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만세는 일왕숭배·군국주의 추진 방책이었다'
지난 9일 왕궁앞 광장에서 열린 나루히토(德仁) 일왕의 즉위 축하행사(국민제전)때 일왕부부가 행사장을 떠난 후에도 왕을 향한 만세가 여러 차례 이어진 것을 놓고 SNS에서 설전이 벌어지고 있다.
12일 아사히(朝日)신문에 따르면 3만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열린 이날 행사에서는 일왕부부가 현장을 떠난 후에도 만세삼창이 최소한 16번이나 계속돼 적게 잡아도 '만세 48창'이 이뤄졌다.
이부키 분메이(伊吹文明) 전 중의원 의장이 '세계평화를 기원하며'라는 설명과 함께 선창하자 참가자들이 일제히 만세를 따라 불렀다.
인기 아이돌 그룹 '아라시(嵐)' 멤버 5명도 양손을 치켜들고 만세를 불렀다.
이후에도 주최 측의 선창으로 '양 폐하만세', '일왕만세'의 함성이 계속 이어졌다. 이 행사는 TV로 생중계됐다.
그러자 SNS에 관련 투고가 줄을 이었다.
'끝없는 만세가 무섭다'거나 '집요하다', 젊은 병사가 일왕만세를 외치며 죽어간 2차대전을 언급하며 '섬뜩한 느낌밖에 들지 않는다'는 비판도 많았다.
반면 '경의와 축하의 뜻을 전하는거니 좋지 않으냐'거나 '일체감을 느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의견도 나왔다.
축하행사는 이부키 전 중의원 의장이 회장을 맡고 있는 '봉축의원연맹'과 게이단렌(經團連) 등 민간단체로 구성된 '봉축위원회'가 주최했다.
위원회에는 개헌을 목표로 내걸고 있는 보수계단체 '일본회의'도 참가했다.
홍보담당자는 만세는 "축하하는 자연스러운 마음"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왕 부부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실제로 있었는지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초대 진무(神武天皇) 일왕 '즉위' 이후 2천600년 이상의 역사가 있었던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설명과 현존하는 일본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고지키(古事記)에 나오는 일본건국신화가 소개되기도 했다.
행사의 마지막을 장식한게 '만세'였다.
만세의 역사는 메이지(明治) 22년(1889년) 대일본제국헌법 공포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메이지 왕의 마차를 향해 만세를 부른게 처음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총리를 지낸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礼次郎)가 저술한 '메이지·다이쇼(大正)·쇼와(昭和) 정계비사-고풍암회고록-'에 따르면 이때까지는 일왕을 환호하는 단어가 없어 공손하게 인사만 했으나 존경과 친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대학교수 등이 고안해낸 단어가 '만세'였다고 한다.
지난달 22일 나루히토 왕의 즉위를 대내외에 알리는 의식인 '소쿠이레이세이덴노기(位禮正殿の儀)'는 국가행사로 진행됐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만세삼창 선창을 참석자들이 따라서 불렀다.
'일왕폐하 만세'를 부르기에 앞서 '즉위를 축하드리며'라는 말을 붙였다.
국민주권을 규정한 현행 헌법하에서 이뤄진 첫 왕위교대 행사였던 '헤이세이(平成)' 때의 의식을 답습했다. 만세가 계속되자 SNS에서는 정작 일왕이 '곤란해 하지 않았을까'라는 글도 올라왔다.
현장을 지켜본 하라 다케시(原武史) 방송대 교수(일본 정치사상사)는 "참가자들이 직접 스크린을 통해 왕 부부의 표정을 잘 볼 수 있었을텐데 두분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하지 않고 만세를 계속하는 건 이상했다"고 말했다.
가와니시 히데야(河西秀哉) 나고야(名古屋)대 대학원 교수(역사학)는 "세계대전 전처럼 왕의 권위를 높이고 싶어하는 보수파의 생각이 장시간 만세를 계속 부른데서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행사에 인기 예술가 등을 참석시켜 왕실에 흥미가 없는 층도 끌어 들이려는 계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만세'라는 단어는 전에 일왕숭배나 군국주의를 추진하기 위한 방책이었다는 걸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