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과 맛있는 만남] 정성인 "시위경력에 대학원 못 가 VC行…1년만 있겠다던 업계서 38년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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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인 한국벤처캐피탈 협회장
"벤처캐피털리스트는 미래에 투자
경제 나아갈 길 찾는 게 우리 역할"
"벤처캐피털리스트는 미래에 투자
경제 나아갈 길 찾는 게 우리 역할"
정성인 한국벤처캐피탈협회 회장(60)은 국내 1세대 벤처캐피털리스트다. 높은 수익만큼 위험도 큰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국내 벤처캐피털(VC)업계의 산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981년 설립된 한국 VC의 시초 격인 한국기술개발(현 KTB네트워크) 공채 1기로 그는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코스닥시장 개장(1996년), 인터넷 기술 발전과 함께 찾아온 정보기술(IT) 붐과 곧 이은 거품 붕괴, 2005년 황우석 사태가 불러온 한국 바이오산업의 침체, 최근 제2의 벤처붐에 이르기까지 38년을 그는 오롯이 한자리를 지켰다. 젊은 청년은 간데없고 이제 머리가 희끗한 예순이지만, 말투에는 20대 청년 같은 에너지가 여전하다. 2005년 그가 세운 VC 프리미어파트너스는 크래프톤(옛 블루홀), 카페24, 리디북스, 쏘카 등에 대한 투자를 잇달아 성공하며 국내 간판 VC로 자리잡았다. 정 회장의 단골집, 세꼬시 전문점 해초록안방에서 그를 만났다.
1년만 있겠다며 입사한 VC
전채로 찐 옥수수와 땅콩이 나왔다. 땅콩 껍데기를 까며 정 회장의 초년시절 이야기가 시작됐다. 1960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유학 온 그는 영등포 작은아버지 집에 얹혀살았다.
1974년 서울에서 고교 평준화가 시행됐다. ‘뺑뺑이’ 방식으로 진학하기가 아쉬워 비평준화가 유지되던 인천의 제물포고에 진학했다. 재수 끝에 78학번으로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했고, 이듬해 경제학과로 전공을 정했다. 1979년 가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신군부 집권 등이 이어졌다.
“매일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광주 출신이던 동기가 도서관에서 자살하기도 했죠. 어쩌다 보니 유시민 씨(현 노무현재단 이사장)에 이어 과대표를 맡게 됐어요. 그 시절 다 그랬듯, 거리에서 밤낮을 보냈습니다.”
대학 4학년, 경제학 공부를 더 해볼까 싶어 과 사무실을 찾았는데 과 대표를 지냈다는 ‘운동권’ 딱지가 발목을 잡았다. 조교 선배가 “어제 굉장히 좋은 회사를 소개받았는데 아무도 지원한다는 친구가 없다”며 “성인이 너 딱 1년만 여기 다녀보고, 정 대학원에 가고 싶으면 내년에 다시 오라”며 지원서를 건넸다.
“그 회사가 한국 최초의 VC인 한국기술개발이었습니다. 공채 1기였죠. 당시엔 벤처캐피털이란 용어도 없었습니다. 1년만 있겠다던 업계에 38년을 있을 줄은 그땐 꿈에도 몰랐습니다.”
공장 돌며 기업의 기본을 깨닫다
해초와 제철 생선회가 상에 깔렸다. 그가 가르쳐 주는 대로 해초를 듬뿍 담은 깻잎에 돌도다리 한 점을 올려 입에 넣었다.
그의 첫 직장인 한국기술개발은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탄생했다. 당시 차관을 제공한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은 그 자금을 국내 신생기업의 기술 개발에 쓰라며 민간 자금을 끌어들이고 민간 전문가를 채용하라는 등의 조건을 제시했다.
“당시는 기술 개발을 위한 대출이란 개념 자체도 없던 때였습니다. 투자를 통해 지분을 확보하고 회사 가치를 높여 자금을 회수하는 시장도 외환위기 이후에야 생겨났을 정도였죠.”
첫 직장에서 그는 ‘기업’을 배웠다. 투자한 회사가 실적이 떨어지거나 부도 위기에 처하면 사태 수습을 위한 파견 명단엔 늘 그의 이름이 올랐다. 4년가량을 지방의 공장에서 보냈다. 재무제표 숫자로는 알 수 없는 현장을 봤다.
