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의 불어난 재고가 한국 경제의 ‘유동성 함정’을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업들이 투자 대신 현금 보유에 치중하다 보니 한국은행이 돈을 풀더라도 실물 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점점 약해진다는 얘기다.

돈 풀어도 재고 탓에…기업, 투자 않고 관망, 금리인하 '약발' 안먹혀
21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8월 기업대출 금리(신규 취급액 기준)는 역대 최저인 연 3.32%로 집계됐다. 7월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인하한 데 따른 영향이다. 이처럼 자금 조달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지만 기업들은 투자를 주저하고 있다. 올 들어 설비투자 증가율은 마이너스(전년 동기 대비 기준)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현금 보유 규모는 계속 증가세다. 8월 말 비금융 기업들이 보유한 현금성자산(M2·원계열 기준)은 770조6860억원으로 관련 통계를 작성한 2001년 1월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말(737조1492억원)과 비교해선 4.5%(33조5368억원) 증가한 것이다. 기업들이 돈을 움켜쥔 채 관망만 하는 것은 미·중 무역분쟁 등 불확실성이 커진 데다 기업의 재고물량이 급증한 영향으로 해석된다. 이 같은 여건에서 기업들은 공장을 늘리거나 설비를 새로 들이기 어렵다. 불어난 재고 탓에 완화적 통화정책이 소비·투자 진작 효과를 제대로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재고 문제가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준금리를 인하하면 부동자금만 늘고 부동산으로 자금이 몰릴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최근 상황에서 기준금리를 인하하면 부동산 투기 수요를 부추기는 등 부작용만 키울 것”이라며 “완화적 통화정책으로 자산·소득 양극화가 심해질지 모른다”고 말했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