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한 금융사업 확장에 침몰한 '동양號'…투자자 4만명 1.6兆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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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본시장을 뒤흔든 사건
(32) 2013년 동양그룹 사태
파산위기 후 내실 다졌지만…
치명적인 오판의 연속
결국 법정관리 신청
(32) 2013년 동양그룹 사태
파산위기 후 내실 다졌지만…
치명적인 오판의 연속
결국 법정관리 신청
“사랑하는 딸들아! 이 무거운 십자가를 너희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 기도드린다.”
1971년 9월 23일 늦은 밤. 당시 55세 이양구 동양그룹 창업자의 일기장에 눈물이 떨어졌다. 동양시멘트의 ‘회사정리’(현 법정관리)를 신청하고 채권자들을 피해 잠적한 지 14일째, 지독한 고독에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29세에 함흥에서 38선을 넘어와 자전거 행상으로 출발했다. 전쟁통엔 부산 국제시장에서 설탕을 팔았다. 1956년 풍국제과(현 오리온)를 인수했을 땐 날 듯이 기뻤다. 이듬해엔 모두의 만류에도 삼척공장(현 동양시멘트)을 사들였다. 시멘트사업 개척의 꿈에 지샌 밤이 얼마였던가.
그러다 1969년 극심한 시멘트 공급 과잉으로 모든 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동양시멘트는 3년 연속 대규모 적자를 내고 있었다. 은행 돈줄이 막혀 손을 댄 사채(私債)는 어느덧 30억원(현재가치 약 560억원)으로 불어났다. 연 이자만 16억원, 전 재산을 다 정리한다 해도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2013년 ‘동양 사태’로 불리는 참사 발생 42년 전, 평행이론처럼 동양그룹에 닥쳤던 첫 번째 파산 위기였다.
기적적 회생과 승계
“제과사업까지 전부 팔아 갚겠습니다.”
잠시 극단적인 생각을 품었던 이 창업자는 두 딸의 얼굴을 떠올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기장 끄트머리엔 ‘이양구는 올해 이미 죽었으니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없다’고 썼다. 그러고는 채권자들을 찾아가 이자를 깎아달라고 사정했다. 집에 들이닥쳐 집기를 부수던 채권자도 ‘손실을 줄여보겠다’는 그의 결연한 눈빛을 거부하지 못했다.
마음을 비우고 회사를 팔러 동분서주하던 이듬해 여름, 기적이 일어났다. 1972년 8월 2일 박정희 대통령은 그날 밤 12시를 기해 ‘모든 사채를 동결한다’는 긴급 명령을 공포했다. 그룹의 목줄을 죄던 자금 압박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극적으로 살아난 동양그룹은 법정관리 신청 사실을 가슴에 새기고 내실을 다졌다. 시멘트 공장은 건설경기 회복에 힘입어 다시 힘차게 돌아갔다. 1974년 출시한 ‘초코파이’는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세월이 흘러 창업자가 73세 일기로 별세한 1989년, 동양은 재계 42위 그룹사로 우뚝 서 있었다.
슬하에 아들이 없던 이 창업자는 동양의 미래를 맏사위인 현재현 회장에게 맡겼다. 현 회장은 서울대 법대 3학년 때 사법시험(12회)에 합격해 검사로 일하던 수재였다. 가난 때문에 보통학교(초등학교)만 가까스로 마친 이 창업자는 그를 각별히 아꼈다. 1979년엔 그를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에 보냈다. 이곳에서 현 회장은 기존 사업과는 거리가 먼 분야에 심취한다. 1981년 취득한 그의 석사학위 전공은 국제금융이었다.
금융 중심 확장경영
‘동양호(號)’의 조타석에 앉은 현 회장은 허울뿐인 ‘부마(駙馬)’ 총수라는 편견에 맞서 과감한 사업구조 재편을 시도했다.
동양시멘트 사장 시절인 1984년 일국증권(동양증권) 인수를 지휘한 데 이어 1989년 동양베네디트생명보험(동양생명)을 설립했다. 1990년엔 단자회사인 대우투자금융(동양종합금융)을 인수했다. 1996년엔 자산운용사인 중앙투자신탁(동양오리온투자신탁)을 사들여 종합금융그룹의 진용을 완성했다.