“26세 때, 파견 나갔던 회사의 사장이 어느 날 ‘기업이 무엇이냐’고 묻더군요.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 탈법도 하지 않는 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해 돈을 버는 것이 기업’이라고 그는 정의했습니다. 아직 이보다 더 현실감 있는 답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정 회장은 “기업이 돈을 벌어야 직원도 투자자도 모두 행복하다는 것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던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그렇게 16년을 보내며 그는 공공자금을 통한 자기자본 투자가 아니라 다양한 출처의 자금을 모아 펀드를 개설하고 투자를 집행하는 VC가 수익률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 회사에 VC로 변해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공기업이다 보니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마침 현대그룹에서 설립한 창업투자회사(현대기술투자)에 최고투자책임자(CIO)로 갈 기회가 생겨 민간기업으로 과감하게 옮겼죠.”
무릎까지 꿇어가며 펀드 성사시켜
얼마 안 돼 한국은 외환위기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김대중 정부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초고속통신망 구축을 비롯해 대대적인 IT 벤처 육성에 나섰다. 위기가 그에게는 기회가 됐다.
현대기술투자에서 뛰어난 성과를 낸 그는 1999년 명문 VC로 통하는 인터베스트의 창립 멤버로 참여했다. 메디슨, 카스, 주성엔지니어링 등 대표적인 1세대 벤처기업에 투자해 높은 수익률을 올렸다. 6년이 지난 2005년에는 국내 최초의 유한회사형 VC인 프리미어파트너스를 창업해 독립했다.
“프리미어파트너스의 첫 펀드는 순조로웠어요. 기관투자가 다섯 곳에서 500억원을 모아서 신나게 투자했습니다. 뷰웍스, 멜파스, 루멘스 등 그때 투자한 기업 다수가 상장에 성공했죠.”
이 펀드는 2013년 청산할 때 연 내부수익률(IRR) 12%를 올렸다. 하지만 첫 펀드의 성공과 달리 두 번째 펀드는 간난신고(艱難辛苦) 끝에 세상에 태어났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국을 덮쳤다. 침체가 어느 정도 이어질지 가늠할 수 없자 기관투자가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가까스로 열 곳의 출자기관에서 250억원을 모았지만 마감 직전에 핵심 출자자들이 이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다른 기관들도 도미노처럼 출자 철회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가 젓가락질을 멈췄다. 그 시절을 있는 대로 말해야 할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VC에 펀드 결성 실패는 꼬리표처럼 남습니다. 2호 펀드 결성에 실패하면 끝장이라고 생각했어요. 출자 마감 전날, 기관들을 찾아갔습니다. 같이 간 실무자를 밖으로 내보내고 무릎을 꿇었죠. 약속을 지켜달라고 빌었습니다. 다행히 출자 결정이 내려졌고, 그 펀드를 통해 디오, 인트로메딕, 엑스엘게임즈 등 여러 유망 기업을 발굴할 수 있었습니다.”
“벤처특별법 통과 꼭 해낼 것”
마무리는 뜨끈한 고등어김치찜이었다. 매콤하고 따뜻한 국물이 숟가락을 계속 끌어당겼다. 정 회장은 지난 2월 국내 VC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한국벤처캐피탈협회 13대 회장으로 추대됐다. 그는 “빚을 갚으려고” 회장 자리를 수락했다고 했다. “2000년대 초나 지금이나 주요 VC의 숫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매년 열 곳이 새로 생기면 열 곳이 망하거든요.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은 능력이나 노력이 아니라 다른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제 빚 갚을 때가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정 회장은 협회장으로서 세 가지 목표를 제시했다. VC가 독립된 금융산업으로 법적으로 인정받는 것, 중소벤처 생태계와 서로 돕고 공생하는 것, 정부 의존에서 벗어나 시장 중심의 자율성을 갖추는 것이다.
특히 그가 힘쓰는 과제는 현재 2개 법으로 쪼개져 있는 벤처투자 관련법을 하나로 통합하는 ‘벤처투자 촉진에 관한 법률’ 제정이다. 지난해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국회에 제출된 지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답보 상태다. 정 회장은 “끊임없이 새로운 산업이 생겨나고 있고 국경을 넘어선 벤처기업의 합종연횡이 요구되는 시점이지만 법이 둘로 쪼개져 현장에서 비효율을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식사가 끝나갈 때쯤 다시 태어나도 같은 길을 택할 것인지 물었다. 그는 “다시 한다면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라고 했다. “벤처캐피털리스트는 미래에 투자합니다. 지금까지 어떠했는가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해답을 찾는 게 우리 역할입니다.”
