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대교 덕에 뭍이 된 암태도, '동백 빠마' 벽화 부부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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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향기
강제윤 시인의 새로 쓰는 '섬 택리지'
(39) 전남 신안 암태도
강제윤 시인의 새로 쓰는 '섬 택리지'
(39) 전남 신안 암태도
1만2000년 만에 섬은 다시 육지와 하나가 됐다. 2019년 4월 4일 신안의 섬 암태도에서 일어난 경천동지할 사태다. 천사대교 개통으로 목포에서 28㎞나 떨어진 섬이 육지와 연결된 것이니 어찌 아니겠는가. 섬이 뭍으로 되는 것은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지만 섬사람들에게는 놀랄 만한 사건임은 분명하다. 한국의 서해(황해)는 마지막 빙하기까지 육지였다. 당연히 현재 서해 섬들도 육지였다. 대략 1만2000년 전부터 빙하가 녹으면서 서해의 육지는 바다로 변했다. 그때 수면에 남은 육지는 모두 섬이 되었다. 암태도 또한 육지에서 섬이 되었다. 그러니 암태도는 천사대교 개통으로 다시 1만2000년 만에 육지로 편입된 것이다. 어찌 놀랄 만한 사건이 아니겠는가?
유쾌함을 선물해주는 ‘동백 빠마’ 벽화
천사대교가 개통되면서 암태도에도 새로운 명소가 몇 군데 생겼다. ‘동백 빠마’ 벽화도 그중 하나다. 통영의 동피랑 마을이 유명해진 뒤 전국 곳곳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벽화마을들. 예산만 낭비하고 다들 망했다. 그래서 특색도 없고 맥락도 없이 그려진 벽화들을 보면 거부감이 먼저 들곤 한다. 그런데 이 벽화를 보고는 반했다. 이 정도 창의적이고 즐거움을 주는 벽화라면 몇 개가 더 생긴들 반갑지 않겠는가? ‘동백 빠마’ 벽화는 암태도 기동 삼거리 손석심 할머니와 문병일 할아버지 댁 담장에 있다. 그냥 벽화가 아니라 ‘설치 작품’이다. 얼굴은 벽에 그려진 그림인데 파마를 한 듯한 머리 부분은 그림이 아니다. 진짜 애기 동백나무다. 꽃이 피는 시절이면 영락없이 ‘동백꽃 빠마’다. 외국의 경우 거리예술(Street Art)에서 자주 사용되는 방식이지만 우리 섬에서 보니 새롭다. ‘빠마 머리’를 한 노부부가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은 그냥 보고만 있어도 즐거워 배시시 웃음이 나온다. 유쾌함을 선물해주는 벽화, 아름답지 않은가? 그림과 실제 동백나무를 결합해서 완성한 이 특별한 벽화는 신안군의 요청으로 화가들이 협업해 작업한 것이다. 벽화의 주인공이 집주인 부부가 된 것은 박우량 신안군수의 아이디어였다. 신안군의 한 공무원이 애니메이션 주인공을 벽화로 그리자고 제안하니 박 군수가 집주인 할머니로 하자고 해서 제작됐다 한다. 막상 벽화 작업이 시작되고 담장 벽에 대문짝만한 할머니 얼굴이 그려지자 손 할머니는 ‘남사스럽다’며 지우고 싶다 했다. 하지만 동백나무를 머리로 한 벽화는 끝내 완성됐고 주변의 반응이 좋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부군인 문 할아버지가 박 군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자신의 얼굴도 그려달라고 요구했다. 군수는 그러자 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할머니 빠마 머리와 같은 크기의 애기 동백을 구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결국 제주도까지 가서 동백을 구해왔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벽화가 천사대교 개통과 함께 암태도 최고의 뷰포인트가 된 것이다. 벽화 하나가 섬마을을 환하게 만들었으니 이것이 예술의 힘이다.
