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명저] "집착하는 자 망하고, 경청하는 자 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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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향 <전국책>
“험난한 시대를 헤쳐 나갈 지략을 담은 ‘인간학의 보고(寶庫)’.”(대만의 인문학 선구자 양자오)
중국 전한(前漢, BC 206~AD 8) 말기 학자인 유향(劉向)이 편찬한 <전국책(戰國策)>은 ‘인간학의 교과서’로 불린다. <전국책>은 ‘싸우는 나라들의 책략(策略)’이라는 뜻이다. 공자가 편찬한 역사서 <춘추(春秋)>에서 ‘춘추시대’라는 명칭이 유래했듯이 유향의 <전국책>에서 ‘전국시대’의 이름이 나왔다.
시기적으로는 중국 춘추시대(BC 770~BC 403) 후반기인 기원전 453년부터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중원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다. 당시 춘추시대 최강국인 진(晉)에서 쪼개져 나온 한(韓)·위(魏)·조(趙) 등 3개 신흥국과 진(秦)·초(楚)·연(燕)·제(齊) 등 기존 4개 패권국 등 ‘전국 7웅(七雄)’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난세의 지상목표는 '부국강병'
<전국책>의 주 무대인 전국시대(BC 403~BC 221)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전란이 이어진 격변기였다. <전국책>은 칼과 칼이, 창과 창이 맞부딪치는 난세에서 기묘한 계책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꾼 수많은 책략가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개인과 나라의 생존전략뿐 아니라 다양한 삶의 지혜와 교훈을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후대 역사에서 언급되는 위인들의 일화와 고사성어의 상당수가 이 책에서 비롯됐다.
진시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자객 형가(荊軻)와 합종연횡책(合從連衡策)으로 유명한 소진(蘇秦)·장의(張儀) 이야기의 출처도 <전국책>이다. 합종책은 진나라를 제외한 6개국이 연합해 진의 팽창을 저지해야 한다는 전략이고, 연횡책은 나라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각국이 강대국인 진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전략이다.
식객들이 닭 울음소리와 좀도둑질로 주군인 맹상군을 위기에서 구했다는 ‘계명구도(鷄鳴狗盜)’, 자기가 스스로 천거함을 일컫는 ‘모수자천(毛遂自薦)’,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순망치한(脣亡齒寒)’ 등의 고사성어도 이 책에서 나왔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 양쪽이 싸우는데 엉뚱한 제3자가 이득을 챙기는 ‘어부지리(漁夫之利)’도 <전국책>의 내용이다. 먼 나라와 화친하고, 가까운 나라는 공격한다는 ‘원교근공(遠交近攻)’은 <전국책>에 소개된 외교 전략이다.
숱한 책략가들과 이들을 중용한 군주들의 지상 목표는 한결같이 ‘부국강병’이었다. 하지만 모든 나라들이 이를 이루지는 못했다. <전국책>은 중원 패권이 ‘위(魏)→제(齊)→진(秦)’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언급하며 그 배경과 원인을 자세히 설명했다. 인재를 알아보고 이들의 조언에 귀 기울이는 군주의 능력과 경청이 패권 향방을 갈랐다는 것이다.
전국시대 처음으로 패권을 잡은 군주는 위나라의 문후(文侯)였다. 50년의 재위기간(BC 446~BC 396) 개혁가인 이극(李克)과 서문표(西門豹), 병법가 오기(吳起)를 중용해 위나라의 전성기를 일궈냈다. 자신의 체면이나 선입견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들의 건의를 폭넓게 받아들였다. 능력을 중시하는 인사정책과 법치에 기반을 둔 상벌책도 굳건히 지켰다. 선심성 정책과 과시적인 행사를 없애 나라의 내실을 다졌다.
