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선사시대부터 활발한 해양활동…대륙·열도·바다 잇는 '문명의 통로'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4) 한반도는 동아지중해 허브
의식이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의식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언어다. 그 언어의 핵심이 단어다. 지금 한국인들은 진실은 상관없고 오로지 ‘단어’만을 선점하려고 기를 쓴다. 일본이 하던 짓거리들을 배운 탓일까? 그들은 우리에게 ‘반도’라는 단어의 굴레를 씌웠고, 그것은 좀처럼 풀리지 않는 덫으로 아직 작동하고 있다.
망각된 만주와 해양활동
1995년 여름 북만주와 동몽골의 접경지대 초원으로 올라가 튼튼한 말 세 마리를 샀다. 고구려인들 흉내를 내면서 400년 수도였던 국내성(현 중국 지안시)까지 타고 내려왔다. 말 위에서 고구려인의 눈길로 내려다보는 압록강은 깊고 푸른 물이 철철 흐르는 국경의 강이 아니라 청계천 정도에 불과했다. 두만강도 그랬다. 중류에 이를 때까지도 동네 앞 냇가 정도였다. 또 한 번 속은 것이다. 일본인들이 규정한 ‘조선반도’는 역사 용어가 될 수 없었다. 만주와 한반도는 사실상 하나의 땅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만주 일대에 살았던 종족이나 언어, 문화와 유물들을 고려하면 그 지역은 우리의 생활영역, 역사공동체의 일부였다.
하지만 그 너른 땅을 빼앗긴 뒤에는 선비족(몽골), 거란족, 여진족을 오랑캐라고 무시하며 선을 그었다. 근대 들어서는 일본인들의 이상한 논리에 넘어가 역사마저 포기했다. 그들이 우리에게 주입한 조선반도는 그리스반도나 이탈리아반도, 이베리아반도처럼 해양활동이 왕성했고, 한때는 세계의 중심이었던 그런 반도가 아니었다. 해양활동이 전혀 없거나 매우 미약했고, 바다에 포위돼 있는 아주 제한된 공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넓은 만주를 망각했고, 역동적인 해양활동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서해는 내해(內海)
동아시아는 현재 중국이 있는 대륙, 북방으로 연결되는 대륙의 일부, 그리고 일본열도로 이뤄졌으며 그 안에 바다가 있다. 전형적인 대륙 간 지중해(multicontinental-mediterranean-sea)는 아니지만 다국 간 지중해(multinational-mediterranean-sea)의 형태와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 한가운데에 한륙도(韓陸島·남만주와 한반도를 포함한 개념)가 있다.
한반도의 남쪽과 일본열도는 불과 50㎞밖에 떨어지지 않은 대마도와 동해를 통해 연결된다. 연해주와 사할린은 동해 북부(타타르해 포함)를 통해, 그리고 남만주와 한반도, 일본열도는 서해와 동중국해를 이용해 중국 지역과 교류할 수 있다. 특히 서해는 한·중 간 300~400㎞로 그 거리가 짧은 데다 해상 상태도 비교적 안정된 일종의 내해(inland sea)다. 계절풍 지대여서 북서풍과 남풍을 적절하게 이용하면 여러 방향으로 항해가 가능하다. 해류도 쿠로시오를 타면 저장성 이남과 오키나와 지역에서 제주도와 한반도 남부에 상륙할 수 있다. 동해에서는 리만한류를 타면 연해주 앞바다에서 경북의 해양까지 남하할 수 있다.
