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9월 우리나라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965년 통계를 작성한 이후 최초로 전년 동기 대비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근원물가 상승률은 올 들어 11월까지 0%대를 기록 중이다. 일본을 '잃어버린 20년'에 빠뜨린 디플레이션(deflation)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이유다. 대한민국 경제가 맞닿은 새로운 국면을 진단해본다.[편집자주]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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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우리나라의 디플레이션 가능성은 70%, 상황을 해결할 뾰족한 성장동력 없다."(조경엽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20년 디플레 진입은 기우, 저물가 우려스럽지만 공급 요인 크다."(김완중 하나금융경영연구소 금융시장팀장)

저물가·저성장이 이어지면서 한국 경제가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하락)에 진입하는 것이 아니냐는 논쟁이 거세지고 있다.

3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0.2% 올라 4개월 만에 상승세로 돌아섰다. 하지만 한국 경제가 디플레이션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다는 목소리는 여전히 크다.

물가가 수요 회복이 아니라 채소류 가격 상승 등 일시적 요인에 의해 올랐기 때문이다. 지난 가을 잦은 태풍으로 농산물 가격이 급등했고, 지난해 11월 시행된 유류세 인하 효과 때문에 석유류 가격 하락이 물가에 끼치는 영향도 지난달보다 줄었다.

나아가 3분기(7~9월) GDP디플레이터의 경우 외환위기 이후 2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GDP디플레이터는 경제주체들이 만든 부가가치의 가격으로, 명목 GDP를 실질 GDP로 나눈 값이다. 이는 국내에서 생산된 상품과 투자재에 이르기까지 종합적인 가격 수준을 보여주는 경제지표다.

디플레이션이란 경제 전반적으로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을 말한다. 상품 및 서비스의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면, 기업들의 실적이 나빠지고 임금도 줄어들게 된다. 이로 인해 가계의 소비 여력이 줄어들고, 감소한 소비 수요로 상품 가격이 다시 하락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장민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일본은 부동산 가격이 급락하면서 소비여력이 줄었고, 디플레이션과 마이너스 물가상승률이 10년 이상 지속됐다"고 말했다.

◆ 9월 소비자물가 사상 최초 '마이너스'

"현재의 저물가는 공급측 요인에 따른 일시적 현상. 광범위한 물가 하락을 의미하는 디플레이션과 거리가 있다."

정부는 지난달 9일 관계부처 합동으로 펴낸 '한국경제 바로 알기'라는 책자를 통해 최근 저물가 상황을 이같이 평가했다. 우려가 커지고 있는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 하락)과는 선을 그었다.

정부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디플레이션이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 1990년대 시작된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의 전조였기 때문이다. 디플레이션의 발생은 경제정책 실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한국 지난 9월 공식적으로 사상 처음 마이너스 물가상승률을 기록했다. 1965년 통계 작성 이래 처음 발생한 마이너스여서 충격이 컸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통계적으로 인플레이션 만을 경험해왔다.

올 9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0.4% 하락했다. 지난 8월도 1년 전보다 0.038% 떨어져 사실상 두 달 연속 마이너스다. 다만 공식 상승률은 소수점 한 자릿수까지만 따져 9월이 사상 최초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이 됐다. 10월에는 0%, 11월에 0.2%를 기록했다.

정부는 최근의 저물가가 지난해 여름 폭염에 따른 농산물 가격 급등, 높았던 지난해 유가 등 공급 측 요인이 강하다는 설명을 반복하고 있다. 수요 부진이 원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낮은 물가가 정부의 설명처럼 단순히 공급측 요인으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강하다. 농산물과 유가 등 가격 변동이 심한 부분을 제외한 근원물가 상승률도 하락추세에 있다는 것이다.

◆디플레이션, 당장은 아니지만…
['D'공포 논쟁①]내년 '디플레이션' 현실화 되나…"일시적 기우" vs "이미 진입"
'농산물과 석유류를 제외한 지수'(근원물가)는 소비자물가에서 국제유가와 농산물 가격 등 예측이 어려운 공급 요인을 빼고, 수요 측면의 물가 추세를 보여주는 지표다. 때문에 '내수경기의 온도'를 보여준다고도 한다.

전년 대비 근원물가 상승률은 2008년 4.3%를 기록한 이후 하락세를 이어오고 있다. 올 들어 11월까지 근원물가는 상승률은 0.7%다. 이달 극적인 반전이 없다면 2019년 근원물가 상승률은 0%대를 기록하게 된다. 근원물가 상승률이 0%대였던 것은 외환위기로 물가가 급락했던 1999년 0.3% 이후 20년 만이다. 근원물가의 하락은 소비자가 체감하는 경기 상황이 나빠 돈을 쓰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수요(소비) 측면에서도 물가를 지지하는 요인이 약해지고 있는 것이다.

당장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장기간 마이너스에 머무는 디플레이션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이 많다. 조병현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최근 물가하락 압력을 제공한 부문은 음식료 부분이 컸다"며 "이 부문의 변동성과 지난해의 높은 가격 효과가 소진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추가적인 디플레 압력을 제공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비자물가가 약하게 반등하는 지금의 상황에 안도할 것이 아니라 선제적 대응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강태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디플레이션을 통계로 확인하는 단계로 가면 상황이 심각해진다"며 "우려만으로도 기업이 투자를 줄이고, 가계소비가 위축되는 등 디플레이션을 더 강화할 수 있어 경제 주체들의 기대 수준을 관리하는 정책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세계 국채의 30% 가량이 마이너스 금리로 발행되고, 주요국의 기준금리가 제로나 마이너스권에 있는 것도 디플레이션을 막기 위한 발버둥이라는 판단이다. 확장적 재정정책과 함께 한국은행도 제로금리를 생각할 때가 왔다고 봤다.

한민수/이송렬 한경닷컴 기자 hm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