벽화 건너편 운동기구들이 설치된 체육공원에는 서재봉(85세), 서명균(86세) 두 어르신이 나란히 앉아 햇볕을 즐기고 있다. 다리가 놓이고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느냐 물으니 돌아오는 대답. “한동안 사정없이 많이 다녀부렀어요.” “저 동백나무 벽화도 사진 찍으러 많이 오죠?” “거그도 아주 사정없이 와 부러요.” 주인 부부는 밭에 일하러 나가신 참이라 만날 수 없었다.
암태도 소작쟁의로 유명한 일제 항쟁의 섬
암태도는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농민항쟁인 ‘암태도 소작쟁의’로 유명한 섬이다. “육이오 때 목포 경찰서에서 암태도를 모스크바라 불렀어요.” 일제 강점기 때 소안도가 ‘남해의 모스크바’로 불렸던 것은 익히 잘 알고 있었는데 암태도 또한 ‘모스크바’로 불린 것은 처음 알았다. 서태석 선생 등 사회주의 계열의 지도자가 소작인 항쟁을 주도했던 까닭이다. “일제 때 세무서 직원들이 밀주 단속 나왔다가 뚜드려 맞고 간 동네요. 여가.” 그만큼 기동리가 기가 센 동네였다는 말씀. “면민 축구 대회 같은 거 열려서 기동리하고 붙으면 다들 벌벌 떨었어.” 서명균 어르신도 거드신다. “다른 데 사람들보다 나았어요. 아는 것도 많고 경우 바르고.” 어르신들의 마을에 대한 자긍심이 남다르다.
암태도는 일제 강점기 무안군에 속했었다. 무안에서 신안군이 분리된 것은 1969년이다. “서태석 씨 집안이 무안군을 들었다 놨다 했지. 서태석 씨가 모스크바에서 대학 나왔어. 면에서는 유명해요.” 암태도의 면적은 36.27㎢. 여의도(2.9㎢)의 열두 배쯤 된다. 암태도의 전답은 11.75㎢. 여의도의 네 배쯤 되는 땅이다. 예나 지금이나 섬이지만 농사가 주업이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1923년 암태도의 소작농들이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해 약 1년간 암태도의 지주 문재철(文在喆)과 이를 비호하는 일제에 대항한 항일운동이었다. 들불처럼 번져 나간 일제하 소작쟁의 운동의 도화선이었다. 암태도를 뒤따라 1925년 도초도, 1926년 자은도, 1927년 지도에서 소작쟁의가 이어졌다.
암태도의 대지주 문재철은 1910년대에는 지세(地稅)와 제반 경비를 공동부담으로 하는 반분타조제(半分打租制)로 소작료를 징수해 갔는데 1920년대 들어 일제의 저미가정책으로 수익률이 감소하자 무려 7할 내지 8할의 소작료를 징수해 갔다. 약탈적 소작료 징수를 참을 수 없었던 암태도 소작인들은 1923년 8월 추수기를 앞두고 소작쟁의를 개시했다. 암태도 오상리 출신 서태석의 주도로 암태소작인회가 조직됐고 문재철에게 소작료를 4할로 인하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요구는 거절당했고 소작인들은 추수거부·소작료불납동맹으로 문재철에게 대항했다. 목포경찰서는 몇 명의 일본 경찰을 출동시켜 소작인들을 위협했고 결국 농민대표들을 구속했다. 암태도 주민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암태부인회를 필두로 암태도 전 주민이 항쟁에 참가했다. 400여 명의 소작인들은 6월 4일부터 8일까지 목포경찰서·법원 앞에서 시위농성을 벌였다. 또 7월 8일부터는 600명이 다시 목포 법원 앞에서 아사동맹(餓死同盟)을 맺고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7월 11일에는 문재철의 집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26명이 잡혀갔다. 암태도 주민들의 투쟁은 수많은 언론에 보도됐고 한반도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응원이 답지했다. 조선인 변호사들은 무료변론을 자청했고, 서울·평양 등지에서는 지원강연회와 지원금 모금활동이 벌어졌다.
