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학파 거두 갈암 이현일 건립 정자 '계정' 석각 발견
조선 중기에 퇴계 이황 학맥을 이어 영남학파(嶺南學派) 거두가 된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건립한 정자인 계정(谿亭) 석각(石刻)이 나왔다.

14일 경북 영양군에 따르면 이영재 영양산촌생활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지난 12일 영양 수비면 신원리 강가에서 이현일이 요산유수(樂山樂水) 삶을 실현한 계정 석각을 발견했다.

이현일(1627∼1704)은 영산서원(英山書院) 원장을 지낸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1590∼1674)과 최초 한글 요리책인 음식디미방을 저술한 여중군자 장계향(張桂香·1598∼1680) 둘째 아들이다.

그는 20대 중반에 들어선 1653년 부모가 낙토(樂土)를 찾아 더 깊은 산속으로 은거를 선택하자 모시기 위해 수비면 신원리로 이주해 수산유허비(首山遺墟碑) 부근에 갈암이란 집을 짓고 19년 동안 살았다.

갈암이 지은 계정기(谿亭記)에는 어느 날 아버지를 모시고 동쪽에서 흘러들어오는 신원천 가를 걷다 기이한 바위와 물소리가 어우러진 명승지를 찾아 계정을 짓고 후세에 남기기 위해 바위에 두 글자를 새겼다고 했다.

계정에서 학문을 닦은 석계 아들이 모두 당대 학문으로 일가를 이뤘고 갈암은 조정에 출사해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러나 1694년 폐비 민씨 복위운동에 따른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계가 몰락하자 갈암 또한 탄핵으로 유배를 갔고 1909년에야 관직과 시호를 회복했다.

후손과 후학이 1865년 수산유허비를 건립함으로써 석계 일가가 살던 유거지를 고증했다.

그러나 갈암이 형제와 학문을 닦은 계정은 1931년 금강산에 가기 위해 이곳을 지나간 수산(秀山) 김병종(金秉宗 1870∼1930)이 "세대가 오래되어 초당과 계정 위치를 알 수 없다"고 쓴 기록처럼 그 장소를 찾을 수 없었다.

영양군이 추진하는 수산유거지 복원사업 자문위원을 맡은 이영재 학예연구사가 수산유거지에서 동쪽으로 약 950m 떨어진 바위에서 계정이란 석각을 찾아냄에 따라 다시 세상에 드러났다.

이영재 학예연구사는 "안동대 산학협력단장인 배영동 교수에게서 '현지인이 바위에 석(石○) 또는 석계(石溪)라는 석각을 봤다'는 이야기를 듣고 확인한 결과 석각은 갈암 정자가 있던 계정이었다"고 밝혔다.

오도창 영양군수는 "수백 년간 잊힌 갈암 선생 정자를 다시 찾은 것은 중요한 성과다"며 "수산유거지 복원을 실증적으로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지표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