■ 한국벤처캐피탈협회는…
한국벤처캐피탈협회는 1989년 설립돼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1980년대 국내 벤처산업이 성장하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벤처캐피털(VC)산업의 제도 및 경영환경을 개선할 필요성이 커지자 주요 VC를 중심으로 협회가 결성됐다. 회원 간에 업무를 협의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역할은 물론, 벤처캐피털산업의 인프라 강화를 위해 제도와 정책을 개발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 최근엔 전문성을 갖춘 벤처캐피털리스트를 육성하기 위한 교육과 국내 벤처캐피털의 해외 진출 지원으로영역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중소기업창업투자회사 105곳, 신기술사업금융업자 15곳, 유한회사(LLC) 9곳, 특별회원 10곳 등 139곳이 소속돼 있다.
■ 정성인 한국벤처캐피탈협회장 약력
△1960년 충남 당진 출생
△1977년 인천 제물포고 졸업
△1982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1981년 한국기술개발 (현 KTB네트워크) 입사
△1997년 현대기술투자 부장
△1999년 인터베스트 대표
△2005년 프리미어파트너스 대표
△2019년 한국벤처캐피탈협회 제13대 회장 ■ 정성인 회장의 단골집 해초록안방
당일 잡은 자연산 활어회 '싱싱'…최고급 돌도다리 맛 '일품'
서울 대치동에 있는 자연산 활어 전문점이다. 경남 통영에서 당일 잡은 자연산 활어를 오마카세 코스로 즐길 수 있다. 부산 출신인 임갑희 대표가 18년째 운영하고 있다.
도다리세꼬시, 자연산 줄돔, 능성어가 대표 메뉴다. 활어를 각종 해초류, 김과 함께 싸서 먹는 맛이 일품이다. 크고 두툼해 씹는 맛이 있으면서도 부드럽게 넘어간다. 직접 담근 김치와 쌈장까지 곁들이면 맛이 배가 된다. 비린 느낌은 전혀 없다.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하루에 두 번 통영에서 활어가 올라온다.
최고급 어종인 자연산 돌도다리(이시가리)도 맛볼 수 있다. 자연산 돌도다리를 취급하는 횟집은 많지 않다. 탱글탱글한 식감과 담백한 맛이 뛰어나다. 가격이 제법 비싸지만 제철인 한겨울에는 없어서 못 팔 정도다.
3층짜리 건물에 대부분 룸 형태로 운영돼 조용하게 대화를 나누며 식사하기에 좋다. 합리적인 가격에 자연산 활어회를 맛볼 수 있어 멀리서도 찾아오는 단골이 많다. 본점(1996년 개점)은 부산 민락동에 있고 서울 삼성동에 분점 해초록사랑이 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
1981년 설립된 한국 VC의 시초 격인 한국기술개발(현 KTB네트워크) 공채 1기로 그는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코스닥시장 개장(1996년), 인터넷 기술 발전과 함께 찾아온 정보기술(IT) 붐과 곧 이은 거품 붕괴, 2005년 황우석 사태가 불러온 한국 바이오산업의 침체, 최근 제2의 벤처붐에 이르기까지 38년을 그는 오롯이 한자리를 지켰다. 젊은 청년은 간데없고 이제 머리가 희끗한 예순이지만, 말투에는 20대 청년 같은 에너지가 여전하다. 2005년 그가 세운 VC 프리미어파트너스는 크래프톤(옛 블루홀), 카페24, 리디북스, 쏘카 등에 대한 투자를 잇달아 성공하며 국내 간판 VC로 자리잡았다. 정 회장의 단골집, 세꼬시 전문점 해초록안방에서 그를 만났다.
1년만 있겠다며 입사한 VC
전채로 찐 옥수수와 땅콩이 나왔다. 땅콩 껍데기를 까며 정 회장의 초년시절 이야기가 시작됐다. 1960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유학 온 그는 영등포 작은아버지 집에 얹혀살았다.
1974년 서울에서 고교 평준화가 시행됐다. ‘뺑뺑이’ 방식으로 진학하기가 아쉬워 비평준화가 유지되던 인천의 제물포고에 진학했다. 재수 끝에 78학번으로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했고, 이듬해 경제학과로 전공을 정했다. 1979년 가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신군부 집권 등이 이어졌다.
“매일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광주 출신이던 동기가 도서관에서 자살하기도 했죠. 어쩌다 보니 유시민 씨(현 노무현재단 이사장)에 이어 과대표를 맡게 됐어요. 그 시절 다 그랬듯, 거리에서 밤낮을 보냈습니다.”
