상호신용금고로 다시 태어난 무진회사들은 각종 규제 완화에 힘입어 단기간에 준(準)은행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거쳤다.
박정희 정부는 1976년 상호신용금고가 대출 재원 마련에 어려움을 겪자 적금과 비슷한 ‘상호신용부금’의 취급을 허용했다. 5년 뒤에는 서민금융 활성화 차원에서 보통예금 성격의 ‘신용부금가입자 예수금’ 상품까지 판매할 길을 터줬다.
적금과 예금의 허용은 상호신용금고의 고속성장에 ‘날개’를 달아줬다. 금고업계 수신총액은 1980년 2796억원에서 1989년 22배인 6조2033억원으로 폭증했다. 정부의 저(低)금리 정책에 묶인 시중은행에 비해 매력적인 금리를 제시한 덕분이었다. 상호신용금고제도 도입 당시 양성화 대상이었던 상호신용계는 급격히 쇠퇴했다. 부금과 달리 10인·12인·26인 등 조(組) 편성을 기다려야 하는 불편으로 점차 인기를 잃어갔기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엔 인수합병(M&A)을 통한 지점 설치 허용 등 대형화 지원 정책이 뒤따랐다. 금리 자유화에 따른 은행과의 경쟁 격화 등으로 궤멸 위기에 처한 서민금융산업을 되살린다는 취지였다. 2002년부터 상호신용금고 명칭을 ‘상호저축은행’으로 바꿔 은행처럼 안전하다는 인식을 퍼뜨렸다.
2005년 노무현 정부의 ‘제로베이스 금융규제 개혁 방안’은 마지막 족쇄였던 대출 제한까지 푸는 결과로 이어진다. 정부는 이 방안에 기초해 2006년부터 이른바 ‘8·8클럽’(자기자본비율 8% 이상·고정이하여신 8% 이하) 50여 곳에 대규모 단일대출(80억원 이상)을 허용했다. 상호저축은행에 은행과 비슷한 지위를 부여한 이 결정은 훗날 지배구조 특성을 과소평가한 실책이었다는 비판을 부른다.
모럴해저드
은행의 역할을 갖춘 대형 상호저축은행은 사세 확장에 공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시중은행과 달리 지배주주가 존재하는 저축은행은 위험 감수에 따른 성장의 과실이 고스란히 대주주 일가의 몫으로 돌아가는 구조였다. 상호저축은행이란 간판에서 ‘상호’를 떼면서 옛 이름을 완전히 지웠던 2010년 말 기준 자산총액 1조원 이상 16곳의 최대주주(특수관계인 포함) 지분율은 평균 73%에 달했다.
부동산 시장이 뜨겁게 달아오르던 2000년대 중반부터는 건물을 올리는 시행사 대출을 과감하게 늘리는 ‘도박’에 뛰어들었다. 대부분 서류상 회사인 시행사는 원리금 상환 여력을 갖추지 못한 대가로 연 10%대 높은 이자를 지급했다. 건물의 분양 성과가 나오면 시중은행 대출로 갈아타면서 기존 저축은행 대출을 갚았다.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이라고 불리는 이 사업의 확대는 부동산 호황기 저축은행에 막대한 수익을 안겼다. PF 대출 잔액이 6조원으로 불어난 2005년 저축은행들은 평균 48%에 달하는 자기자본이익률(ROE)을 만끽했다. 신이 난 대주주들은 경쟁사를 사들이고 PF 대출을 더욱 확대하는 등 저축은행을 사금고처럼 운영했다. 부산저축은행은 중앙저축은행(2006년) 등을 인수해 5개 계열사를 거느리며 지방은행과 경쟁했다. 솔로몬(현 NH저축은행)은 나라(2006년) 및 한진저축은행(2007년) 등을 인수했다.