친일 지주와 일제 경찰에 맞서 싸워
암태도 주민들의 목숨을 건 투쟁은 마침내 소작료를 4할로 내리게 했고 농민대표들도 풀려났다. 일제 강점기 외딴 섬에서 이루어낸 농민항쟁의 값진 승리였다. 하지만 1998년에 이르러서야 면소재지인 단고리에 ‘암태도 소작인 항쟁기념탑’이 세워졌다. 일제시대뿐일까? 그 옛날부터 암태도 사람들은 참 대단했었다. 친일 지주와 일제 경찰에 맞서 싸우던 기개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미 선례가 있었다. 조선 태종8년(1408년)에 불과 20여 명의 암태도 주민들이 노략질을 하러 온 왜선 9척과 맞서 싸워 물리쳤다. 이들은 염간 김나진과 갈금 등이다. 염간은 소금막에서 자염(煮鹽)을 만들던 염부들이었다. 진짜 영웅들이 아닌가. 게다가 불과 20여 명으로 9척이나 되는 왜구들과 맞서 싸워 승리하다니. 신안군에서는, 아니 정부에서 이들을 기리는 기념비라도 세워야 마땅하지 않을까? 양반 영웅들만 기리지 말고.
“왜선(倭船) 9척이 연일(連日) 암태도(巖泰島)를 도둑질하니, 염간(鹽干) 김나진(金羅進)과 갈금(葛金) 등이 쳐서 쫓아버렸다. 나진(羅進) 등 20여 인이 혈전(血戰)을 벌여 적의 머리 3급(級)을 베고, 잡혀 갔던 사람 2명을 빼앗으니, 적(賊)이 곧 물러갔다.” 태종실록 8년 1408년 2월 3일 기사
소작쟁의의 핵심적인 인물은 암태도 출신의 서태석(1885~1958)과 박복영(1890~1973)이었다. 서태석은 1913년부터 7년간이나 암태 면장을 지낸 바 있다. 서씨는 600여 년 전 암태도에 처음 입도한 집안이기도 했다. 3·1운동을 계기로 서태석은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3·1운동 1주기 때 유인물을 배포하다 1년간 수감생활을 했고 신간회 사건 관련자로 수차례 옥고를 치렀다. 이후 군자금 확보를 위해 국내외에서 활동했는데 1922년 고향으로 돌아와 1923년, 암태소작인회를 결성해 소작쟁의를 주도했다. 러시아에 다녀온 것이 고향에서는 “모스크바에서 대학을 졸업했다”고 와전된 듯하다. 1924년 9월에는 암태도 소작쟁의 배후 조종자로 검거돼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28년 4월에는 다시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돼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서태석의 말년은 불행했다. 수차례 투옥되며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분열증을 앓았다. 해방된 조국에서 서태석은 거리를 전전하다 1958년 압해도의 어느 논에서 벼 포기를 움켜쥐고 죽음을 맞이했다.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었다는 이유로 해방 후에도 서태석은 금기의 대상이었다. 일가친척은 감시와 탄압을 받으며 고난의 세월을 살았다. 친일파의 나라가 만든 비극이었다. 2003년에야 비로소 서태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서태석의 며느리는 1929년 11월 3일에 일어난 광주학생의거의 주역 박기옥(1913~1947)이다.
암태도 항쟁 주도자 박복영 대통령 표창 추서
또 다른 주도자인 암태도 단고리 출신 박복영(1890~1973)은 1919년 목포지역 3·1운동으로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1920년 상하이로 망명 중 체포돼 신의주 형무소에서 또 옥고를 치렀다. 1923년에는 임시정부의 비밀문서를 가지고 들어오다 체포돼 1년6개월을 살았다. 암태도에 돌아온 뒤 1923년 암태청년회 회장을, 1924년에는 암태도 소작쟁의 주동자들이 투옥당하자 소작인회 회장을 맡아 활동했고, 1926년 자은도 소작쟁의도 도왔다. 이후 동아일보 목포지국장을 지냈다. 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됐고, 1990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암태도 소작쟁의를 촉발시킨 대지주 문재철(1882~1955)은 암태도 수곡리 출신으로 일제의 식민수탈정책에 편승해 토지 소유를 확대한 전형적인 식민 지주였다. 1920년대 당시 암태도·자은도 등의 도서 지역과 전라남북도 등지에 7.48㎢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다. 암태도에는 약 1.38㎢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1940년 문재철이 소유한 토지는 무려 16.5㎢로 늘어났다. 1941년에는 목포에 문태중학교를 설립했고 1941년 이후 일제의 침략전쟁을 적극 응원하던 친일 단체인 흥아보국단 및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문재철은 1993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추서받았다. 그는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는 등재됐지만 친일인명사전에서는 빠졌다. 민족을 위한 교육사업과 상하이임시정부의 자금조달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친일명단에서 제외된 것이다. 사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참으로 간단치가 않다.
