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민주주의 후퇴' 부르는 여의도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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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美서도 민주주의 역주행
전 세계 증오·대립 선동정치 횡행
한국 '광장'도 여의도 정치 압도
토론은 없고 일치된 구호뿐
勢 대결의 '종말 정치' 멈추고
대화·타협의 정치 회복해야
김인영 <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
전 세계 증오·대립 선동정치 횡행
한국 '광장'도 여의도 정치 압도
토론은 없고 일치된 구호뿐
勢 대결의 '종말 정치' 멈추고
대화·타협의 정치 회복해야
김인영 <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
세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연구하는 프리덤하우스의 2019년 보고서 제목은 ‘민주주의의 후퇴(Democracy in Retreat)’다. 1974년부터 1990년까지 이어진 ‘제3의 민주화 물결’로 59개국이 민주화됐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동유럽 국가에 민주주의가 회복됐다. ‘민주주의 세계화’는 2003년 조지아(그루지야) 장미혁명,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혁명, 2005년 이라크 퍼플혁명과 키르기스스탄 레몬혁명 그리고 레바논 백향목혁명으로 이어졌다. 2010년에는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재스민혁명이 발발했고, 2011년 이집트는 로제타혁명으로 군부가 퇴진하고, 리비아는 무아마르 카다피의 독재로부터 해방됐다.
하지만 권위주의의 뿌리는 깊었다. 이집트는 군부 권위주의로 복귀했고, 러시아는 소련 붕괴 이후 선거로 3명의 대통령이 선출됐지만 권위적 통치자와 신흥 재벌 올리가르히의 과두 체제는 지속됐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는 온·오프라인 미디어를 장악해 정권의 나팔수로 삼았으며, 헌법재판소와 사법부의 판사를 친여 성향으로 채워 장악하고 2012년 선거법 개정으로 의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4선의 오르반은 반(反)이민, 반무슬림, 반서방의 증오에 기반한 정치를 하고 있다.
최근에는 영국, 미국 같은 민주주의 모델 국가에서도 ‘민주주의 후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영국은 대의민주주의가 가장 먼저 발전하고 정착한 나라임에도 최근 총리에 오른 보리스 존슨은 의회 정치를 극단으로 몰고 가고 있다.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의 보루로 지칭되는 미국에는 포퓰리즘 현상이 등장했다. 자신을 비판하는 모든 언론을 ‘가짜 뉴스’로 공격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품격 잃은 행동에 독일 슈피겔은 “각국 독재자의 롤모델이 돼 세계에 재앙을 퍼뜨리고 있다”고 혹평했다.
민주주의 후퇴 현상의 핵심은 군부가 민주정치 파괴의 주범이었던 과거와 달리 선거라는 합법적 절차로 당선된 지도자가 권위주의로 변한다는 점이다. 미국의 민주주의 위기를 분석한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선동가 히틀러를 ‘걸러내지’ 못한 바이마르 공화정의 정당 문제가 트럼프를 대선주자로 용인한 미국 정당에 그대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정당이 선동가를 걸러내는 ‘문지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헝가리의 오르반처럼 정당 추천으로 당선된 선동가들이 포퓰리즘을 등에 업고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은 ‘선한 민중’으로, 반대파는 ‘적폐 세력’으로 양분해 증오와 대립의 선동정치로 이끌어갔던 것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은 민주주의 공고화와 심화 과정을 순조롭게 거치면서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단기간에 성공시킨 세계적 모범국가로 칭송받았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직접민주주의 광장 정치가 도를 넘어 의회 정치를 압도하고 여론조사가 ‘민의의 발현’이 돼 정당 정치를 대체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광장의 모임이 직접민주주의가 되려면 주최측이 마련한 피켓 흔들기와 일사불란한 구호 외치기가 아니라,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 개진과 진지한 토론이 전제돼야 한다. 토론은 없고 군중의 일치된 구호만 있다면 아테네식 직접민주주의가 아니라 조직화된 군중에 의한 나치 찬양이나 옛 소련의 반미 관제데모를 연상시킬 뿐이다.