이런 자연환경 때문에 선사시대부터 주민들의 생활과 문화는 물론, 지역 간 또는 나라 사이에 해양교섭이 활발히 이뤄졌다. 당연히 이 지역에서 명멸한 모든 국가는 생존을 위해 해양활동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동아지중해의 허브
문제는 하나 있었다. 기계동력이 없었던 전근대에는 방향을 판정하는 항법과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했다. 파도와 폭풍을 이겨내고 많은 물자를 실을 수 있는 배를 만드는 조선술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가능하면 육지와 가까운 해역을 항해하고, 중간에 피항을 하면서 물과 식량을 보급받을 수 있는 경유지가 필요했다. 동아지중해의 한가운데에 있는 우리 땅과 바다의 역할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1994년에 배를 타고 90일간 유럽까지 항해하면서 지중해(유럽·아프리카·아시아 지중해)를 왕복했다. ‘트로이 전쟁’ ‘살라미스 해전’을 떠올리면서 에게해를 통과했다. 이탈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 사이의 파고 높은 협수로, 시칠리섬 등을 통과할 때는 로마의 영광과 카르타고의 붕괴 역사가 저절로 떠올랐다. 동시에 내가 세운 ‘동아지중해 모델’과 ‘한민족 역할론’이 실체로서 다가왔다.
유럽의 지중해는 원거리 항해가 활발한 무역공동체였다. 여러 인종이 섞이며 다양한 문화를 혼유하는 문화공동체이자, 무역정보와 해양기술도 부분적으로 공유한 해양공동체였다. 동아지중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꼭 이탈리아반도와 동일하지는 않았지만 교통의 인터체인지였고, 물류와 정보의 허브였으며, 한자·불교·유교 등을 공유한 문화의 심장이었다. 정치·외교적으로는 역학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중핵(core)이었다. 당연히 우리 역사상 대부분 국가는 해양을 활용하는 정책을 펼쳤고 해양력을 강화했다. 조선만 빼놓고는 그랬다.
신석기 때부터 해양교류 활발
제주도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고산리 유적은 바다를 건너온 초기 신석기인들이 만든 문화다.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본래 육지로 연결돼 있었는데,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 빙하가 녹으면서 수면이 150m 이상 상승했다. 대한해협과 대마도 같은 섬들이 이때 생겨났다. 7000년 전쯤에는 인간들이 이 섬들을 징검다리처럼 이용해 오갔다. 부산의 동삼동과 조도의 패총, 울산 서생포 등에서는 일본열도계의 토기와 전략물자인 흑요석 제품들이 발견됐다. 반대로 대마도와 규슈 일부 지역에서는 우리 계통의 토기와 돌제품들이 발견됐다.
2004년엔 경남 창녕군 비봉리에서 소나무로 만들어진 길이 3m, 폭 60㎝ 정도의 쪽배유물이 발견됐다. 놀랍게도 약 8000년 전의 것이었다. 그런 쪽배나 뗏목을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다닌 것이다. 동해도 마찬가지였다. 두만강 하구의 서포항 유적지에서는 고래뼈로 만든 노가 발견됐는데 약 5000년 전의 것이다. 울산의 반구대에는 신석기 시대 말 또는 청동기시대 초로 추정되는 암각화가 있다. 여기엔 수십 마리의 고래 등 어류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부산 동삼동의 신석기 초기 패총에선 상어뼈와 고래뼈가 발견됐다. 선사시대에 동해 전체와 심지어는 남해에서도 포경업이 매우 발달했다는 증거들이다.
산둥반도와 랴오둥반도 사이에는 좁은 발해만이 있다. 에게해와 넓이가 비슷한 소지중해다. 징검다리 같은 묘도군도 등 몇몇 섬에선 약 6000~7000년 전의 해양 관련 유물들이 발견됐다. 일부에서는 그 일대에 5000년 전에 해운업이 있었다는 주장들을 한다.
해로로 전래된 벼농사
역사시대에 들어오면서 바다는 더 많이 활용됐다. 고인돌은 고조선 문화의 지표다. 랴오둥반도 남부 해안지대에 많지만 최근에는 압록강 이북의 내륙에서도 발견된다. 한반도에서는 대동강 하류에 거대한 고인돌이 대규모로 밀집돼 북한은 주체사관 이후에 ‘대동강 문화론’을 주장할 정도다. 그리고 서해안을 따라 경기만, 충청도, 전라도 해안을 거쳐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무려 4만 기가 있다. 산둥반도와 저장성에도 일부 있다. 그래서 고인돌을 ‘환황해문화권’의 산물로 보기도 한다(하문식 연세대 사학과 교수 견해).