■강제윤 시인은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이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 《섬을 걷다》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유쾌함을 선물해주는 ‘동백 빠마’ 벽화
천사대교가 개통되면서 암태도에도 새로운 명소가 몇 군데 생겼다. ‘동백 빠마’ 벽화도 그중 하나다. 통영의 동피랑 마을이 유명해진 뒤 전국 곳곳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벽화마을들. 예산만 낭비하고 다들 망했다. 그래서 특색도 없고 맥락도 없이 그려진 벽화들을 보면 거부감이 먼저 들곤 한다. 그런데 이 벽화를 보고는 반했다. 이 정도 창의적이고 즐거움을 주는 벽화라면 몇 개가 더 생긴들 반갑지 않겠는가? ‘동백 빠마’ 벽화는 암태도 기동 삼거리 손석심 할머니와 문병일 할아버지 댁 담장에 있다. 그냥 벽화가 아니라 ‘설치 작품’이다. 얼굴은 벽에 그려진 그림인데 파마를 한 듯한 머리 부분은 그림이 아니다. 진짜 애기 동백나무다. 꽃이 피는 시절이면 영락없이 ‘동백꽃 빠마’다. 외국의 경우 거리예술(Street Art)에서 자주 사용되는 방식이지만 우리 섬에서 보니 새롭다. ‘빠마 머리’를 한 노부부가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은 그냥 보고만 있어도 즐거워 배시시 웃음이 나온다. 유쾌함을 선물해주는 벽화, 아름답지 않은가? 그림과 실제 동백나무를 결합해서 완성한 이 특별한 벽화는 신안군의 요청으로 화가들이 협업해 작업한 것이다. 벽화의 주인공이 집주인 부부가 된 것은 박우량 신안군수의 아이디어였다. 신안군의 한 공무원이 애니메이션 주인공을 벽화로 그리자고 제안하니 박 군수가 집주인 할머니로 하자고 해서 제작됐다 한다. 막상 벽화 작업이 시작되고 담장 벽에 대문짝만한 할머니 얼굴이 그려지자 손 할머니는 ‘남사스럽다’며 지우고 싶다 했다. 하지만 동백나무를 머리로 한 벽화는 끝내 완성됐고 주변의 반응이 좋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부군인 문 할아버지가 박 군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자신의 얼굴도 그려달라고 요구했다. 군수는 그러자 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할머니 빠마 머리와 같은 크기의 애기 동백을 구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결국 제주도까지 가서 동백을 구해왔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벽화가 천사대교 개통과 함께 암태도 최고의 뷰포인트가 된 것이다. 벽화 하나가 섬마을을 환하게 만들었으니 이것이 예술의 힘이다.
벽화 건너편 운동기구들이 설치된 체육공원에는 서재봉(85세), 서명균(86세) 두 어르신이 나란히 앉아 햇볕을 즐기고 있다. 다리가 놓이고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느냐 물으니 돌아오는 대답. “한동안 사정없이 많이 다녀부렀어요.” “저 동백나무 벽화도 사진 찍으러 많이 오죠?” “거그도 아주 사정없이 와 부러요.” 주인 부부는 밭에 일하러 나가신 참이라 만날 수 없었다.