언제부턴가 국회에서 대화와 타협이라는 용어가 사라졌다. 고소·고발이 난무하고 숫자로 법안 밀어붙이기만 존재한다. 선거법 개정안이나 공수처 설치법, 검·경 수사권 조정안 입법 과정에서 여야는 ‘라이벌’이 아니라 ‘적’이 됐다. 여야는 광장에서의 세 대결에만 관심을 둘 뿐 국정감사에 의한 행정부 견제, 경제 회복을 위한 규제개혁 및 법안 마련에는 관심을 접은 듯하다. 죽기까지 싸우는 증오와 대립의 ‘종말 정치’ 모습이다. 광장의 정치가 ‘진짜 정치’로 변해 의회 정치가 경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기국회 기간이다. ‘조국 진실 규명’은 검찰 몫으로 두고 국회는 행정부 견제와 내년도 예산 심사, 경제회복을 위한 법안 심의라는 본업에 집중할 때다. 대의 정치, 대화와 타협의 정치 회복이 시급하다.
하지만 권위주의의 뿌리는 깊었다. 이집트는 군부 권위주의로 복귀했고, 러시아는 소련 붕괴 이후 선거로 3명의 대통령이 선출됐지만 권위적 통치자와 신흥 재벌 올리가르히의 과두 체제는 지속됐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는 온·오프라인 미디어를 장악해 정권의 나팔수로 삼았으며, 헌법재판소와 사법부의 판사를 친여 성향으로 채워 장악하고 2012년 선거법 개정으로 의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4선의 오르반은 반(反)이민, 반무슬림, 반서방의 증오에 기반한 정치를 하고 있다.
최근에는 영국, 미국 같은 민주주의 모델 국가에서도 ‘민주주의 후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영국은 대의민주주의가 가장 먼저 발전하고 정착한 나라임에도 최근 총리에 오른 보리스 존슨은 의회 정치를 극단으로 몰고 가고 있다.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의 보루로 지칭되는 미국에는 포퓰리즘 현상이 등장했다. 자신을 비판하는 모든 언론을 ‘가짜 뉴스’로 공격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품격 잃은 행동에 독일 슈피겔은 “각국 독재자의 롤모델이 돼 세계에 재앙을 퍼뜨리고 있다”고 혹평했다.
민주주의 후퇴 현상의 핵심은 군부가 민주정치 파괴의 주범이었던 과거와 달리 선거라는 합법적 절차로 당선된 지도자가 권위주의로 변한다는 점이다. 미국의 민주주의 위기를 분석한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선동가 히틀러를 ‘걸러내지’ 못한 바이마르 공화정의 정당 문제가 트럼프를 대선주자로 용인한 미국 정당에 그대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정당이 선동가를 걸러내는 ‘문지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헝가리의 오르반처럼 정당 추천으로 당선된 선동가들이 포퓰리즘을 등에 업고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은 ‘선한 민중’으로, 반대파는 ‘적폐 세력’으로 양분해 증오와 대립의 선동정치로 이끌어갔던 것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은 민주주의 공고화와 심화 과정을 순조롭게 거치면서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단기간에 성공시킨 세계적 모범국가로 칭송받았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직접민주주의 광장 정치가 도를 넘어 의회 정치를 압도하고 여론조사가 ‘민의의 발현’이 돼 정당 정치를 대체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광장의 모임이 직접민주주의가 되려면 주최측이 마련한 피켓 흔들기와 일사불란한 구호 외치기가 아니라,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 개진과 진지한 토론이 전제돼야 한다. 토론은 없고 군중의 일치된 구호만 있다면 아테네식 직접민주주의가 아니라 조직화된 군중에 의한 나치 찬양이나 옛 소련의 반미 관제데모를 연상시킬 뿐이다.
언제부턴가 국회에서 대화와 타협이라는 용어가 사라졌다. 고소·고발이 난무하고 숫자로 법안 밀어붙이기만 존재한다. 선거법 개정안이나 공수처 설치법, 검·경 수사권 조정안 입법 과정에서 여야는 ‘라이벌’이 아니라 ‘적’이 됐다. 여야는 광장에서의 세 대결에만 관심을 둘 뿐 국정감사에 의한 행정부 견제, 경제 회복을 위한 규제개혁 및 법안 마련에는 관심을 접은 듯하다. 죽기까지 싸우는 증오와 대립의 ‘종말 정치’ 모습이다. 광장의 정치가 ‘진짜 정치’로 변해 의회 정치가 경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기국회 기간이다. ‘조국 진실 규명’은 검찰 몫으로 두고 국회는 행정부 견제와 내년도 예산 심사, 경제회복을 위한 법안 심의라는 본업에 집중할 때다. 대의 정치, 대화와 타협의 정치 회복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