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나루히토(德仁) 일왕의 공식 즉위식이 열린다. 일본인이 천황(天皇·덴노)이라 부르는 일왕은 고대부터 근대까지 일본 역사에서 적잖은 역할을 해왔다. 현대 일본 사회에도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특히 메이지(明治) 유신부터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는 일본의 근대화와 잇따른 침략전쟁에서 주역을 맡기도 했다. 최근까지도 일본 국민을 통합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며 일본인의 삶에 깊은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에선 여전히 침략과 전쟁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근세까진 실권 없었던 일왕

일왕에 대한 언급은 일본 고대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인은 초대 일왕 진무(神武) 이래 126대에 걸쳐 계보가 끊이지 않고 일본 최고 권력자로 존재해왔다는 소위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신화를 믿어왔다.

하지만 대다수 역사학자는 10대 일왕인 스진(崇神)부터 실존 가능성이 있으며 그 이전의 인물들은 가공의 존재로 평가하고 있다. 대체적으로는 7세기 후반 율령국가가 성립되는 39대 일왕 덴무(天武) 때부터 사실상의 군주제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때 일본인은 일왕의 호칭을 기존 대왕에서 천황으로 바꿨다.

일왕가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집단에서 유래했다는 추측이 많다. 아키히토(明仁) 전 일왕은 2001년 68세 생일 기자회견에서 “간무(桓武) 왕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記)>에 쓰여 있다.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다”고 밝힌 바 있기도 하다. 역사학계에선 다만 정확한 고증이 쉽지 않다고 보고 있다.

일왕이 정치적 실권을 휘두른 기간은 500년이 채 안 됐다. 무사계급의 힘이 강해지면서 점점 권한을 상실해갔고, 14세기 이후에는 바쿠후(幕府·막부)의 쇼군(將軍)이 지배자 역할을 맡았다. 일왕의 거주지는 교토로 제한됐다. 권한도 각종 관위의 수여, 연호 제정, 달력 작성 등 형식적인 분야에 머물렀고 일반 서민은 왕의 존재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日선 국민통합 구심점 '일왕'…韓·中엔 식민통치의 상징
일본 근대화·제국주의 침략의 주체

일왕이 다시 절대적 권위를 얻게 된 것은 1867년 말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서구 세력의 위협에 대한 해법을 모색했던 메이지 유신의 주도 세력들은 ‘일본 고유의 전통’으로 꾸준히 이어져온 ‘왕에 의한 통치’에 주목했다. 바쿠후 지배를 부정하기 위해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정권 장악의 명분으로 앞세웠다. 결국 유신을 주도했던 사쓰마·조슈번 세력 주도하에 ‘왕정복고’ 칙령이 발포되면서 250년간 지속된 도쿠가와 바쿠후가 끝을 맺었다. 일왕 메이지도 교토에서 도쿄로 자리를 옮겼다.

메이지 일왕은 단발에 양장을 하거나 군복을 입은 모습으로 근대화시설 및 군사시설을 방문하는 등 일본 국민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각종 근대화 작업에 적극 개입했다. 근대국민국가의 군주로 위상을 바꾼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교육칙어’ 등을 통해 왕에 대한 충성심이 일본 국민에게 주입됐다.

일왕은 근대로의 전환기에 일본 국민 통합의 중심 역할을 하며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기능을 맡았다. 1889년 선포된 대일본제국헌법(메이지헌법)에선 일본을 일왕이 통치하는 나라며, 왕은 신성불가침하며 통치권을 총괄하는 존재로 명시했다.

1910년 일제의 한국 강점도 옛 대한제국 황실을 왕공족(王公族)으로 만들어 일왕가의 황태자와 친왕(일왕의 형제 및 자식) 사이의 지위에 편입시키는 형태로 수행됐다.

20세기 히로히토(裕仁) 일왕(일명 쇼와 일왕) 시절에는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닫고 왕에 대한 신격화가 가속화됐다. 일왕은 현인신(現人神)이자 군권을 쥔 대원수였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개전, 2·26쿠데타의 진압과 2차 세계대전 항복 결정 등 현실정치에 적극 개입했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명저 <국화와 칼>에서 “화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인데도 일본군은 죽음을 불사하고 전투를 치렀다. 미국은 일본이 항복한 후에도 게릴라전 등을 펼치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히로히토 일왕이 항복을 선언하자 오히려 일본 국민들은 미군을 환영했다. 서구인들의 시각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라고 적었다.

역할 모호한 일본의 ‘상징’

2차 세계대전 이후 미 군정은 일왕에게 전쟁 책임에 대한 면죄부를 주고 일왕제를 용인했다. 전후 일본 사회의 안정을 도모하고 냉전에 빠르게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따라 1946년 1월 1일 히로히토 일왕은 자신의 신격(神格)을 부정하는 이른바 ‘인간선언’을 발표하고 ‘상징 천황’이 됐다. 1946년 11월 공포된 현행 헌법(평화헌법)은 제1조에서 일왕을 ‘국가와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규정했다. 국정에 대한 권한을 전혀 갖지 못하도록 했다.

1990년 아키히토 일왕이 즉위한 이후에는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도 표명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재위기간 중 2차 세계대전 당시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한 번도 참배하지 않았다. 중국과 필리핀 등 과거 침략전쟁을 했던 국가를 방문해 사과의 메시지를 보냈다. 한국과 관련해서도 1990년 노태우 대통령 방일 때는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고 했고, 1997년 김대중 대통령 방일 때는 “일본이 한반도 여러분께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시대가 있었다”고 사과했다. 2005년 사이판을 방문했을 때는 태평양전쟁 시 숨진 한국인을 기리는 한국인 희생자 추념탑을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변화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한때 현인신으로 군림했던 일왕의 잔영은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일본에선 일왕을 비판하지 않는다는 암묵적 동의도 있다. 학생 운동이 드셌던 1960년대에는 한때 일왕제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현재는 이 같은 목소리를 접하기 쉽지 않다. 일본의 침략을 받았던 한국이나 중국에선 여전히 일왕은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일본 내에서 전전(戰前) 일왕제로 돌아가려는 시도도 끊이지 않고 나온다. 1999년에는 ‘히노마루’를 국기로, ‘기미가요’를 국가로 하는 법률이 만들어졌고 우익들은 일왕 중심의 국가로의 회귀를 공공연하게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일왕제가 존속하는 것이 전쟁 책임을 흐지부지하게 만들어 과거사 반성을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도쿄=김동욱 특파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