또 하나, 해양이 우리의 삶과 직결됐다는 증거는 벼농사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대략 4000년 전부터 벼농사를 했다. 우리가 먹은 단립미는 중국의 화북에서 랴오둥지방을 거쳐 한반도에 도착했다는 설, 산둥반도에서 황해를 건넜다는 설이 있다. 최초의 벼농사 지역으로 부각되는 저장지역에서 장립미가 바다를 건너 경기만으로 상륙했다는 설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벼농사의 길’은 육로가 아니라 해로였다는 점이다. 나는 1997년에 저장성의 허무뚜 유적지와 가까운 주산군도에서 ‘동아지중해호’라는 뗏목을 출발시켜 17일 만에 흑산도에 도착했다. 선사시대에도 두 지역 사이에 교류가 가능했고, 항로는 후대에 사료에 기록된 것과 같았음을 입증했다. 일본열도에서는 벼농사가 기원전 3세기(야요이 시대) 무렵에 북부 규슈에서 시작됐다. 한반도 남부에서 이주민들이 볍씨와 토기, 무기 등을 갖고 대거 바다를 건넜던 때다.
이처럼 우리는 신석기시대부터 조개를 캐고 해안가의 물고기를 잡는 삶의 터전으로 바다를 친숙하게 대했다. 때로는 먼 거리를 항해하면서 발달된 토기와 도구를 교환하고, 벼농사 문화를 수용하며, 고인돌·토기 등 문화를 전달하는 통로로 활용했다.
수출입 물동량의 99% 이상을 해로로 운송하는 나라, 1994년부터 200해리의 구간을 ‘배타적 경제수역(EEZ)’으로 인정하는 세계, 11개 해역에서 영토 갈등이 발생하는 동아시아의 현실. 이 속에서 현재와 미래의 발전전략을 찾고, 역사를 규명하고 자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해양활동의 실상들을 알아야 한다. 늦었다 싶을 때가 가장 빠른 때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한국해양정책학회 부회장 >
망각된 만주와 해양활동
1995년 여름 북만주와 동몽골의 접경지대 초원으로 올라가 튼튼한 말 세 마리를 샀다. 고구려인들 흉내를 내면서 400년 수도였던 국내성(현 중국 지안시)까지 타고 내려왔다. 말 위에서 고구려인의 눈길로 내려다보는 압록강은 깊고 푸른 물이 철철 흐르는 국경의 강이 아니라 청계천 정도에 불과했다. 두만강도 그랬다. 중류에 이를 때까지도 동네 앞 냇가 정도였다. 또 한 번 속은 것이다. 일본인들이 규정한 ‘조선반도’는 역사 용어가 될 수 없었다. 만주와 한반도는 사실상 하나의 땅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만주 일대에 살았던 종족이나 언어, 문화와 유물들을 고려하면 그 지역은 우리의 생활영역, 역사공동체의 일부였다.
하지만 그 너른 땅을 빼앗긴 뒤에는 선비족(몽골), 거란족, 여진족을 오랑캐라고 무시하며 선을 그었다. 근대 들어서는 일본인들의 이상한 논리에 넘어가 역사마저 포기했다. 그들이 우리에게 주입한 조선반도는 그리스반도나 이탈리아반도, 이베리아반도처럼 해양활동이 왕성했고, 한때는 세계의 중심이었던 그런 반도가 아니었다. 해양활동이 전혀 없거나 매우 미약했고, 바다에 포위돼 있는 아주 제한된 공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넓은 만주를 망각했고, 역동적인 해양활동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서해는 내해(內海)
동아시아는 현재 중국이 있는 대륙, 북방으로 연결되는 대륙의 일부, 그리고 일본열도로 이뤄졌으며 그 안에 바다가 있다. 전형적인 대륙 간 지중해(multicontinental-mediterranean-sea)는 아니지만 다국 간 지중해(multinational-mediterranean-sea)의 형태와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 한가운데에 한륙도(韓陸島·남만주와 한반도를 포함한 개념)가 있다.