금융부문 매출은 현 회장이 취임한 지 3년 만에 제조업을 뛰어넘으며 승승장구했다. 처제 이화경, 동서 담철곤 부부가 제과사업(오리온그룹)을 챙겨 그룹에서 빠져나간 2001년, 동양·오리온그룹은 재계 17위로 뛰어올랐다. 계열사는 30곳(금융계열사 9곳 포함)으로, 이 창업자가 작고한 해 7곳의 네 배에 달했다.
하지만 눈부신 성장의 이면에선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금융부문의 성장 연료를 대던 동양시멘트가 빚 부담에 휘청거렸기 때문이다. 2001년 개별 재무제표 기준 총차입금은 1조6000억원을 넘어섰다. 현 회장이 총수 자리를 넘겨받은 1989년(1900억원)의 여덟 배였다. 연간 이자비용은 외환위기 직후 금리 급등으로 2000억원으로 불어났다. 2001년에는 법인이 적자(순손실)로 돌아섰다. 그룹의 ‘대들보’가 무너지고 있었다. 치명적인 오판들
현 회장은 동양시멘트를 둘로 쪼개 시멘트사업의 빚 부담을 덜어주는 방법으로 돌파구를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훗날 동양사태의 중심인 (주)동양이 탄생한다.
그는 2002년 3월 동양시멘트를 존속회사인 (주)동양과 신설 자회사인 동양시멘트로 분할했다. 서류상 회사(페이퍼 컴퍼니)인 (주)동양은 그룹을 지배하는 회사로 계열사 지분 대부분을 보유했다. 빚도 절반을 웃도는 1조원어치를 떼왔다. 이자비용은 연간 1000억원 안팎이었다.
현 회장은 계열사 지분을 일부 팔고 배당금을 받으면 이자를 감당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현금 부족에 시달리자 달아오르는 건설 경기를 틈타 모험을 결심했다. 그룹의 레미콘사업을 (주)동양에 붙여(흡수합병) 고수익 사업지주회사로 탈바꿈한다는 전략이었다. 운명을 건 이 사업장 확대(2005년 28곳→2008년 47곳) 투자는 2007년 이후 건설경기 침체로 막대한 손실로 되돌아온다.
안절부절못하던 현 회장은 다시 3000억원의 빚을 동원한 ‘막판 뒤집기’ 도박에 뛰어든다. 글로벌 원자재 가격 폭등을 기회로 판단하고 2008년 5월 해외 자원개발 상장사인 골든오일을 인수했다. 훗날 몰락의 결정타로 평가받는 이 투자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반 년 만에 70%에 달하는 손실을 안긴다. (주)동양은 결국 2010년 자기자본을 모두 까먹고(완전자본잠식) 빚만 남은 부실 덩어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룹 채권을 팔아라’
현 회장은 그제야 자신이 1971년의 이양구 창업자와 같은 상황에 처했음을 깨달았다. 벼랑 끝에 몰린 그는 2010년 11월 계열사가 나눠 갖고 있던 동양생명 지분 47%를 9000억원에 매각하는 등 과감한 구조조정을 추진했지만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다. (주)동양 한 곳에서만 매년 1000억원씩 빠져나가는 이자비용은 순식간에 그룹의 현금창고를 거덜냈다. 추가적인 자산매각 계획도 내홍으로 번번이 미뤄졌다. 사세가 급격히 기울자 현 회장과 장모인 이관희 오리온재단 이사장, 아내인 이혜경 부회장 간에 사사건건 충돌이 빚어졌다.
금융권 대출이 완전히 끊긴 동양은 이때부터 고금리 회사채와 기업어음(CP) 발행을 대폭 늘려 연명하기 시작했다. 다른 계열사의 현금을 긁어올 온갖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았다. 건강했던 계열사마저 ‘좀비 기업’으로 변하자 그룹 채권 판매를 돕던 증권사들도 “더 이상 고객에게 부실 채권을 떠넘길 수 없다”며 떠나갔다. 동양그룹에 남은 자금조달 창구는 경영진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는 동양증권뿐이었다.
가빠지는 호흡
“측정 불가 규모의 피해가 우려됩니다.”
