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기업 키웠더니"…중견기업 되는 순간, 100개 넘는 규제 쏟아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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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성장 사다리'가 끊어졌다
(2) 기업 성장 가로막는 정부 정책
(2) 기업 성장 가로막는 정부 정책
발전기 부품을 제조하는 중견기업 BHI. 중소기업 시절 정부로부터 연구개발(R&D) 자금을 지원받아 원자력발전소에 들어가는 부품 등을 개발하면서 성장해왔다. 하지만 납품 기한이 다가올 즈음 기업 규모가 커져 중견기업으로 편입됐다. 외형이 커진 대가는 혹독했다. 공공조달시장에서 내쫓겼다. 한국에서 중견기업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서 존재감이 없는, 그야말로 ‘넛크래커(끼인 존재)’ 신세다. 상당수 중견기업이 인력 조정, 기업 분할 등과 같은 ‘꼼수’를 써서라도 중소기업으로 남아 있길 원하는 이유다. 한 중견기업 대표는 “이제 막 중소기업을 벗어났는데 ‘중견’이란 이름을 다는 순간 100개가 넘는 규제가 기다린다”며 “기업을 키운 대가가 참으로 혹독하다”고 하소연했다.
“성장 이어가도록 도와달라”
중견기업을 둘러싼 성장 걸림돌은 수출·세제·판로·R&D·금융·공정거래·상법·환경 등의 분야에서 100여 개에 달한다. 세금을 공제해주는 조세특례제한법의 경우 중소기업은 100% 적용받지만 중견기업은 매출 3000억원 미만 등 구간별로 차등 적용된다. 자금 지원도 마찬가지다.
중소벤처기업부의 연간 R&D 자금은 1조원을 웃돌지만 산업통상자원부가 중견기업에 지원하는 금액은 중소기업의 10분의 1 수준이다. 벤처기업 인수 때 대기업은 7년간 편입을 유예받는데 중견기업은 이 시한이 3년으로 단축된다. 일선 기업 현장에선 대기업보다 더 엄격한 잣대가 요구된다고 불만을 제기한다.
정부는 중견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중견기업 성장 촉진 및 경쟁력 강화에 관한 특별법’을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들은 많은 제도가 특별법과 배치돼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항변한다.
업계는 “중소기업처럼 ‘보호 장벽’을 쳐달라는 게 아니다”며 “성장을 이어가고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규제만이라도 줄여달라”고 강변한다.
이동기 서울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매출 등 기업 외형을 기준으로 규제와 지원 대상을 정하는 게 효과적인지 재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후진적인 경제 생태계 고착
중견기업들은 덩치가 커졌다는 이유로 판로를 잃는다. 중소기업 아니면 대기업으로 간주하는 이분법적 법제, 고질적인 인력난 등도 중견기업의 경영난을 가중시키는 요인이다.
정부와 공공기관에 납품하는 공공조달시장에선 상당수 중견기업이 참여를 제한받아 중소기업과 갈등을 빚는다. 샘표식품은 장류가 중소기업적합업종으로 지정되자 군부대와 공공기관에 납품할 수 없게 됐다. 오랜 기간 한 분야에서 성장한 전문 중견기업이 사업 철수, 축소 등의 압박을 받아야 하는 현실이다. 소비자 입장에선 제품과 서비스 선택권을 제한받는 ‘독소조항’이란 지적이 많다.
업계에선 미국 등의 사례처럼 상생과 제품·서비스 경쟁력 향상을 위해 중견기업의 참여를 일부 허용하는 ‘쿼터제’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중소기업계의 거센 반발을 우려해 ‘꿈쩍’하지 않고 있다.
아스콘 골재 등을 생산하는 한 중견기업은 아스콘이 ‘중소기업 간 경쟁제품’으로 지정되면서 공공조달시장 참여 자체가 막혔다. 업종 특성상 해외에 진출하거나 민간시장에 새로 진출하기 어렵다. 결국 지분을 조정해 기업을 쪼개고 중소기업으로 유턴했다.
업계는 중소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시행하는 중기 간 경쟁제품 지정제도가 공공조달시장에서 일부 중소기업의 독점 체제를 공고히 한다고 우려한다. 내수시장에서 큰 중견기업이 성장동력을 잃어버려 중소기업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 같은 제도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주장도 나왔다. 중견기업연구원이 공공조달 수요의 80%를 중소기업에만 할당한다고 가정해 시뮬레이션한 결과 국내총생산(GDP)과 투자, 수출이 각각 0.17%, 0.05%, 0.07%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질적인 구인난으로 시름
인력난과 사회적 편견은 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또 다른 요소다. 대기업보다 회사 인지도가 낮은 데다 제조업 특성상 B2B(기업 간 거래) 업종이 많아 고질적인 구인난을 겪고 있다. 중견기업의 40%가 지방에 있어 상황은 더 심각하다. 인력 문제를 기업 경영의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은 중견기업이 전체의 7.9%였다.