한반도의 남쪽과 일본열도는 불과 50㎞밖에 떨어지지 않은 대마도와 동해를 통해 연결된다. 연해주와 사할린은 동해 북부(타타르해 포함)를 통해, 그리고 남만주와 한반도, 일본열도는 서해와 동중국해를 이용해 중국 지역과 교류할 수 있다. 특히 서해는 한·중 간 300~400㎞로 그 거리가 짧은 데다 해상 상태도 비교적 안정된 일종의 내해(inland sea)다. 계절풍 지대여서 북서풍과 남풍을 적절하게 이용하면 여러 방향으로 항해가 가능하다. 해류도 쿠로시오를 타면 저장성 이남과 오키나와 지역에서 제주도와 한반도 남부에 상륙할 수 있다. 동해에서는 리만한류를 타면 연해주 앞바다에서 경북의 해양까지 남하할 수 있다.
이런 자연환경 때문에 선사시대부터 주민들의 생활과 문화는 물론, 지역 간 또는 나라 사이에 해양교섭이 활발히 이뤄졌다. 당연히 이 지역에서 명멸한 모든 국가는 생존을 위해 해양활동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동아지중해의 허브
문제는 하나 있었다. 기계동력이 없었던 전근대에는 방향을 판정하는 항법과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했다. 파도와 폭풍을 이겨내고 많은 물자를 실을 수 있는 배를 만드는 조선술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가능하면 육지와 가까운 해역을 항해하고, 중간에 피항을 하면서 물과 식량을 보급받을 수 있는 경유지가 필요했다. 동아지중해의 한가운데에 있는 우리 땅과 바다의 역할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1994년에 배를 타고 90일간 유럽까지 항해하면서 지중해(유럽·아프리카·아시아 지중해)를 왕복했다. ‘트로이 전쟁’ ‘살라미스 해전’을 떠올리면서 에게해를 통과했다. 이탈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 사이의 파고 높은 협수로, 시칠리섬 등을 통과할 때는 로마의 영광과 카르타고의 붕괴 역사가 저절로 떠올랐다. 동시에 내가 세운 ‘동아지중해 모델’과 ‘한민족 역할론’이 실체로서 다가왔다.
유럽의 지중해는 원거리 항해가 활발한 무역공동체였다. 여러 인종이 섞이며 다양한 문화를 혼유하는 문화공동체이자, 무역정보와 해양기술도 부분적으로 공유한 해양공동체였다. 동아지중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꼭 이탈리아반도와 동일하지는 않았지만 교통의 인터체인지였고, 물류와 정보의 허브였으며, 한자·불교·유교 등을 공유한 문화의 심장이었다. 정치·외교적으로는 역학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중핵(core)이었다. 당연히 우리 역사상 대부분 국가는 해양을 활용하는 정책을 펼쳤고 해양력을 강화했다. 조선만 빼놓고는 그랬다.
신석기 때부터 해양교류 활발
제주도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고산리 유적은 바다를 건너온 초기 신석기인들이 만든 문화다.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본래 육지로 연결돼 있었는데,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 빙하가 녹으면서 수면이 150m 이상 상승했다. 대한해협과 대마도 같은 섬들이 이때 생겨났다. 7000년 전쯤에는 인간들이 이 섬들을 징검다리처럼 이용해 오갔다. 부산의 동삼동과 조도의 패총, 울산 서생포 등에서는 일본열도계의 토기와 전략물자인 흑요석 제품들이 발견됐다. 반대로 대마도와 규슈 일부 지역에서는 우리 계통의 토기와 돌제품들이 발견됐다.