부동산 호황이 정점에 이르렀던 2007년 저축은행 PF 대출은 12조원으로 부풀어 있었다. 건설업체 대출을 포함하는 부동산 관련 여신 비중은 전체의 50%로 ‘올인’에 가까웠다. 이듬해 터진 글로벌 금융위기로 대부분 사업장이 장기간 공터로 남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금융위기와 몰락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부동산 시장이 혹한기에 접어들었던 2011년 초. 저축은행 PF 사업장 전수조사 결과를 받아든 금융당국은 경악했다. 당시까지 남아 있던 전체 7조299억원의 대출 가운데 절반인 3조3601억원이 ‘부실 우려’ 사업장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금융위원회는 2011년 1월 경영부실을 이유로 삼화저축은행에 영업정지 명령을 내렸다. 다음달 17일에는 부산·대전저축은행의 셔터를 내렸다. 부산저축은행 관계사를 중심으로 뱅크런이 발생하자 토요일인 2월 19일 긴급 회의를 열고 추가로 부산2저축은행 등 네 곳의 추가 영업정지를 발표했다. 놀란 가슴을 쥐고 영업장을 찾은 예금자들은 셔터에 붙은 영업정지 안내문을 확인하고 망연자실했다. 5000만원 이상 예금자와 후순위채 투자자들의 울분과 자책의 절규가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뱅크런은 저축은행산업 전체로 빠르게 확산했다. 곳곳에서 현금창고가 바닥을 드러냈고 ‘신용질서 유지’를 내건 금융위의 영업정지 조치가 뒤따랐다. 2011년 여름에는 10곳, 이듬해에는 솔로몬저축은행을 포함해 한국·미래·한주저축은행 등 8곳이 문을 닫았다. 금융감독원은 2012년 10월 집계 기준 예금자 피해금액을 △5000만원 초과예금 5131억원 △저축은행 채권(후순위채) 투자손실 8571억원으로 추산했다. 자녀 결혼자금과 퇴직금을 날린 피해자들은 분통을 터뜨리며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했다. 추악한 민낯
검찰은 곧바로 저축은행 비리 수사에 들어갔다. 역대 최대인 130여 명의 인력을 투입해 2011년 3월부터 8개월간 수사한 결과 부산저축은행그룹의 6조원대 불법대출과 3조원대 분식회계 혐의를 적발했다. 금감원, 국세청 등 정·관계를 대상으로 이뤄진 광범위한 로비 사실도 밝혀냈다. 영업정지 직전 주요 고객과 임직원 친인척에게 예금인출 특혜를 제공한 정황까지 포착했다. 이 같은 불법 행위는 뒤이어 영업정지와 정리 절차를 거친 솔로몬과 현대스위스, 토마토저축은행 등에서도 만연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배신감을 느낀 저축은행 예금자는 2012년 말 337만 명으로 2년 동안 89만 명이 빠져나갔다. 예금보험공사는 2011년 이후 총 27조2000억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해 31개 저축은행을 정리했다. 이 중 약 15조원은 작년 말 현재 여전히 미회수 상태로 남아 있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
겨울비가 내리던 2011년 2월 17일 부산시 우동(佑洞). 부산2저축은행 해운대지점에 수백 명의 고객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같은 부산저축은행그룹 관계사인 부산·대전저축은행의 영업정지 소식에 놀라 달려온 예금자들이었다. 정부가 원금을 보장하는 5000만원 이하 예금자까지 인출 요구가 쏟아지면서 대기표 1000여 장이 순식간에 동났다.
이튿날 상황은 더 나빠져 있었다. 혹시나 돈을 못 찾을까 밤잠을 설친 예금자들이 새벽부터 점포 입구를 에워쌌다. 번호표를 받으려는 대기 줄이 수십m나 이어졌다. 오후 3시를 넘기자 대기 번호는 6000번을 돌파했다. 직원이 “지금부터는 한 달 뒤에나 업무를 볼 수 있다”고 안내하자 곳곳에서 항의가 빗발쳤다.
다른 관계사인 중앙부산·전주저축은행과 보해저축은행에서도 비슷한 광경이 벌어졌다. 버틸 수 있는 기간은 길어야 며칠, 고객의 예금을 모두 부실 대출에 털어넣은 저축은행들의 창고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국내 최대인 부산저축은행그룹에서 불붙은 대량인출사태(뱅크런)는 정상영업을 하던 남은 90여 개 저축은행으로 전염병처럼 번져나갔다. 2010년 말 사상 최대인 76조원에 달했던 예금 가운데 32조원이 2012년까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 기간 24곳의 저축은행이 셔터를 내렸고, 약 10만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 뒤이어 예금보험공사는 27조원에 달하는 공적자금을 투입한다. 역사상 최대 금융비리 수사로 이어지는 ‘저축은행 사태’의 시작이었다. ‘서민 돕는’ 무진회사
저축은행의 근대적인 뿌리는 일본의 무진업(無盡業)이었다. ‘(서민을 돕는 데) 다함이 없다’는 뜻의 무진업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급증한 일본인과 더불어 국내에 뿌리를 내렸다. 1936년 일제가 공포한 조선무진업령에 따르면 무진업은 ‘정기적으로 곗돈을 부은 뒤 추첨 또는 입찰 방식으로 목돈을 빌려주는 거래’였다. 영리 목적으로 계주를 전담한다는 점을 빼면 전통적인 상호신용계(契)와 비슷했다. 매일 소상공인에게 본전과 이자를 거둬들이는 일수(日收)업을 병행하기도 했다.
