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칠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정치에 발을 들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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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처칠 탐구서 출간
"카산드라와 같은 예지력, 불굴의 의지 갖춘 지도자"
고대 트로이 마지막 왕 프리아모스의 딸이자 트로이 영웅 헥토르의 누이였던 카산드라. 아폴론 신에게서 예언의 능력을 얻게 됐지만, 그의 사랑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설득력'을 빼앗긴 그녀는 그리스군의 계략으로 남겨진 트로이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고 절규하지만, 트로이인들은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읽은 사람이라면 모두가 아는 것처럼 그 결과는 트로이의 멸망이었다.
인류가 겪은 전대미문의 참사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트로이의 카산드라처럼 전쟁이 눈앞에 왔음을 홀로 소리높여 외쳤던 선각자가 있었다.
바로 미국이 참전하기까지 자유 세계의 마지막 보루로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제국에 단신으로 맞서다시피 했던 대영제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1874~1965)이다.
카산드라처럼 처칠의 예지는 번번이 외면당했지만, 그는 마침내 악의 제국을 물리치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킨 위대한 영웅으로 남게 됐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가 인간 처칠, 그리고 정치가, 군사 전략가, 협상가, 무엇보다 카산드라와는 정반대로 탁월한 설득력을 지닌 연설가로서 처칠의 면모를 분석하는 책 '윈스턴 S. 처칠'을 발간했다.
길게는 1986년 그가 영국 외무부의 펠로십을 받아 런던정치경제대학의 객원교수로 있던 때부터, 짧게 보면 한국지정학연구원 이사장으로 나라와 문명을 위기에서 구한 정치 지도자들의 리더십을 논의하는 '셋토네(매월 셋째주 토요일 4시의 모임)'에서 2년에 걸쳐 한 연구와 토론의 결과물이다.
강 교수는 책에서 처칠의 예언자적 면모와 불굴의 의지, 통찰력으로 난국을 극복해 가는 지도력을 부각한다.
우리 정치 지망생들에게 "처칠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정치에 발을 들일 생각을 하지 말라"고 경고할 정도다.
합법적으로 집권했으나 정치공작과 테러로 독재 권력을 확보한 히틀러가 1차대전 후 유럽의 질서를 규정한 베르사유조약을 헌신짝처럼 걷어차 버리고 독일의 재무장에 이어 이웃 국가들에 대한 침략 계획을 착착 실행해갈 때에도 참혹한 대전쟁의 역작용인 염전(厭戰) 분위기와 막연한 평화주의에 물들어 있던 영국 국민들은 히틀러의 위협을 전혀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히틀러가 라인란트의 비무장지대로 군대를 들이밀었을 때도, 오스트리아를 강제합병했을 때도, 체코를 무력침공했을 때도 영국인들은 "더 이상의 침략은 없다"는 히틀러의 말을 애써 믿었다.
영국의 지도자들은 히틀러에게 거듭 굴복하면서도 국민들에게는 "약간의 양보로 평화를 얻었다"고 달래곤 했다.
그러나 처칠은 달랐다.
처칠은 1933년 나치 집권 이래 줄곧 나치 억제의 당위성을 역설하며 독일의 재무장을 용인한 정부를 공격했다.
1938년 네빌 체임벌린 당시 총리가 체코를 내어주는 협상을 하러 독일로 떠나기에 앞서 영국 의회에서 연설하며 "머나먼 나라에서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 때문에 여기서 우리가 참호를 파고 가스 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비현실적이고 믿을 수 없는 일인가"라고 목소리를 높일 때 모든 의원이 기립해 환호했지만, 처칠만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체코가 나치의 손아귀에 떨어진 뒤 처칠은 "이것은 오직 첫 모금에 불과하다.
우리가 옛날처럼 다시 일어나 자유를 위해 저항하지 않는 한 해가 감에 따라 우리가 마시게 될 쓰디쓴 잔의 첫 맛보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영국 지도자들은 물론 일반 국민들도 처칠을 '전쟁광'으로 치부할 뿐 아무도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심지어 나치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이 기정사실이 된 1939년 9월 1일에도 체임벌린은 "독일이 폴란드에서 철군하면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헛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전쟁이 시작되고 처칠이 해군 장관을 거쳐 총리가 된 것은 영국과 자유 세계로서는 늦었지만, 다행스럽고 올바른 길이었다.
처칠이 히틀러의 야욕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것을 단지 '예지력'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처칠은 히틀러를 만나 본 적도 없고 독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지만, 일찌감치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고 그의 위험성을 직감할 수 있었다.
