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교육에서 경쟁·서열은 없애야 할 대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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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에선 경쟁한다고 비난 않는데
교육에선 획일화를 공정으로 정당화
각자 능력 키우는 '생산적 경쟁' 필요
이혜정 < 교육과혁신연구소 소장 >
교육에선 획일화를 공정으로 정당화
각자 능력 키우는 '생산적 경쟁' 필요
이혜정 < 교육과혁신연구소 소장 >
한국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경쟁’과 ‘서열’을 없애야 한다는 사람이 많다. 대학 입시 문제도, 학교 교육 문제도 모두 과잉 경쟁과 서열화가 원흉이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정말 교육에서 경쟁과 서열은 없애야 할 적폐인가.
올림픽 종목별로 메달을 따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는 것을 우리는 과열 경쟁이라 비난하지 않는다. 금·은·동메달의 서열이 매겨져 있는 것을 두고 아무도 적폐라 하지 않는다. 만약 수영 선수나 피겨스케이팅 선수에게 수영이나 피겨가 아니라 달리기로만 훈련시키고 평가한다면 왜 엉뚱한 훈련을 시키고 황당한 평가를 하느냐고 비난할 것이다.
그런데 교육에서는 아이들의 특성에 맞는 다양한 교육 및 평가를 하기보다 올림픽의 수많은 종목을 무시하고 달리기 하나로만 줄 세우는 격인 획일화된 평가(현 수능과 내신)를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면서 오직 과열 경쟁만이 모든 문제의 근원인 것처럼 경쟁 자체를 비난한다. 서열만 없어지면 모두가 행복해질 것처럼 얘기한다. 올림픽에서 금·은·동의 메달 서열이 없어지면 과연 모두가 행복해지는가.
‘아이들이 행복한 교육’을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문제는 행복하긴 했으나 아무런 역량도 제대로 기르지 못한 채 졸업하는 ‘행복하기만’ 한 교육이다. 어느 사회든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하고 시대 역량을 기르지 못하면 역사는 예외없이 이를 패자로 기록했다. 시대 역량 성장에 눈감는 교육은 아무리 행복해도 무책임하다.
서열과 경쟁 때문에 국·영·수 위주의 입시 교육만 하고 비판적, 창의적인 다양성 교육을 못 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서열과 경쟁이 존재하면서도 다양한 창의적 교육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서열과 경쟁의 기준을 바꾸면 된다. 평가 기준이 바뀌면 국·영·수도 창의 교육이 가능하다. 선진국들은 정답 찾기가 아니라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력으로 ‘공정한’ 입시를 치른다. 사회에서도 학술 논문에서, 영화나 소설에서 비판적 창의적 사고력의 ‘퀄리티’에 대한 평가가 이미 보편화돼 있다. 우리 공교육에서만 그런 평가가 철저히 배제되고 있을 뿐이다.
세계 모든 나라에 경쟁과 서열은 존재한다. 그 경쟁과 서열의 극심한 정점이 대학 입학 시점인지 그 이후로 분산돼 있는지 다를 뿐이다. 프랑스 대학은 평준화돼 경쟁이 없다고 오도하지 말자. 프랑스에서 대학이라 불리는 곳은 바칼로레아 점수 20점 만점 중 10점 이상이면 추첨으로 입학을 결정하는 것은 맞지만, 의대와 공대처럼 인기 학과는 1학년 지난 뒤 절반이 탈락하는 등 입학생의 10%만 졸업할 정도로 진학 후 경쟁이 치열하다. 의대와 공대 외에는 그랑제콜을 가기 위한 프레파 입학이 치열하다. 대학 입학에서는 내신을 안 보지만 프레파 입학에서는 내신을 본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입학생 상당수가 낙제하는 현실 때문에 대학 입시에 단순 추첨이 아니라 고교 내신 반영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전 과목 토론·프로젝트 수업을 하고 논·서술 평가를 하는 국제 공인 교육과정인 국제바칼로레아(IB)도 상대평가와 석차는 없지만 서열과 경쟁은 있다. 다만 종류가 다른 서열과 경쟁이다. 모든 아이의 과제 주제가 달라서 남보다 더 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만의 과제를 어떻게 더 완성도를 높일까 하고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경쟁한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시대가 요구하는 역량을 기른다. 경쟁과 서열은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라 기준을 바꿔야 할 ‘혁신의 대상’이다. 승자조차 세계적인 경쟁력이 없는 경쟁이 문제지, 경쟁 자체를 적폐로 치부할 일은 아니다. 한 개의 피라미드에 모두가 오르는 소모적 경쟁이 아니라 모두가 각자의 피라미드를 쌓고 자신의 피라미드에서 성장하는 생산적 경쟁을 해야 한다.