위 문후에 이어 제나라 위왕(威王)이 중원의 패권을 잡았다. 위왕은 한때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아 ‘불통왕(不通王)’이란 오명을 들었지만 재상 추기(鄒忌)를 만난 이후 확 변했다. 위왕은 추기의 간언을 받아들여 백성들이 왕에게 바른말을 하면 상을 주겠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왕의 잘못을 지적해 상을 받게 되면 백성들이 몰리면서 성문이 흡사 시장처럼 붐볐다고 한다. 고사성어인 ‘문전성시(門前成市)’의 원래 말인 ‘문정약시(門庭若市)’는 위왕의 소통 정치를 나타내는 표현이 됐다.
'소통'과 '불통'이 가른 국가의 흥망
진나라 군주들은 소통과 인재 영입에 적극적이었다. 중국 외곽인 서북부 산시성이 근거지였던 진나라는 인재에 늘 목이 말랐기 때문에 지역과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불러모았다. 이들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하고, 이들이 건의하는 각종 시책을 받아들였다. 주요 관직을 차지한 사람들은 대부분 타국 출신이었다. 효공(孝公)이 위나라 군주의 서자인 법가사상가 상앙을 중용해 진의 천하통일 기틀을 닦은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유향은 나라의 흥망을 군주의 ‘소통’과 ‘불통’에서 찾았다. 한때 패권을 거머쥐었던 위나라와 제나라의 몰락은 과거의 영광에 갇힌 후임 군주들이 자만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과거와 관습에 집착해 자만해진 군주와 나라는 기울고, 백성·신하들과 소통하며 이들의 말에 경청하는 군주와 나라는 흥한다”는 게 유향이 내린 결론이다.
2000여 년이 지났지만 <전국책>은 지금도 동양 지식인들 사이에서 꾸준히 읽히고 있다. 급변하는 대내외 환경 속에서 개인과 국가의 생존을 담보하고 힘을 키워나가는 데 이만한 실전 교과서가 드물기 때문이다. “음모와 권모술수가 판치지만 주변과 끊임없이 소통해 자신의 능력을 키우려는 자세야말로 최고의 문제 해결 방법이라는 교훈은 <전국책>이 변함없이 전하는 교훈이다.”(대만의 역사평론가 천저밍)
김태철 논설위원 synergy@hankyung.com
중국 전한(前漢, BC 206~AD 8) 말기 학자인 유향(劉向)이 편찬한 <전국책(戰國策)>은 ‘인간학의 교과서’로 불린다. <전국책>은 ‘싸우는 나라들의 책략(策略)’이라는 뜻이다. 공자가 편찬한 역사서 <춘추(春秋)>에서 ‘춘추시대’라는 명칭이 유래했듯이 유향의 <전국책>에서 ‘전국시대’의 이름이 나왔다.
시기적으로는 중국 춘추시대(BC 770~BC 403) 후반기인 기원전 453년부터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중원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다. 당시 춘추시대 최강국인 진(晉)에서 쪼개져 나온 한(韓)·위(魏)·조(趙) 등 3개 신흥국과 진(秦)·초(楚)·연(燕)·제(齊) 등 기존 4개 패권국 등 ‘전국 7웅(七雄)’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난세의 지상목표는 '부국강병'
<전국책>의 주 무대인 전국시대(BC 403~BC 221)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전란이 이어진 격변기였다. <전국책>은 칼과 칼이, 창과 창이 맞부딪치는 난세에서 기묘한 계책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꾼 수많은 책략가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개인과 나라의 생존전략뿐 아니라 다양한 삶의 지혜와 교훈을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후대 역사에서 언급되는 위인들의 일화와 고사성어의 상당수가 이 책에서 비롯됐다.
진시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자객 형가(荊軻)와 합종연횡책(合從連衡策)으로 유명한 소진(蘇秦)·장의(張儀) 이야기의 출처도 <전국책>이다. 합종책은 진나라를 제외한 6개국이 연합해 진의 팽창을 저지해야 한다는 전략이고, 연횡책은 나라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각국이 강대국인 진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전략이다.