세습 귀족 가문 출신이라는 데서 오는 우월감과 의무감, 오랜 공직 생활을 통해 쌓은 경력으로 인해 처칠은 자신의 통찰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설득시키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전쟁 위험을 미리 경고하고 대비토록 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막상 전쟁이 시작된 후 처칠은 설득력, 구체적으로는 역사상 손에 꼽힐 정도의 연설 능력으로 전쟁의 공포에 시달리고 궁핍에 내몰린 국민들에게 용기를 북돋우고 단합을 끌어낼 수 있었다.
1940년 5월 13일 처칠의 취임 연설은 단 7분간의 분량이었지만 영국 의회에서 행해졌던 가장 위대한 연설 중 하나였다고 강 교수는 적었다.
처칠은 "나는 의회에 말하고 싶다.
피와 노고, 눈물 그리고 땀 외에 줄 것이 없다고.… 여러분들은 우리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나는 한마디로 대답할 수 있다.
그것은 승리다.
모든 대가를 지불하는 승리, 모든 공포에도 불구한 승리, 그 길이 제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승리다.
왜냐하면 승리 없이는 생존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역설했다.
영국 국민들은 처칠의 연설을 들으면서 자신들에게 의지할 수 있는 지도자가 있음을 알게 됐고 앞으로 펼쳐질 기나긴 전쟁을 견딜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다.
이후 영국 국민에게 감동을 준 처칠의 연설 목록은 끝이 없을 정도다.
대표적으로 독일군의 전격전에 밀려 프랑스 북부 해변에 고립된 영국군과 프랑스군 수십만명을 군함과 상선은 물론 여객선과 어선까지 동원해 구해낸 '됭케르크 철수' 직후 1940년 6월 4일 처칠이 의회에서 한 연설을 들 수 있다.
처칠은 "우리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의 섬을 지킬 것이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착륙지점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들판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언덕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강 교수는 이를 "고대 아테네의 페리클레스와 미국의 에리브러햄 링컨의 연설에 버금가는 위대하고 감동적인 연설"이라고 평가했다.
책은 이어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보인 군사 전략가, 협상가로서 처칠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한다.
영국이 홀로 싸우다시피 한 초기와는 달리 미국의 참전 이후 전세는 확연히 미국·소련·영국 연합군 진영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처칠은 앞으로 세계를 양단하는 초강대국이 될 두 거두, 즉 미국과 소련의 사이에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모두가 연합군 진영의 승리로 끝날 전쟁 후 세계 재편 방안에 들떠 있을 때 처칠은 다시 한번 예지를 드러내 보이지만 기울어가는 제국의 지도자로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히틀러를 무찌르는 것이 급선무였던 전쟁 시기에 처칠은 스탈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를 썼지만 이미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래 그는 일관된 반공주의자였다.
처칠은 전후 유럽의 상당 부분이 소련의 지배하에 놓일 것으로 예상하고 그것을 막아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1944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처칠과 스탈린의 회담을 들 수 있다.
공식 기록에는 남지 않았지만, 처칠은 스탈린에게 동유럽과 발칸 지역의 나라별로 전후 소련과 영국의 지배 비율을 정한 메모를 건네며 담판을 졌다.
거기에는 루마니아에 대해 소련의 지분 90%를 인정하되 그리스에 대해서는 영국의 지분 90%를 인정받는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스탈린은 동의했고 그것 때문만인지는 분명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전후 그리스는 공산화를 면할 수 있었다.
강 교수는 이 회담이 동유럽과 발칸의 전후 질서를 최초로 구상했다는 점에서 그 후에 벌어진 얄타회담 못지않게 중요한 회담이라고 봤다.
처칠이 발명하지는 않았지만 '철의 장막'이라는 말이 그가 사용함으로써 널리 알려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처칠은 심지어 2차대전의 막바지에 소련과 일본이 동맹을 맺고 미국-영국-독일-폴란드 연합군이 이에 맞서 전쟁을 벌이는 상황을 가정해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지 검토할 것을 전시내각 참모들에게 지시하기도 했다.
이 책이 다루는 처칠의 인생은 1955년 4월 두 번째 총리직 퇴임까지다.
강 교수는 처칠의 리더십의 원천을 '애국주의(patriotism)'에서 찾는다.
그의 모든 정치적·군사적 리더십은 바로 이 애국심을 실현하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리더십의 내용을 이루는 구체적인 덕목으로 강 교수는 신념과 비전, 공직자의 의무감, 정치적 분별력, 전략적 안목, 외교술, 용기, 장엄함, 수사학적 연설 등을 들었다.
강 교수는 "정치를 하려거든 윈스턴 처칠을 공부하고 그처럼 말하고 또 그처럼 행동하든가, 아니면 아예 정치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나라 발전에 기여하기는커녕 결국 자신의 인격만 망치고 말 것이다"라는 말로 책을 마무리했다.