대학 4학년, 경제학 공부를 더 해볼까 싶어 과 사무실을 찾았는데 과 대표를 지냈다는 ‘운동권’ 딱지가 발목을 잡았다. 조교 선배가 “어제 굉장히 좋은 회사를 소개받았는데 아무도 지원한다는 친구가 없다”며 “성인이 너 딱 1년만 여기 다녀보고, 정 대학원에 가고 싶으면 내년에 다시 오라”며 지원서를 건넸다.
“그 회사가 한국 최초의 VC인 한국기술개발이었습니다. 공채 1기였죠. 당시엔 벤처캐피털이란 용어도 없었습니다. 1년만 있겠다던 업계에 38년을 있을 줄은 그땐 꿈에도 몰랐습니다.”
공장 돌며 기업의 기본을 깨닫다
해초와 제철 생선회가 상에 깔렸다. 그가 가르쳐 주는 대로 해초를 듬뿍 담은 깻잎에 돌도다리 한 점을 올려 입에 넣었다.
그의 첫 직장인 한국기술개발은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탄생했다. 당시 차관을 제공한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은 그 자금을 국내 신생기업의 기술 개발에 쓰라며 민간 자금을 끌어들이고 민간 전문가를 채용하라는 등의 조건을 제시했다.
“당시는 기술 개발을 위한 대출이란 개념 자체도 없던 때였습니다. 투자를 통해 지분을 확보하고 회사 가치를 높여 자금을 회수하는 시장도 외환위기 이후에야 생겨났을 정도였죠.”
첫 직장에서 그는 ‘기업’을 배웠다. 투자한 회사가 실적이 떨어지거나 부도 위기에 처하면 사태 수습을 위한 파견 명단엔 늘 그의 이름이 올랐다. 4년가량을 지방의 공장에서 보냈다. 재무제표 숫자로는 알 수 없는 현장을 봤다.
“26세 때, 파견 나갔던 회사의 사장이 어느 날 ‘기업이 무엇이냐’고 묻더군요.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 탈법도 하지 않는 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해 돈을 버는 것이 기업’이라고 그는 정의했습니다. 아직 이보다 더 현실감 있는 답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정 회장은 “기업이 돈을 벌어야 직원도 투자자도 모두 행복하다는 것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던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그렇게 16년을 보내며 그는 공공자금을 통한 자기자본 투자가 아니라 다양한 출처의 자금을 모아 펀드를 개설하고 투자를 집행하는 VC가 수익률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 회사에 VC로 변해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공기업이다 보니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마침 현대그룹에서 설립한 창업투자회사(현대기술투자)에 최고투자책임자(CIO)로 갈 기회가 생겨 민간기업으로 과감하게 옮겼죠.”
무릎까지 꿇어가며 펀드 성사시켜
얼마 안 돼 한국은 외환위기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김대중 정부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초고속통신망 구축을 비롯해 대대적인 IT 벤처 육성에 나섰다. 위기가 그에게는 기회가 됐다.
현대기술투자에서 뛰어난 성과를 낸 그는 1999년 명문 VC로 통하는 인터베스트의 창립 멤버로 참여했다. 메디슨, 카스, 주성엔지니어링 등 대표적인 1세대 벤처기업에 투자해 높은 수익률을 올렸다. 6년이 지난 2005년에는 국내 최초의 유한회사형 VC인 프리미어파트너스를 창업해 독립했다.
“프리미어파트너스의 첫 펀드는 순조로웠어요. 기관투자가 다섯 곳에서 500억원을 모아서 신나게 투자했습니다. 뷰웍스, 멜파스, 루멘스 등 그때 투자한 기업 다수가 상장에 성공했죠.”
이 펀드는 2013년 청산할 때 연 내부수익률(IRR) 12%를 올렸다. 하지만 첫 펀드의 성공과 달리 두 번째 펀드는 간난신고(艱難辛苦) 끝에 세상에 태어났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국을 덮쳤다. 침체가 어느 정도 이어질지 가늠할 수 없자 기관투자가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가까스로 열 곳의 출자기관에서 250억원을 모았지만 마감 직전에 핵심 출자자들이 이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다른 기관들도 도미노처럼 출자 철회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가 젓가락질을 멈췄다. 그 시절을 있는 대로 말해야 할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VC에 펀드 결성 실패는 꼬리표처럼 남습니다. 2호 펀드 결성에 실패하면 끝장이라고 생각했어요. 출자 마감 전날, 기관들을 찾아갔습니다. 같이 간 실무자를 밖으로 내보내고 무릎을 꿇었죠. 약속을 지켜달라고 빌었습니다. 다행히 출자 결정이 내려졌고, 그 펀드를 통해 디오, 인트로메딕, 엑스엘게임즈 등 여러 유망 기업을 발굴할 수 있었습니다.”