무진회사는 정부가 한국·중앙무진 등을 모태로 1962년 서민금융을 전담하는 국민은행을 발족하면서 일시적으로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 공업화 시대에 서민금융 수요가 급팽창하자 다시 사설 업체가 난립하기 시작했다. 각종 금융사고와 고리대금업 폐해가 잇따르자 박정희 정부는 1972년 ‘8·3 사채동결 조치’와 더불어 ‘상호신용금고법’을 시행했다. 이 법에 따라 350곳의 무진회사가 1973년 3월까지 정부 통제를 받는 상호신용금고로 변신했다.
정부는 가급적 많은 무진회사를 양성화하기 위해 ‘이자제한법’ 적용에서 제외해주는 혜택을 제공했다. 대신 친숙한 지역 소상공인에게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라는 취지에서 ‘단일 점포 유지’와 ‘소액대출 제한’ 같은 족쇄를 채웠다. 이 족쇄는 훗날 단계적으로 모두 풀려나간다.
‘유사 은행’으로 변신
상호신용금고로 다시 태어난 무진회사들은 각종 규제 완화에 힘입어 단기간에 준(準)은행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거쳤다.
박정희 정부는 1976년 상호신용금고가 대출 재원 마련에 어려움을 겪자 적금과 비슷한 ‘상호신용부금’의 취급을 허용했다. 5년 뒤에는 서민금융 활성화 차원에서 보통예금 성격의 ‘신용부금가입자 예수금’ 상품까지 판매할 길을 터줬다.
적금과 예금의 허용은 상호신용금고의 고속성장에 ‘날개’를 달아줬다. 금고업계 수신총액은 1980년 2796억원에서 1989년 22배인 6조2033억원으로 폭증했다. 정부의 저(低)금리 정책에 묶인 시중은행에 비해 매력적인 금리를 제시한 덕분이었다. 상호신용금고제도 도입 당시 양성화 대상이었던 상호신용계는 급격히 쇠퇴했다. 부금과 달리 10인·12인·26인 등 조(組) 편성을 기다려야 하는 불편으로 점차 인기를 잃어갔기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엔 인수합병(M&A)을 통한 지점 설치 허용 등 대형화 지원 정책이 뒤따랐다. 금리 자유화에 따른 은행과의 경쟁 격화 등으로 궤멸 위기에 처한 서민금융산업을 되살린다는 취지였다. 2002년부터 상호신용금고 명칭을 ‘상호저축은행’으로 바꿔 은행처럼 안전하다는 인식을 퍼뜨렸다.
2005년 노무현 정부의 ‘제로베이스 금융규제 개혁 방안’은 마지막 족쇄였던 대출 제한까지 푸는 결과로 이어진다. 정부는 이 방안에 기초해 2006년부터 이른바 ‘8·8클럽’(자기자본비율 8% 이상·고정이하여신 8% 이하) 50여 곳에 대규모 단일대출(80억원 이상)을 허용했다. 상호저축은행에 은행과 비슷한 지위를 부여한 이 결정은 훗날 지배구조 특성을 과소평가한 실책이었다는 비판을 부른다.
모럴해저드
은행의 역할을 갖춘 대형 상호저축은행은 사세 확장에 공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시중은행과 달리 지배주주가 존재하는 저축은행은 위험 감수에 따른 성장의 과실이 고스란히 대주주 일가의 몫으로 돌아가는 구조였다. 상호저축은행이란 간판에서 ‘상호’를 떼면서 옛 이름을 완전히 지웠던 2010년 말 기준 자산총액 1조원 이상 16곳의 최대주주(특수관계인 포함) 지분율은 평균 73%에 달했다.