박영사. 451쪽. 2만8천원.
/연합뉴스
"카산드라와 같은 예지력, 불굴의 의지 갖춘 지도자"
고대 트로이 마지막 왕 프리아모스의 딸이자 트로이 영웅 헥토르의 누이였던 카산드라. 아폴론 신에게서 예언의 능력을 얻게 됐지만, 그의 사랑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설득력'을 빼앗긴 그녀는 그리스군의 계략으로 남겨진 트로이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고 절규하지만, 트로이인들은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읽은 사람이라면 모두가 아는 것처럼 그 결과는 트로이의 멸망이었다.
인류가 겪은 전대미문의 참사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트로이의 카산드라처럼 전쟁이 눈앞에 왔음을 홀로 소리높여 외쳤던 선각자가 있었다.
바로 미국이 참전하기까지 자유 세계의 마지막 보루로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제국에 단신으로 맞서다시피 했던 대영제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1874~1965)이다.
카산드라처럼 처칠의 예지는 번번이 외면당했지만, 그는 마침내 악의 제국을 물리치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킨 위대한 영웅으로 남게 됐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가 인간 처칠, 그리고 정치가, 군사 전략가, 협상가, 무엇보다 카산드라와는 정반대로 탁월한 설득력을 지닌 연설가로서 처칠의 면모를 분석하는 책 '윈스턴 S. 처칠'을 발간했다.
길게는 1986년 그가 영국 외무부의 펠로십을 받아 런던정치경제대학의 객원교수로 있던 때부터, 짧게 보면 한국지정학연구원 이사장으로 나라와 문명을 위기에서 구한 정치 지도자들의 리더십을 논의하는 '셋토네(매월 셋째주 토요일 4시의 모임)'에서 2년에 걸쳐 한 연구와 토론의 결과물이다.
강 교수는 책에서 처칠의 예언자적 면모와 불굴의 의지, 통찰력으로 난국을 극복해 가는 지도력을 부각한다.
우리 정치 지망생들에게 "처칠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정치에 발을 들일 생각을 하지 말라"고 경고할 정도다.
합법적으로 집권했으나 정치공작과 테러로 독재 권력을 확보한 히틀러가 1차대전 후 유럽의 질서를 규정한 베르사유조약을 헌신짝처럼 걷어차 버리고 독일의 재무장에 이어 이웃 국가들에 대한 침략 계획을 착착 실행해갈 때에도 참혹한 대전쟁의 역작용인 염전(厭戰) 분위기와 막연한 평화주의에 물들어 있던 영국 국민들은 히틀러의 위협을 전혀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히틀러가 라인란트의 비무장지대로 군대를 들이밀었을 때도, 오스트리아를 강제합병했을 때도, 체코를 무력침공했을 때도 영국인들은 "더 이상의 침략은 없다"는 히틀러의 말을 애써 믿었다.
영국의 지도자들은 히틀러에게 거듭 굴복하면서도 국민들에게는 "약간의 양보로 평화를 얻었다"고 달래곤 했다.
그러나 처칠은 달랐다.
처칠은 1933년 나치 집권 이래 줄곧 나치 억제의 당위성을 역설하며 독일의 재무장을 용인한 정부를 공격했다.
1938년 네빌 체임벌린 당시 총리가 체코를 내어주는 협상을 하러 독일로 떠나기에 앞서 영국 의회에서 연설하며 "머나먼 나라에서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 때문에 여기서 우리가 참호를 파고 가스 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비현실적이고 믿을 수 없는 일인가"라고 목소리를 높일 때 모든 의원이 기립해 환호했지만, 처칠만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체코가 나치의 손아귀에 떨어진 뒤 처칠은 "이것은 오직 첫 모금에 불과하다.
우리가 옛날처럼 다시 일어나 자유를 위해 저항하지 않는 한 해가 감에 따라 우리가 마시게 될 쓰디쓴 잔의 첫 맛보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영국 지도자들은 물론 일반 국민들도 처칠을 '전쟁광'으로 치부할 뿐 아무도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심지어 나치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이 기정사실이 된 1939년 9월 1일에도 체임벌린은 "독일이 폴란드에서 철군하면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헛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전쟁이 시작되고 처칠이 해군 장관을 거쳐 총리가 된 것은 영국과 자유 세계로서는 늦었지만, 다행스럽고 올바른 길이었다.
처칠이 히틀러의 야욕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것을 단지 '예지력'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처칠은 히틀러를 만나 본 적도 없고 독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지만, 일찌감치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고 그의 위험성을 직감할 수 있었다.
