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베네수엘라 논쟁' 제대로 해보자
한반도의 남과 북에서 베네수엘라가 각각의 비교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이 ‘베네수엘라 리포트위원회’를 출범시키며 문재인 정부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반(反)시장 및 과도한 복지정책으로 경제를 파탄시킨 베네수엘라를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엊그제 미국의 제재 압박을 비난하는 노동신문 논평을 내면서 베네수엘라를 모범적인 극복 사례로 꼽았다. “이라크와 리비아는 제국주의자들의 위협과 공갈에 동요하면서 물러서다가 자멸의 길을 걸었지만, 서방의 베네수엘라에 대한 간섭책동은 실패했다”고 했다. 북한 정권 기관지는 베네수엘라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뻔한 이유를 따지고 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20년 넘게 베네수엘라를 지배하고 있는 차베스-마두로 사회주의 정부는 믿기 힘들 정도의 빠른 속도로 나라를 결딴내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베네수엘라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올해에만 35% 감소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세계 1위의 원유 매장량(3022억 배럴, 2016년 기준) 등 풍부한 자원을 가진 나라가 1년 새 3분의 2토막 수준으로 경제 규모가 쪼그라들고 있다는 얘기다. 한 국가의 경제가 전쟁이나 자연재해를 겪지 않고 이렇게 풍비박산 난 사례는 세계 역사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 원인이 시장경제와 정반대 정책을 편 데 있다는 게 한국당 ‘베네수엘라 리포트’의 핵심 내용이다. 석유 생산과 판매로 얻은 수입을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는 데 쓰지 않고 온갖 무상복지에 투입해 국민의 자립 의지를 꺾었고, 자국 민간기업은 물론 외국 기업까지 국영화해 시장 생태계를 망쳤다는 것이다. 유일한 국가 수입원(源)이었던 석유의 국제가격이 급락해 나라 곳간을 채울 길이 없어지자 베네수엘라 정부는 마구잡이 통화 및 국채 발행을 통해 비대해진 지출 구조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이런 베네수엘라와 우리나라 상황을 맞비교하는 게 정부·여당에 달가울 리 없다. 국회 국정감사에서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가 정부의 복지 분야 재정지출이 과도하다며 “베네수엘라로 가는 길”이라고 공격하자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자존심이 상하는 자기비하적 비교”라며 발끈하는 장면이 빚어지기도 했다. “민간에서 일자리가 더 만들어지고 성장 기여도가 높아져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상황이 순탄치 않을 때는 재정이라도 일단 경제를 뒷받침할 필요가 있다”는 게 홍 부총리의 주장이었다. 그의 주장은 엊그제 문재인 대통령의 예산국회 시정연설에서 그대로 되풀이됐다. 문 대통령은 513조원에 이르는 내년도 ‘초(超)슈퍼 예산안’에 대해 “경제가 엄중한 상황에서 재정이 대외 충격의 파고를 막는 방파제가 돼야 한다”며 “내년도 확장예산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했다.

문 대통령과 정부의 인식에도 나름의 논리는 있다. 그러나 시장의 자생력을 높이고 키우는 조장(助長)정책 없이 재정 투입부터, 그것도 한번 쓰고 나면 증발해 버리는 노인 일자리 등 일회성 현금지원 사업을 집중적으로 벌이는 게 제대로 된 ‘방파제’일 수는 없다. 베네수엘라가 망국의 길을 치닫게 된 것은 시장과 새로운 산업을 키우지 않은 채 거액의 빚을 끌어들여가면서까지 선심성 현금복지를 남발한 탓이다. 차베스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선 이듬해인 2000년 28%였던 GDP 대비 정부 지출이 지난해 41%로까지 뛰었다. 재정이 어려워지자 통화를 남발해 물가가 137만%나 치솟는 ‘비현실적’ 상황이 빚어졌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말만 듣는 것은 책임 있는 정부가 취할 자세가 아니다. 내키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상황이 베네수엘라와 무엇이 같고 어떤 게 다른지, 지금의 확장적인 재정정책이 지속될 경우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전문가들과 함께 ‘끝장토론’을 벌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다음 세대에 빚을 떠넘기는 거액의 국채 발행을 통해 팽창예산을 편성한 정부가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이기도 하다. ‘자존심 문제’로 비껴갈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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