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인물] 한글학자 정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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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문화의 가교 한경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인 정태진 선생은 1903년 경기 파주에서 태어났다. 1925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함흥에 있는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와 조선어를 가르쳤다. 1927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우스터대에서 철학, 컬럼비아대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1931년 영생여학교 교사로 복귀, 우리 고전 소개를 통해 민족의식 함양에 노력했다.
조선총독부는 1938년 ‘조선교육령’을 발표하고 각급 학교에서 조선어 수업을 금지시켰다. 그는 조선어학회 사전 편찬 전임위원으로 활동하던 정인승 선생으로부터 같이 일하자는 권유를 받고 새 힘을 얻었다. 1941년부터 사전 편찬 사업에 본격 참여했다. 일제는 1942년 조선어학회 주요 인사들을 대거 체포했다. 사전 편찬은 중단되고 조선어학회는 강제 해산됐다. 정태진 선생도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해방 이후 그는 동료들과 조선어학회를 재건하고 <조선말 큰사전> 편찬에 다시 집중했다. 하지만 1952년 11월 2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50세를 일기로 눈을 감아야 했다. 주요 저서로는 <한자 안쓰기 문제> <중등국어독본> <조선고어방언사전> 등이 있다. 정부는 1962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장현주 기자 blacksea@hankyung.com
조선총독부는 1938년 ‘조선교육령’을 발표하고 각급 학교에서 조선어 수업을 금지시켰다. 그는 조선어학회 사전 편찬 전임위원으로 활동하던 정인승 선생으로부터 같이 일하자는 권유를 받고 새 힘을 얻었다. 1941년부터 사전 편찬 사업에 본격 참여했다. 일제는 1942년 조선어학회 주요 인사들을 대거 체포했다. 사전 편찬은 중단되고 조선어학회는 강제 해산됐다. 정태진 선생도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해방 이후 그는 동료들과 조선어학회를 재건하고 <조선말 큰사전> 편찬에 다시 집중했다. 하지만 1952년 11월 2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50세를 일기로 눈을 감아야 했다. 주요 저서로는 <한자 안쓰기 문제> <중등국어독본> <조선고어방언사전> 등이 있다. 정부는 1962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장현주 기자 blackse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