세습 귀족 가문 출신이라는 데서 오는 우월감과 의무감, 오랜 공직 생활을 통해 쌓은 경력으로 인해 처칠은 자신의 통찰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설득시키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전쟁 위험을 미리 경고하고 대비토록 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막상 전쟁이 시작된 후 처칠은 설득력, 구체적으로는 역사상 손에 꼽힐 정도의 연설 능력으로 전쟁의 공포에 시달리고 궁핍에 내몰린 국민들에게 용기를 북돋우고 단합을 끌어낼 수 있었다.
1940년 5월 13일 처칠의 취임 연설은 단 7분간의 분량이었지만 영국 의회에서 행해졌던 가장 위대한 연설 중 하나였다고 강 교수는 적었다.
처칠은 "나는 의회에 말하고 싶다.
피와 노고, 눈물 그리고 땀 외에 줄 것이 없다고.… 여러분들은 우리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나는 한마디로 대답할 수 있다.
그것은 승리다.
모든 대가를 지불하는 승리, 모든 공포에도 불구한 승리, 그 길이 제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승리다.
왜냐하면 승리 없이는 생존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역설했다.
영국 국민들은 처칠의 연설을 들으면서 자신들에게 의지할 수 있는 지도자가 있음을 알게 됐고 앞으로 펼쳐질 기나긴 전쟁을 견딜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다.
이후 영국 국민에게 감동을 준 처칠의 연설 목록은 끝이 없을 정도다.
대표적으로 독일군의 전격전에 밀려 프랑스 북부 해변에 고립된 영국군과 프랑스군 수십만명을 군함과 상선은 물론 여객선과 어선까지 동원해 구해낸 '됭케르크 철수' 직후 1940년 6월 4일 처칠이 의회에서 한 연설을 들 수 있다.
처칠은 "우리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의 섬을 지킬 것이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착륙지점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들판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언덕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강 교수는 이를 "고대 아테네의 페리클레스와 미국의 에리브러햄 링컨의 연설에 버금가는 위대하고 감동적인 연설"이라고 평가했다.
책은 이어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보인 군사 전략가, 협상가로서 처칠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한다.
영국이 홀로 싸우다시피 한 초기와는 달리 미국의 참전 이후 전세는 확연히 미국·소련·영국 연합군 진영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처칠은 앞으로 세계를 양단하는 초강대국이 될 두 거두, 즉 미국과 소련의 사이에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모두가 연합군 진영의 승리로 끝날 전쟁 후 세계 재편 방안에 들떠 있을 때 처칠은 다시 한번 예지를 드러내 보이지만 기울어가는 제국의 지도자로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히틀러를 무찌르는 것이 급선무였던 전쟁 시기에 처칠은 스탈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를 썼지만 이미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래 그는 일관된 반공주의자였다.
처칠은 전후 유럽의 상당 부분이 소련의 지배하에 놓일 것으로 예상하고 그것을 막아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1944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처칠과 스탈린의 회담을 들 수 있다.
공식 기록에는 남지 않았지만, 처칠은 스탈린에게 동유럽과 발칸 지역의 나라별로 전후 소련과 영국의 지배 비율을 정한 메모를 건네며 담판을 졌다.
거기에는 루마니아에 대해 소련의 지분 90%를 인정하되 그리스에 대해서는 영국의 지분 90%를 인정받는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스탈린은 동의했고 그것 때문만인지는 분명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전후 그리스는 공산화를 면할 수 있었다.
강 교수는 이 회담이 동유럽과 발칸의 전후 질서를 최초로 구상했다는 점에서 그 후에 벌어진 얄타회담 못지않게 중요한 회담이라고 봤다.
처칠이 발명하지는 않았지만 '철의 장막'이라는 말이 그가 사용함으로써 널리 알려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처칠은 심지어 2차대전의 막바지에 소련과 일본이 동맹을 맺고 미국-영국-독일-폴란드 연합군이 이에 맞서 전쟁을 벌이는 상황을 가정해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지 검토할 것을 전시내각 참모들에게 지시하기도 했다.
이 책이 다루는 처칠의 인생은 1955년 4월 두 번째 총리직 퇴임까지다.
강 교수는 처칠의 리더십의 원천을 '애국주의(patriotism)'에서 찾는다.
그의 모든 정치적·군사적 리더십은 바로 이 애국심을 실현하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리더십의 내용을 이루는 구체적인 덕목으로 강 교수는 신념과 비전, 공직자의 의무감, 정치적 분별력, 전략적 안목, 외교술, 용기, 장엄함, 수사학적 연설 등을 들었다.
강 교수는 "정치를 하려거든 윈스턴 처칠을 공부하고 그처럼 말하고 또 그처럼 행동하든가, 아니면 아예 정치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나라 발전에 기여하기는커녕 결국 자신의 인격만 망치고 말 것이다"라는 말로 책을 마무리했다.
박영사. 451쪽. 2만8천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