식객들이 닭 울음소리와 좀도둑질로 주군인 맹상군을 위기에서 구했다는 ‘계명구도(鷄鳴狗盜)’, 자기가 스스로 천거함을 일컫는 ‘모수자천(毛遂自薦)’,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순망치한(脣亡齒寒)’ 등의 고사성어도 이 책에서 나왔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 양쪽이 싸우는데 엉뚱한 제3자가 이득을 챙기는 ‘어부지리(漁夫之利)’도 <전국책>의 내용이다. 먼 나라와 화친하고, 가까운 나라는 공격한다는 ‘원교근공(遠交近攻)’은 <전국책>에 소개된 외교 전략이다.
숱한 책략가들과 이들을 중용한 군주들의 지상 목표는 한결같이 ‘부국강병’이었다. 하지만 모든 나라들이 이를 이루지는 못했다. <전국책>은 중원 패권이 ‘위(魏)→제(齊)→진(秦)’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언급하며 그 배경과 원인을 자세히 설명했다. 인재를 알아보고 이들의 조언에 귀 기울이는 군주의 능력과 경청이 패권 향방을 갈랐다는 것이다.
전국시대 처음으로 패권을 잡은 군주는 위나라의 문후(文侯)였다. 50년의 재위기간(BC 446~BC 396) 개혁가인 이극(李克)과 서문표(西門豹), 병법가 오기(吳起)를 중용해 위나라의 전성기를 일궈냈다. 자신의 체면이나 선입견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들의 건의를 폭넓게 받아들였다. 능력을 중시하는 인사정책과 법치에 기반을 둔 상벌책도 굳건히 지켰다. 선심성 정책과 과시적인 행사를 없애 나라의 내실을 다졌다.
위 문후에 이어 제나라 위왕(威王)이 중원의 패권을 잡았다. 위왕은 한때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아 ‘불통왕(不通王)’이란 오명을 들었지만 재상 추기(鄒忌)를 만난 이후 확 변했다. 위왕은 추기의 간언을 받아들여 백성들이 왕에게 바른말을 하면 상을 주겠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왕의 잘못을 지적해 상을 받게 되면 백성들이 몰리면서 성문이 흡사 시장처럼 붐볐다고 한다. 고사성어인 ‘문전성시(門前成市)’의 원래 말인 ‘문정약시(門庭若市)’는 위왕의 소통 정치를 나타내는 표현이 됐다.
'소통'과 '불통'이 가른 국가의 흥망
진나라 군주들은 소통과 인재 영입에 적극적이었다. 중국 외곽인 서북부 산시성이 근거지였던 진나라는 인재에 늘 목이 말랐기 때문에 지역과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불러모았다. 이들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하고, 이들이 건의하는 각종 시책을 받아들였다. 주요 관직을 차지한 사람들은 대부분 타국 출신이었다. 효공(孝公)이 위나라 군주의 서자인 법가사상가 상앙을 중용해 진의 천하통일 기틀을 닦은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유향은 나라의 흥망을 군주의 ‘소통’과 ‘불통’에서 찾았다. 한때 패권을 거머쥐었던 위나라와 제나라의 몰락은 과거의 영광에 갇힌 후임 군주들이 자만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과거와 관습에 집착해 자만해진 군주와 나라는 기울고, 백성·신하들과 소통하며 이들의 말에 경청하는 군주와 나라는 흥한다”는 게 유향이 내린 결론이다.
2000여 년이 지났지만 <전국책>은 지금도 동양 지식인들 사이에서 꾸준히 읽히고 있다. 급변하는 대내외 환경 속에서 개인과 국가의 생존을 담보하고 힘을 키워나가는 데 이만한 실전 교과서가 드물기 때문이다. “음모와 권모술수가 판치지만 주변과 끊임없이 소통해 자신의 능력을 키우려는 자세야말로 최고의 문제 해결 방법이라는 교훈은 <전국책>이 변함없이 전하는 교훈이다.”(대만의 역사평론가 천저밍)
김태철 논설위원 synerg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