웅진그룹 계열사의 법정관리 신청 여파로 회사채 시장이 꽁꽁 얼어붙었던 2012년 10월 18일. 현 회장이 주재한 동양증권 이사회에서 섬뜩한 말이 오갔다.
동양 계열사에 오래 투자하길 겁내는 투자자가 늘면서 CP 만기는 갈수록 짧아지고 있었다. 금리는 연 8%를 넘어섰다. (주)동양을 비롯해 동양레저(골프장 운영업), 동양인터내셔널(무역업) 모두 매달 수차례 수백억원씩 CP를 찍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듬해인 2013년 봄 STX그룹마저 비틀거리자 금융당국은 ‘더 이상 동양그룹 부도 위험을 금융소비자에게 전가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곧이어 동양증권을 겨냥해 “10월부터 ‘증권사가 부실(투자부적격 등급) 계열사의 채권을 파는 일을 전면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동양그룹에 마지막 호흡기를 떼라는 메시지였다.
새 규정 시행을 하루 앞둔 2013년 9월 30일 오전 9시. 동양·동양레저·동양인터내셔널 3개사는 동시에 법정관리 신청을 공시했다. 10월 1일에는 “우린 걱정말라”던 동양시멘트와 동양네트웍스(시스템통합업)도 뒤따랐다. 법정관리 신청 당일에도 동양시멘트 채권을 팔던 동양증권 직원들은 청천벽력 같은 속보에 귀를 의심했다. 제주지점의 한 직원은 10월 2일 ‘제 고객님들 돈을 꼭 상환해주십시오’라는 내용을 담은 유서를 남긴 채 차 안에서 번개탄에 불을 붙였다.
42년 만의 법정관리
과거 동양그룹을 침몰에서 구해낸 ‘사채동결 조치’와 같은 기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2013년 11월 금융감독원은 동양증권을 통해 동양그룹 CP와 회사채를 매입한 개인투자자가 약 4만1000명, 피해금액은 1조6000억원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2011년 저축은행 후순위채 사태를 능가하는 개인(공모) 금융상품 사상 최대 피해였다.
동양그룹 계열사는 법정관리를 거쳐 뿔뿔이 흩어졌다. 동양시멘트는 영욕의 58년 역사를 뒤로하고 2015년 간판을 삼표시멘트로 바꿔 달았다. 같은 해 대법원은 ‘부도를 예견하고도 채권을 발행했다’며 현 회장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
1971년 9월 23일 늦은 밤. 당시 55세 이양구 동양그룹 창업자의 일기장에 눈물이 떨어졌다. 동양시멘트의 ‘회사정리’(현 법정관리)를 신청하고 채권자들을 피해 잠적한 지 14일째, 지독한 고독에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29세에 함흥에서 38선을 넘어와 자전거 행상으로 출발했다. 전쟁통엔 부산 국제시장에서 설탕을 팔았다. 1956년 풍국제과(현 오리온)를 인수했을 땐 날 듯이 기뻤다. 이듬해엔 모두의 만류에도 삼척공장(현 동양시멘트)을 사들였다. 시멘트사업 개척의 꿈에 지샌 밤이 얼마였던가.
그러다 1969년 극심한 시멘트 공급 과잉으로 모든 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동양시멘트는 3년 연속 대규모 적자를 내고 있었다. 은행 돈줄이 막혀 손을 댄 사채(私債)는 어느덧 30억원(현재가치 약 560억원)으로 불어났다. 연 이자만 16억원, 전 재산을 다 정리한다 해도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2013년 ‘동양 사태’로 불리는 참사 발생 42년 전, 평행이론처럼 동양그룹에 닥쳤던 첫 번째 파산 위기였다.
기적적 회생과 승계
“제과사업까지 전부 팔아 갚겠습니다.”
잠시 극단적인 생각을 품었던 이 창업자는 두 딸의 얼굴을 떠올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기장 끄트머리엔 ‘이양구는 올해 이미 죽었으니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없다’고 썼다. 그러고는 채권자들을 찾아가 이자를 깎아달라고 사정했다. 집에 들이닥쳐 집기를 부수던 채권자도 ‘손실을 줄여보겠다’는 그의 결연한 눈빛을 거부하지 못했다.