암태도 소작쟁의로 유명한 일제 항쟁의 섬
암태도는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농민항쟁인 ‘암태도 소작쟁의’로 유명한 섬이다. “육이오 때 목포 경찰서에서 암태도를 모스크바라 불렀어요.” 일제 강점기 때 소안도가 ‘남해의 모스크바’로 불렸던 것은 익히 잘 알고 있었는데 암태도 또한 ‘모스크바’로 불린 것은 처음 알았다. 서태석 선생 등 사회주의 계열의 지도자가 소작인 항쟁을 주도했던 까닭이다. “일제 때 세무서 직원들이 밀주 단속 나왔다가 뚜드려 맞고 간 동네요. 여가.” 그만큼 기동리가 기가 센 동네였다는 말씀. “면민 축구 대회 같은 거 열려서 기동리하고 붙으면 다들 벌벌 떨었어.” 서명균 어르신도 거드신다. “다른 데 사람들보다 나았어요. 아는 것도 많고 경우 바르고.” 어르신들의 마을에 대한 자긍심이 남다르다.
암태도는 일제 강점기 무안군에 속했었다. 무안에서 신안군이 분리된 것은 1969년이다. “서태석 씨 집안이 무안군을 들었다 놨다 했지. 서태석 씨가 모스크바에서 대학 나왔어. 면에서는 유명해요.” 암태도의 면적은 36.27㎢. 여의도(2.9㎢)의 열두 배쯤 된다. 암태도의 전답은 11.75㎢. 여의도의 네 배쯤 되는 땅이다. 예나 지금이나 섬이지만 농사가 주업이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1923년 암태도의 소작농들이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해 약 1년간 암태도의 지주 문재철(文在喆)과 이를 비호하는 일제에 대항한 항일운동이었다. 들불처럼 번져 나간 일제하 소작쟁의 운동의 도화선이었다. 암태도를 뒤따라 1925년 도초도, 1926년 자은도, 1927년 지도에서 소작쟁의가 이어졌다.
암태도의 대지주 문재철은 1910년대에는 지세(地稅)와 제반 경비를 공동부담으로 하는 반분타조제(半分打租制)로 소작료를 징수해 갔는데 1920년대 들어 일제의 저미가정책으로 수익률이 감소하자 무려 7할 내지 8할의 소작료를 징수해 갔다. 약탈적 소작료 징수를 참을 수 없었던 암태도 소작인들은 1923년 8월 추수기를 앞두고 소작쟁의를 개시했다. 암태도 오상리 출신 서태석의 주도로 암태소작인회가 조직됐고 문재철에게 소작료를 4할로 인하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요구는 거절당했고 소작인들은 추수거부·소작료불납동맹으로 문재철에게 대항했다. 목포경찰서는 몇 명의 일본 경찰을 출동시켜 소작인들을 위협했고 결국 농민대표들을 구속했다. 암태도 주민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암태부인회를 필두로 암태도 전 주민이 항쟁에 참가했다. 400여 명의 소작인들은 6월 4일부터 8일까지 목포경찰서·법원 앞에서 시위농성을 벌였다. 또 7월 8일부터는 600명이 다시 목포 법원 앞에서 아사동맹(餓死同盟)을 맺고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7월 11일에는 문재철의 집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26명이 잡혀갔다. 암태도 주민들의 투쟁은 수많은 언론에 보도됐고 한반도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응원이 답지했다. 조선인 변호사들은 무료변론을 자청했고, 서울·평양 등지에서는 지원강연회와 지원금 모금활동이 벌어졌다.
친일 지주와 일제 경찰에 맞서 싸워
암태도 주민들의 목숨을 건 투쟁은 마침내 소작료를 4할로 내리게 했고 농민대표들도 풀려났다. 일제 강점기 외딴 섬에서 이루어낸 농민항쟁의 값진 승리였다. 하지만 1998년에 이르러서야 면소재지인 단고리에 ‘암태도 소작인 항쟁기념탑’이 세워졌다. 일제시대뿐일까? 그 옛날부터 암태도 사람들은 참 대단했었다. 친일 지주와 일제 경찰에 맞서 싸우던 기개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미 선례가 있었다. 조선 태종8년(1408년)에 불과 20여 명의 암태도 주민들이 노략질을 하러 온 왜선 9척과 맞서 싸워 물리쳤다. 이들은 염간 김나진과 갈금 등이다. 염간은 소금막에서 자염(煮鹽)을 만들던 염부들이었다. 진짜 영웅들이 아닌가. 게다가 불과 20여 명으로 9척이나 되는 왜구들과 맞서 싸워 승리하다니. 신안군에서는, 아니 정부에서 이들을 기리는 기념비라도 세워야 마땅하지 않을까? 양반 영웅들만 기리지 말고.