2004년엔 경남 창녕군 비봉리에서 소나무로 만들어진 길이 3m, 폭 60㎝ 정도의 쪽배유물이 발견됐다. 놀랍게도 약 8000년 전의 것이었다. 그런 쪽배나 뗏목을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다닌 것이다. 동해도 마찬가지였다. 두만강 하구의 서포항 유적지에서는 고래뼈로 만든 노가 발견됐는데 약 5000년 전의 것이다. 울산의 반구대에는 신석기 시대 말 또는 청동기시대 초로 추정되는 암각화가 있다. 여기엔 수십 마리의 고래 등 어류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부산 동삼동의 신석기 초기 패총에선 상어뼈와 고래뼈가 발견됐다. 선사시대에 동해 전체와 심지어는 남해에서도 포경업이 매우 발달했다는 증거들이다.
산둥반도와 랴오둥반도 사이에는 좁은 발해만이 있다. 에게해와 넓이가 비슷한 소지중해다. 징검다리 같은 묘도군도 등 몇몇 섬에선 약 6000~7000년 전의 해양 관련 유물들이 발견됐다. 일부에서는 그 일대에 5000년 전에 해운업이 있었다는 주장들을 한다.
해로로 전래된 벼농사
역사시대에 들어오면서 바다는 더 많이 활용됐다. 고인돌은 고조선 문화의 지표다. 랴오둥반도 남부 해안지대에 많지만 최근에는 압록강 이북의 내륙에서도 발견된다. 한반도에서는 대동강 하류에 거대한 고인돌이 대규모로 밀집돼 북한은 주체사관 이후에 ‘대동강 문화론’을 주장할 정도다. 그리고 서해안을 따라 경기만, 충청도, 전라도 해안을 거쳐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무려 4만 기가 있다. 산둥반도와 저장성에도 일부 있다. 그래서 고인돌을 ‘환황해문화권’의 산물로 보기도 한다(하문식 연세대 사학과 교수 견해).
또 하나, 해양이 우리의 삶과 직결됐다는 증거는 벼농사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대략 4000년 전부터 벼농사를 했다. 우리가 먹은 단립미는 중국의 화북에서 랴오둥지방을 거쳐 한반도에 도착했다는 설, 산둥반도에서 황해를 건넜다는 설이 있다. 최초의 벼농사 지역으로 부각되는 저장지역에서 장립미가 바다를 건너 경기만으로 상륙했다는 설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벼농사의 길’은 육로가 아니라 해로였다는 점이다. 나는 1997년에 저장성의 허무뚜 유적지와 가까운 주산군도에서 ‘동아지중해호’라는 뗏목을 출발시켜 17일 만에 흑산도에 도착했다. 선사시대에도 두 지역 사이에 교류가 가능했고, 항로는 후대에 사료에 기록된 것과 같았음을 입증했다. 일본열도에서는 벼농사가 기원전 3세기(야요이 시대) 무렵에 북부 규슈에서 시작됐다. 한반도 남부에서 이주민들이 볍씨와 토기, 무기 등을 갖고 대거 바다를 건넜던 때다.
이처럼 우리는 신석기시대부터 조개를 캐고 해안가의 물고기를 잡는 삶의 터전으로 바다를 친숙하게 대했다. 때로는 먼 거리를 항해하면서 발달된 토기와 도구를 교환하고, 벼농사 문화를 수용하며, 고인돌·토기 등 문화를 전달하는 통로로 활용했다.
수출입 물동량의 99% 이상을 해로로 운송하는 나라, 1994년부터 200해리의 구간을 ‘배타적 경제수역(EEZ)’으로 인정하는 세계, 11개 해역에서 영토 갈등이 발생하는 동아시아의 현실. 이 속에서 현재와 미래의 발전전략을 찾고, 역사를 규명하고 자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해양활동의 실상들을 알아야 한다. 늦었다 싶을 때가 가장 빠른 때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한국해양정책학회 부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