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 10월 27일 오후 4시31분
정부가 상장사 사외이사 임기를 6년으로 제한하는 내용을 담은 상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하면서 ‘사외이사 대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달 5일 열린 당·정·청 협의회에서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오른쪽 두 번째)이 상법 개정안을 포함한 ‘공정경제 성과 조기 창출 방안’을 설명하고 있다.  /한경DB
정부가 상장사 사외이사 임기를 6년으로 제한하는 내용을 담은 상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하면서 ‘사외이사 대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달 5일 열린 당·정·청 협의회에서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오른쪽 두 번째)이 상법 개정안을 포함한 ‘공정경제 성과 조기 창출 방안’을 설명하고 있다. /한경DB
내년 봄 주주총회 시즌에 약 570개 상장사의 사외이사 700여 명이 한꺼번에 강제 물갈이될 전망이다. 전체 상장사(금융회사 제외) 사외이사 다섯 명 중 한 명꼴이다. 장기 재직한 사외이사와 경영진의 유착을 막기 위해 정부가 추진하는 상법 시행령 개정안에 따른 파장이다.

법무부는 상장사 사외이사 임기를 최장 6년으로 제한하는 내용을 담은 상법 시행령 개정안을 지난달 24일 입법예고했다. 다음달 4일까지 의견을 수렴한 뒤 법제처 심사, 국무회의를 거쳐 연내 시행할 계획이다.

[마켓인사이트] 내년 '사외이사 대란'…718명 강제교체
한국경제신문이 12월 결산 상장사 2003곳의 사외이사(총 3973명) 임기를 전수 조사한 결과, 내년 3월 주총을 앞두고 임기가 만료되는 사외이사는 936개 상장사에서 1432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개정안에 따라 6년 이상 재직했거나, 내년 재선임되더라도 임기 중 자격이 상실돼 반드시 교체해야 하는 사외이사는 718명에 달한다. 전체 상장사 사외이사의 약 5분의 1(18.0%)에 해당한다. 내년 주총에서 사외이사를 강제로 바꿔야 하는 상장사는 566곳에 이른다.

상법 개정안은 또 대기업집단에서 계열사를 바꿔 사외이사를 맡더라도 총 9년까지만 재직할 수 있도록 했다. 사외이사를 맡다가 임기 6년이 지나면 다시 계열사로 옮기는 ‘돌려막기’를 차단하기 위해서다. 이를 감안하면 내년 주총에서 강제 교체될 사외이사 수는 더욱 많다. 정우용 한국상장사협의회 전무는 “전문성을 갖춘 사외이사 인력풀이 한정된 상황에서 한꺼번에 이들의 물갈이를 강제하면 내년 주총에서 큰 혼란이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사외이사 신상공개 의무화
전직 관료·교수 이사회 진출 늘어날 듯


내년 봄 주주총회 시즌에 ‘사외이사 대란’이 예고됐다. 2017년 말 섀도보팅(의결권 대리행사) 폐지 이후 의결 정족수 부족으로 주총 안건 ‘부결’이 쏟아지는 가운데 대대적인 사외이사 물갈이가 예정됐기 때문이다. 사외이사를 뽑기도 어려운 데다 주총 관문을 넘기는 더욱 힘든 상황이어서 상장사에 ‘비상’이 걸렸다. 사외이사들이 한꺼번에 물갈이되면서 이사회에 공백이 생길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온다.
[마켓인사이트] 내년 '사외이사 대란'…718명 강제교체
내년 주주총회 혼란 예고

한국상장회사협의회는 내년 250곳 이상 상장사의 주총에서 상정 안건이 부결될 것이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 상장사 지분 구조와 주총 안건 의결 요건인 ‘출석 주주의 과반 찬성, 의결권 있는 주식의 25% 찬성’ 등을 고려해 추정한 수치다. 2018년 76곳, 올해 188곳의 상장사가 주총에서 안건 부결 사태를 겪었다. 내년엔 사태가 더욱 악화될 것이란 전망이다. 정족수 미달로 주총을 열지 못하는 것을 막기 위해 주주 의결권을 예탁결제원이 주총 참여 주주의 찬성과 반대 비율대로 대신 행사하도록 허용하는 섀도보팅 제도가 폐지된 영향이 크다.

이런 가운데 기업들은 내년 주총에서 사외이사와 사외이사인 감사위원을 대거 교체해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법무부가 연내 시행을 목표로 추진 중인 상법 시행령 개정안에 따라 566개 상장사가 최소 718명의 사외이사를 강제로 바꿔야 한다. 선임 불발이 속출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사외이사 전문성 약화”

사외이사의 인력풀이 제한돼 있다는 점도 문제다. 한 상장사 관계자는 “유예 기간도 없이 일률적으로 6년 재직연한에 맞춰 사외이사를 한꺼번에 바꾸는 건 무리”라며 “개정 의도와 달리 전문성이 떨어지는 사외이사가 대거 자리를 채울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사외이사의 독립성을 높이고 이사회 기능을 정상화해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장기 재직하고 있는 사외이사 교체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금융회사에 대해선 사외이사 재직기한 규정(해당회사 6년, 계열사 포함 9년)을 2016년부터 적용하고 있다.

기업들은 공공적 성격이 강한 금융회사와 일반 상장사를 똑같은 잣대로 규제하는 것은 과도하다며 반발하고 있다. 유환익 한국경제연구원 혁신성장실장은 “일반 기업은 자기자본을 운용해 이익을 실현하고 이를 주주들에게 배당한다”며 “고객의 자금을 운용하는 금융회사만큼 엄격한 자격요건을 강제하고 일률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기업 경영에 대한 지나친 간섭”이라고 주장했다.

이사 후보자 개인 정보 제공도 논란

이번 상법 개정안 중 이사·감사 후보자의 개인 정보를 의무적으로 공개하도록 한 규정도 논란을 낳고 있다. 사생활 침해, 직업선택의 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과 관련된 내용을 법률이 아닌, 시행령으로 규제하는 것은 위헌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개정안은 상장사들이 주총 소집 통보 때 이사와 감사 후보자의 세금 체납사실, 부실기업 경영진 해당 여부, 법령상 결격 사유 유무 등을 적고 후보자가 자필로 서명하도록 하는 내용도 담았다. 현행 후보자 직업과 약력만 간단히 서술하는 것보다 자격 검증이 강화된다.

정우용 한국상장사협의회 전무는 “사기업 임원 후보가 됐다는 이유로 공직자에 준하는 의무를 부과해 신상 정보를 공개토록 하는 건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사회 구성원의 자격 강화는 기업경영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안인 만큼 시행령이 아니라 국회에서 상위법을 통해 충분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상장사 사외이사 큰 장 선다”

상장사 이사에 대한 자격 규제 강화로 기업 이사회에 관료 출신 인사가 더욱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개정안에서 상장사 임직원으로 근무한 뒤 일정 기간 사외이사를 맡지 못하게 하는 냉각기간을 현행 2년에서 3년으로 확대한 데다 민간 기업 출신은 공직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인 정보를 공개하기 꺼리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상장사 사외이사 자리를 놓고 큰 장이 선다는 얘기가 나돈다”며 “업계 전문가보다 관료와 학계 출신 사외이사 비중이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수정 기자 agatha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