마음을 비우고 회사를 팔러 동분서주하던 이듬해 여름, 기적이 일어났다. 1972년 8월 2일 박정희 대통령은 그날 밤 12시를 기해 ‘모든 사채를 동결한다’는 긴급 명령을 공포했다. 그룹의 목줄을 죄던 자금 압박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극적으로 살아난 동양그룹은 법정관리 신청 사실을 가슴에 새기고 내실을 다졌다. 시멘트 공장은 건설경기 회복에 힘입어 다시 힘차게 돌아갔다. 1974년 출시한 ‘초코파이’는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세월이 흘러 창업자가 73세 일기로 별세한 1989년, 동양은 재계 42위 그룹사로 우뚝 서 있었다.
슬하에 아들이 없던 이 창업자는 동양의 미래를 맏사위인 현재현 회장에게 맡겼다. 현 회장은 서울대 법대 3학년 때 사법시험(12회)에 합격해 검사로 일하던 수재였다. 가난 때문에 보통학교(초등학교)만 가까스로 마친 이 창업자는 그를 각별히 아꼈다. 1979년엔 그를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에 보냈다. 이곳에서 현 회장은 기존 사업과는 거리가 먼 분야에 심취한다. 1981년 취득한 그의 석사학위 전공은 국제금융이었다.
금융 중심 확장경영
‘동양호(號)’의 조타석에 앉은 현 회장은 허울뿐인 ‘부마(駙馬)’ 총수라는 편견에 맞서 과감한 사업구조 재편을 시도했다.
동양시멘트 사장 시절인 1984년 일국증권(동양증권) 인수를 지휘한 데 이어 1989년 동양베네디트생명보험(동양생명)을 설립했다. 1990년엔 단자회사인 대우투자금융(동양종합금융)을 인수했다. 1996년엔 자산운용사인 중앙투자신탁(동양오리온투자신탁)을 사들여 종합금융그룹의 진용을 완성했다.
금융부문 매출은 현 회장이 취임한 지 3년 만에 제조업을 뛰어넘으며 승승장구했다. 처제 이화경, 동서 담철곤 부부가 제과사업(오리온그룹)을 챙겨 그룹에서 빠져나간 2001년, 동양·오리온그룹은 재계 17위로 뛰어올랐다. 계열사는 30곳(금융계열사 9곳 포함)으로, 이 창업자가 작고한 해 7곳의 네 배에 달했다.
하지만 눈부신 성장의 이면에선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금융부문의 성장 연료를 대던 동양시멘트가 빚 부담에 휘청거렸기 때문이다. 2001년 개별 재무제표 기준 총차입금은 1조6000억원을 넘어섰다. 현 회장이 총수 자리를 넘겨받은 1989년(1900억원)의 여덟 배였다. 연간 이자비용은 외환위기 직후 금리 급등으로 2000억원으로 불어났다. 2001년에는 법인이 적자(순손실)로 돌아섰다. 그룹의 ‘대들보’가 무너지고 있었다. 치명적인 오판들
현 회장은 동양시멘트를 둘로 쪼개 시멘트사업의 빚 부담을 덜어주는 방법으로 돌파구를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훗날 동양사태의 중심인 (주)동양이 탄생한다.
그는 2002년 3월 동양시멘트를 존속회사인 (주)동양과 신설 자회사인 동양시멘트로 분할했다. 서류상 회사(페이퍼 컴퍼니)인 (주)동양은 그룹을 지배하는 회사로 계열사 지분 대부분을 보유했다. 빚도 절반을 웃도는 1조원어치를 떼왔다. 이자비용은 연간 1000억원 안팎이었다.
현 회장은 계열사 지분을 일부 팔고 배당금을 받으면 이자를 감당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현금 부족에 시달리자 달아오르는 건설 경기를 틈타 모험을 결심했다. 그룹의 레미콘사업을 (주)동양에 붙여(흡수합병) 고수익 사업지주회사로 탈바꿈한다는 전략이었다. 운명을 건 이 사업장 확대(2005년 28곳→2008년 47곳) 투자는 2007년 이후 건설경기 침체로 막대한 손실로 되돌아온다.