“왜선(倭船) 9척이 연일(連日) 암태도(巖泰島)를 도둑질하니, 염간(鹽干) 김나진(金羅進)과 갈금(葛金) 등이 쳐서 쫓아버렸다. 나진(羅進) 등 20여 인이 혈전(血戰)을 벌여 적의 머리 3급(級)을 베고, 잡혀 갔던 사람 2명을 빼앗으니, 적(賊)이 곧 물러갔다.” 태종실록 8년 1408년 2월 3일 기사
소작쟁의의 핵심적인 인물은 암태도 출신의 서태석(1885~1958)과 박복영(1890~1973)이었다. 서태석은 1913년부터 7년간이나 암태 면장을 지낸 바 있다. 서씨는 600여 년 전 암태도에 처음 입도한 집안이기도 했다. 3·1운동을 계기로 서태석은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3·1운동 1주기 때 유인물을 배포하다 1년간 수감생활을 했고 신간회 사건 관련자로 수차례 옥고를 치렀다. 이후 군자금 확보를 위해 국내외에서 활동했는데 1922년 고향으로 돌아와 1923년, 암태소작인회를 결성해 소작쟁의를 주도했다. 러시아에 다녀온 것이 고향에서는 “모스크바에서 대학을 졸업했다”고 와전된 듯하다. 1924년 9월에는 암태도 소작쟁의 배후 조종자로 검거돼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28년 4월에는 다시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돼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서태석의 말년은 불행했다. 수차례 투옥되며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분열증을 앓았다. 해방된 조국에서 서태석은 거리를 전전하다 1958년 압해도의 어느 논에서 벼 포기를 움켜쥐고 죽음을 맞이했다.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었다는 이유로 해방 후에도 서태석은 금기의 대상이었다. 일가친척은 감시와 탄압을 받으며 고난의 세월을 살았다. 친일파의 나라가 만든 비극이었다. 2003년에야 비로소 서태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서태석의 며느리는 1929년 11월 3일에 일어난 광주학생의거의 주역 박기옥(1913~1947)이다.
암태도 항쟁 주도자 박복영 대통령 표창 추서
또 다른 주도자인 암태도 단고리 출신 박복영(1890~1973)은 1919년 목포지역 3·1운동으로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1920년 상하이로 망명 중 체포돼 신의주 형무소에서 또 옥고를 치렀다. 1923년에는 임시정부의 비밀문서를 가지고 들어오다 체포돼 1년6개월을 살았다. 암태도에 돌아온 뒤 1923년 암태청년회 회장을, 1924년에는 암태도 소작쟁의 주동자들이 투옥당하자 소작인회 회장을 맡아 활동했고, 1926년 자은도 소작쟁의도 도왔다. 이후 동아일보 목포지국장을 지냈다. 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됐고, 1990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암태도 소작쟁의를 촉발시킨 대지주 문재철(1882~1955)은 암태도 수곡리 출신으로 일제의 식민수탈정책에 편승해 토지 소유를 확대한 전형적인 식민 지주였다. 1920년대 당시 암태도·자은도 등의 도서 지역과 전라남북도 등지에 7.48㎢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다. 암태도에는 약 1.38㎢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1940년 문재철이 소유한 토지는 무려 16.5㎢로 늘어났다. 1941년에는 목포에 문태중학교를 설립했고 1941년 이후 일제의 침략전쟁을 적극 응원하던 친일 단체인 흥아보국단 및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문재철은 1993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추서받았다. 그는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는 등재됐지만 친일인명사전에서는 빠졌다. 민족을 위한 교육사업과 상하이임시정부의 자금조달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친일명단에서 제외된 것이다. 사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참으로 간단치가 않다.
■강제윤 시인은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이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 《섬을 걷다》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