헌법 31조1항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에서 ‘능력에 따라’라는 문구는 종종 한 줄 서열을 정당화하는 의미로 오해된다. 그러나 이는 달리기 한 가지 종목에서 빠른 사람과 느린 사람을 다른 학교에 넣어 교육하라는 뜻이 아니다. 달리기 잘하는 아이는 달리기를, 수영 잘하는 아이는 수영을, 피겨 잘하는 아이는 피겨를 배울 수 있는, ‘다양한 능력에 따라’ 배울 권리로 이해해야 한다.
올림픽 종목별로 메달을 따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는 것을 우리는 과열 경쟁이라 비난하지 않는다. 금·은·동메달의 서열이 매겨져 있는 것을 두고 아무도 적폐라 하지 않는다. 만약 수영 선수나 피겨스케이팅 선수에게 수영이나 피겨가 아니라 달리기로만 훈련시키고 평가한다면 왜 엉뚱한 훈련을 시키고 황당한 평가를 하느냐고 비난할 것이다.
그런데 교육에서는 아이들의 특성에 맞는 다양한 교육 및 평가를 하기보다 올림픽의 수많은 종목을 무시하고 달리기 하나로만 줄 세우는 격인 획일화된 평가(현 수능과 내신)를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면서 오직 과열 경쟁만이 모든 문제의 근원인 것처럼 경쟁 자체를 비난한다. 서열만 없어지면 모두가 행복해질 것처럼 얘기한다. 올림픽에서 금·은·동의 메달 서열이 없어지면 과연 모두가 행복해지는가.
‘아이들이 행복한 교육’을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문제는 행복하긴 했으나 아무런 역량도 제대로 기르지 못한 채 졸업하는 ‘행복하기만’ 한 교육이다. 어느 사회든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하고 시대 역량을 기르지 못하면 역사는 예외없이 이를 패자로 기록했다. 시대 역량 성장에 눈감는 교육은 아무리 행복해도 무책임하다.
서열과 경쟁 때문에 국·영·수 위주의 입시 교육만 하고 비판적, 창의적인 다양성 교육을 못 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서열과 경쟁이 존재하면서도 다양한 창의적 교육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서열과 경쟁의 기준을 바꾸면 된다. 평가 기준이 바뀌면 국·영·수도 창의 교육이 가능하다. 선진국들은 정답 찾기가 아니라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력으로 ‘공정한’ 입시를 치른다. 사회에서도 학술 논문에서, 영화나 소설에서 비판적 창의적 사고력의 ‘퀄리티’에 대한 평가가 이미 보편화돼 있다. 우리 공교육에서만 그런 평가가 철저히 배제되고 있을 뿐이다.
세계 모든 나라에 경쟁과 서열은 존재한다. 그 경쟁과 서열의 극심한 정점이 대학 입학 시점인지 그 이후로 분산돼 있는지 다를 뿐이다. 프랑스 대학은 평준화돼 경쟁이 없다고 오도하지 말자. 프랑스에서 대학이라 불리는 곳은 바칼로레아 점수 20점 만점 중 10점 이상이면 추첨으로 입학을 결정하는 것은 맞지만, 의대와 공대처럼 인기 학과는 1학년 지난 뒤 절반이 탈락하는 등 입학생의 10%만 졸업할 정도로 진학 후 경쟁이 치열하다. 의대와 공대 외에는 그랑제콜을 가기 위한 프레파 입학이 치열하다. 대학 입학에서는 내신을 안 보지만 프레파 입학에서는 내신을 본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입학생 상당수가 낙제하는 현실 때문에 대학 입시에 단순 추첨이 아니라 고교 내신 반영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전 과목 토론·프로젝트 수업을 하고 논·서술 평가를 하는 국제 공인 교육과정인 국제바칼로레아(IB)도 상대평가와 석차는 없지만 서열과 경쟁은 있다. 다만 종류가 다른 서열과 경쟁이다. 모든 아이의 과제 주제가 달라서 남보다 더 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만의 과제를 어떻게 더 완성도를 높일까 하고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경쟁한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시대가 요구하는 역량을 기른다. 경쟁과 서열은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라 기준을 바꿔야 할 ‘혁신의 대상’이다. 승자조차 세계적인 경쟁력이 없는 경쟁이 문제지, 경쟁 자체를 적폐로 치부할 일은 아니다. 한 개의 피라미드에 모두가 오르는 소모적 경쟁이 아니라 모두가 각자의 피라미드를 쌓고 자신의 피라미드에서 성장하는 생산적 경쟁을 해야 한다.
헌법 31조1항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에서 ‘능력에 따라’라는 문구는 종종 한 줄 서열을 정당화하는 의미로 오해된다. 그러나 이는 달리기 한 가지 종목에서 빠른 사람과 느린 사람을 다른 학교에 넣어 교육하라는 뜻이 아니다. 달리기 잘하는 아이는 달리기를, 수영 잘하는 아이는 수영을, 피겨 잘하는 아이는 피겨를 배울 수 있는, ‘다양한 능력에 따라’ 배울 권리로 이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