부동산 시장이 뜨겁게 달아오르던 2000년대 중반부터는 건물을 올리는 시행사 대출을 과감하게 늘리는 ‘도박’에 뛰어들었다. 대부분 서류상 회사인 시행사는 원리금 상환 여력을 갖추지 못한 대가로 연 10%대 높은 이자를 지급했다. 건물의 분양 성과가 나오면 시중은행 대출로 갈아타면서 기존 저축은행 대출을 갚았다.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이라고 불리는 이 사업의 확대는 부동산 호황기 저축은행에 막대한 수익을 안겼다. PF 대출 잔액이 6조원으로 불어난 2005년 저축은행들은 평균 48%에 달하는 자기자본이익률(ROE)을 만끽했다. 신이 난 대주주들은 경쟁사를 사들이고 PF 대출을 더욱 확대하는 등 저축은행을 사금고처럼 운영했다. 부산저축은행은 중앙저축은행(2006년) 등을 인수해 5개 계열사를 거느리며 지방은행과 경쟁했다. 솔로몬(현 NH저축은행)은 나라(2006년) 및 한진저축은행(2007년) 등을 인수했다.
부동산 호황이 정점에 이르렀던 2007년 저축은행 PF 대출은 12조원으로 부풀어 있었다. 건설업체 대출을 포함하는 부동산 관련 여신 비중은 전체의 50%로 ‘올인’에 가까웠다. 이듬해 터진 글로벌 금융위기로 대부분 사업장이 장기간 공터로 남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금융위기와 몰락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부동산 시장이 혹한기에 접어들었던 2011년 초. 저축은행 PF 사업장 전수조사 결과를 받아든 금융당국은 경악했다. 당시까지 남아 있던 전체 7조299억원의 대출 가운데 절반인 3조3601억원이 ‘부실 우려’ 사업장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금융위원회는 2011년 1월 경영부실을 이유로 삼화저축은행에 영업정지 명령을 내렸다. 다음달 17일에는 부산·대전저축은행의 셔터를 내렸다. 부산저축은행 관계사를 중심으로 뱅크런이 발생하자 토요일인 2월 19일 긴급 회의를 열고 추가로 부산2저축은행 등 네 곳의 추가 영업정지를 발표했다. 놀란 가슴을 쥐고 영업장을 찾은 예금자들은 셔터에 붙은 영업정지 안내문을 확인하고 망연자실했다. 5000만원 이상 예금자와 후순위채 투자자들의 울분과 자책의 절규가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뱅크런은 저축은행산업 전체로 빠르게 확산했다. 곳곳에서 현금창고가 바닥을 드러냈고 ‘신용질서 유지’를 내건 금융위의 영업정지 조치가 뒤따랐다. 2011년 여름에는 10곳, 이듬해에는 솔로몬저축은행을 포함해 한국·미래·한주저축은행 등 8곳이 문을 닫았다. 금융감독원은 2012년 10월 집계 기준 예금자 피해금액을 △5000만원 초과예금 5131억원 △저축은행 채권(후순위채) 투자손실 8571억원으로 추산했다. 자녀 결혼자금과 퇴직금을 날린 피해자들은 분통을 터뜨리며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했다. 추악한 민낯
검찰은 곧바로 저축은행 비리 수사에 들어갔다. 역대 최대인 130여 명의 인력을 투입해 2011년 3월부터 8개월간 수사한 결과 부산저축은행그룹의 6조원대 불법대출과 3조원대 분식회계 혐의를 적발했다. 금감원, 국세청 등 정·관계를 대상으로 이뤄진 광범위한 로비 사실도 밝혀냈다. 영업정지 직전 주요 고객과 임직원 친인척에게 예금인출 특혜를 제공한 정황까지 포착했다. 이 같은 불법 행위는 뒤이어 영업정지와 정리 절차를 거친 솔로몬과 현대스위스, 토마토저축은행 등에서도 만연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배신감을 느낀 저축은행 예금자는 2012년 말 337만 명으로 2년 동안 89만 명이 빠져나갔다. 예금보험공사는 2011년 이후 총 27조2000억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해 31개 저축은행을 정리했다. 이 중 약 15조원은 작년 말 현재 여전히 미회수 상태로 남아 있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