한 중견기업 대표는 “세계 1위를 하는 중견기업이라도 국내에선 구인난으로 골머리를 앓는다”며 “사회적으로 중견기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중견기업이 대기업만큼 기회와 커리어를 제공하는 것을 모르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정은 기자 likesmile@hankyung.com
중견기업을 둘러싼 성장 걸림돌은 수출·세제·판로·R&D·금융·공정거래·상법·환경 등의 분야에서 100여 개에 달한다. 세금을 공제해주는 조세특례제한법의 경우 중소기업은 100% 적용받지만 중견기업은 매출 3000억원 미만 등 구간별로 차등 적용된다. 자금 지원도 마찬가지다.
중소벤처기업부의 연간 R&D 자금은 1조원을 웃돌지만 산업통상자원부가 중견기업에 지원하는 금액은 중소기업의 10분의 1 수준이다. 벤처기업 인수 때 대기업은 7년간 편입을 유예받는데 중견기업은 이 시한이 3년으로 단축된다. 일선 기업 현장에선 대기업보다 더 엄격한 잣대가 요구된다고 불만을 제기한다.
정부는 중견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중견기업 성장 촉진 및 경쟁력 강화에 관한 특별법’을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들은 많은 제도가 특별법과 배치돼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항변한다.
업계는 “중소기업처럼 ‘보호 장벽’을 쳐달라는 게 아니다”며 “성장을 이어가고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규제만이라도 줄여달라”고 강변한다.
이동기 서울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매출 등 기업 외형을 기준으로 규제와 지원 대상을 정하는 게 효과적인지 재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후진적인 경제 생태계 고착
중견기업들은 덩치가 커졌다는 이유로 판로를 잃는다. 중소기업 아니면 대기업으로 간주하는 이분법적 법제, 고질적인 인력난 등도 중견기업의 경영난을 가중시키는 요인이다.
정부와 공공기관에 납품하는 공공조달시장에선 상당수 중견기업이 참여를 제한받아 중소기업과 갈등을 빚는다. 샘표식품은 장류가 중소기업적합업종으로 지정되자 군부대와 공공기관에 납품할 수 없게 됐다. 오랜 기간 한 분야에서 성장한 전문 중견기업이 사업 철수, 축소 등의 압박을 받아야 하는 현실이다. 소비자 입장에선 제품과 서비스 선택권을 제한받는 ‘독소조항’이란 지적이 많다.
업계에선 미국 등의 사례처럼 상생과 제품·서비스 경쟁력 향상을 위해 중견기업의 참여를 일부 허용하는 ‘쿼터제’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중소기업계의 거센 반발을 우려해 ‘꿈쩍’하지 않고 있다.
아스콘 골재 등을 생산하는 한 중견기업은 아스콘이 ‘중소기업 간 경쟁제품’으로 지정되면서 공공조달시장 참여 자체가 막혔다. 업종 특성상 해외에 진출하거나 민간시장에 새로 진출하기 어렵다. 결국 지분을 조정해 기업을 쪼개고 중소기업으로 유턴했다.
업계는 중소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시행하는 중기 간 경쟁제품 지정제도가 공공조달시장에서 일부 중소기업의 독점 체제를 공고히 한다고 우려한다. 내수시장에서 큰 중견기업이 성장동력을 잃어버려 중소기업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 같은 제도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주장도 나왔다. 중견기업연구원이 공공조달 수요의 80%를 중소기업에만 할당한다고 가정해 시뮬레이션한 결과 국내총생산(GDP)과 투자, 수출이 각각 0.17%, 0.05%, 0.07%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질적인 구인난으로 시름
인력난과 사회적 편견은 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또 다른 요소다. 대기업보다 회사 인지도가 낮은 데다 제조업 특성상 B2B(기업 간 거래) 업종이 많아 고질적인 구인난을 겪고 있다. 중견기업의 40%가 지방에 있어 상황은 더 심각하다. 인력 문제를 기업 경영의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은 중견기업이 전체의 7.9%였다.
한 중견기업 대표는 “세계 1위를 하는 중견기업이라도 국내에선 구인난으로 골머리를 앓는다”며 “사회적으로 중견기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중견기업이 대기업만큼 기회와 커리어를 제공하는 것을 모르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정은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