안절부절못하던 현 회장은 다시 3000억원의 빚을 동원한 ‘막판 뒤집기’ 도박에 뛰어든다. 글로벌 원자재 가격 폭등을 기회로 판단하고 2008년 5월 해외 자원개발 상장사인 골든오일을 인수했다. 훗날 몰락의 결정타로 평가받는 이 투자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반 년 만에 70%에 달하는 손실을 안긴다. (주)동양은 결국 2010년 자기자본을 모두 까먹고(완전자본잠식) 빚만 남은 부실 덩어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룹 채권을 팔아라’
현 회장은 그제야 자신이 1971년의 이양구 창업자와 같은 상황에 처했음을 깨달았다. 벼랑 끝에 몰린 그는 2010년 11월 계열사가 나눠 갖고 있던 동양생명 지분 47%를 9000억원에 매각하는 등 과감한 구조조정을 추진했지만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다. (주)동양 한 곳에서만 매년 1000억원씩 빠져나가는 이자비용은 순식간에 그룹의 현금창고를 거덜냈다. 추가적인 자산매각 계획도 내홍으로 번번이 미뤄졌다. 사세가 급격히 기울자 현 회장과 장모인 이관희 오리온재단 이사장, 아내인 이혜경 부회장 간에 사사건건 충돌이 빚어졌다.
금융권 대출이 완전히 끊긴 동양은 이때부터 고금리 회사채와 기업어음(CP) 발행을 대폭 늘려 연명하기 시작했다. 다른 계열사의 현금을 긁어올 온갖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았다. 건강했던 계열사마저 ‘좀비 기업’으로 변하자 그룹 채권 판매를 돕던 증권사들도 “더 이상 고객에게 부실 채권을 떠넘길 수 없다”며 떠나갔다. 동양그룹에 남은 자금조달 창구는 경영진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는 동양증권뿐이었다.
가빠지는 호흡
“측정 불가 규모의 피해가 우려됩니다.”
웅진그룹 계열사의 법정관리 신청 여파로 회사채 시장이 꽁꽁 얼어붙었던 2012년 10월 18일. 현 회장이 주재한 동양증권 이사회에서 섬뜩한 말이 오갔다.
동양 계열사에 오래 투자하길 겁내는 투자자가 늘면서 CP 만기는 갈수록 짧아지고 있었다. 금리는 연 8%를 넘어섰다. (주)동양을 비롯해 동양레저(골프장 운영업), 동양인터내셔널(무역업) 모두 매달 수차례 수백억원씩 CP를 찍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듬해인 2013년 봄 STX그룹마저 비틀거리자 금융당국은 ‘더 이상 동양그룹 부도 위험을 금융소비자에게 전가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곧이어 동양증권을 겨냥해 “10월부터 ‘증권사가 부실(투자부적격 등급) 계열사의 채권을 파는 일을 전면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동양그룹에 마지막 호흡기를 떼라는 메시지였다.
새 규정 시행을 하루 앞둔 2013년 9월 30일 오전 9시. 동양·동양레저·동양인터내셔널 3개사는 동시에 법정관리 신청을 공시했다. 10월 1일에는 “우린 걱정말라”던 동양시멘트와 동양네트웍스(시스템통합업)도 뒤따랐다. 법정관리 신청 당일에도 동양시멘트 채권을 팔던 동양증권 직원들은 청천벽력 같은 속보에 귀를 의심했다. 제주지점의 한 직원은 10월 2일 ‘제 고객님들 돈을 꼭 상환해주십시오’라는 내용을 담은 유서를 남긴 채 차 안에서 번개탄에 불을 붙였다.
42년 만의 법정관리
과거 동양그룹을 침몰에서 구해낸 ‘사채동결 조치’와 같은 기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2013년 11월 금융감독원은 동양증권을 통해 동양그룹 CP와 회사채를 매입한 개인투자자가 약 4만1000명, 피해금액은 1조6000억원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2011년 저축은행 후순위채 사태를 능가하는 개인(공모) 금융상품 사상 최대 피해였다.
동양그룹 계열사는 법정관리를 거쳐 뿔뿔이 흩어졌다. 동양시멘트는 영욕의 58년 역사를 뒤로하고 2015년 간판을 삼표시멘트로 바꿔 달았다. 같은 해 대법원은 ‘부도를 예견하고도 채권을 발행했다’며 현 회장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