“벤처특별법 통과 꼭 해낼 것”
마무리는 뜨끈한 고등어김치찜이었다. 매콤하고 따뜻한 국물이 숟가락을 계속 끌어당겼다. 정 회장은 지난 2월 국내 VC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한국벤처캐피탈협회 13대 회장으로 추대됐다. 그는 “빚을 갚으려고” 회장 자리를 수락했다고 했다. “2000년대 초나 지금이나 주요 VC의 숫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매년 열 곳이 새로 생기면 열 곳이 망하거든요.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은 능력이나 노력이 아니라 다른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제 빚 갚을 때가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정 회장은 협회장으로서 세 가지 목표를 제시했다. VC가 독립된 금융산업으로 법적으로 인정받는 것, 중소벤처 생태계와 서로 돕고 공생하는 것, 정부 의존에서 벗어나 시장 중심의 자율성을 갖추는 것이다.
특히 그가 힘쓰는 과제는 현재 2개 법으로 쪼개져 있는 벤처투자 관련법을 하나로 통합하는 ‘벤처투자 촉진에 관한 법률’ 제정이다. 지난해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국회에 제출된 지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답보 상태다. 정 회장은 “끊임없이 새로운 산업이 생겨나고 있고 국경을 넘어선 벤처기업의 합종연횡이 요구되는 시점이지만 법이 둘로 쪼개져 현장에서 비효율을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식사가 끝나갈 때쯤 다시 태어나도 같은 길을 택할 것인지 물었다. 그는 “다시 한다면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라고 했다. “벤처캐피털리스트는 미래에 투자합니다. 지금까지 어떠했는가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해답을 찾는 게 우리 역할입니다.”
■ 한국벤처캐피탈협회는…
한국벤처캐피탈협회는 1989년 설립돼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1980년대 국내 벤처산업이 성장하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벤처캐피털(VC)산업의 제도 및 경영환경을 개선할 필요성이 커지자 주요 VC를 중심으로 협회가 결성됐다. 회원 간에 업무를 협의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역할은 물론, 벤처캐피털산업의 인프라 강화를 위해 제도와 정책을 개발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 최근엔 전문성을 갖춘 벤처캐피털리스트를 육성하기 위한 교육과 국내 벤처캐피털의 해외 진출 지원으로영역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중소기업창업투자회사 105곳, 신기술사업금융업자 15곳, 유한회사(LLC) 9곳, 특별회원 10곳 등 139곳이 소속돼 있다.
■ 정성인 한국벤처캐피탈협회장 약력
△1960년 충남 당진 출생
△1977년 인천 제물포고 졸업
△1982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1981년 한국기술개발 (현 KTB네트워크) 입사
△1997년 현대기술투자 부장
△1999년 인터베스트 대표
△2005년 프리미어파트너스 대표
△2019년 한국벤처캐피탈협회 제13대 회장 ■ 정성인 회장의 단골집 해초록안방
당일 잡은 자연산 활어회 '싱싱'…최고급 돌도다리 맛 '일품'
서울 대치동에 있는 자연산 활어 전문점이다. 경남 통영에서 당일 잡은 자연산 활어를 오마카세 코스로 즐길 수 있다. 부산 출신인 임갑희 대표가 18년째 운영하고 있다.
도다리세꼬시, 자연산 줄돔, 능성어가 대표 메뉴다. 활어를 각종 해초류, 김과 함께 싸서 먹는 맛이 일품이다. 크고 두툼해 씹는 맛이 있으면서도 부드럽게 넘어간다. 직접 담근 김치와 쌈장까지 곁들이면 맛이 배가 된다. 비린 느낌은 전혀 없다.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하루에 두 번 통영에서 활어가 올라온다.
최고급 어종인 자연산 돌도다리(이시가리)도 맛볼 수 있다. 자연산 돌도다리를 취급하는 횟집은 많지 않다. 탱글탱글한 식감과 담백한 맛이 뛰어나다. 가격이 제법 비싸지만 제철인 한겨울에는 없어서 못 팔 정도다.
3층짜리 건물에 대부분 룸 형태로 운영돼 조용하게 대화를 나누며 식사하기에 좋다. 합리적인 가격에 자연산 활어회를 맛볼 수 있어 멀리서도 찾아오는 단골이 많다. 본점(1996년 개점)은 부산 민락동에 있고 서울 삼성동에 분점 해초록사랑이 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