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2년(조선 태종 2년) 제작된 동양 최고(最古)의 세계 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1402년(조선 태종 2년) 제작된 동양 최고(最古)의 세계 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조선이란 국호는 기자조선(箕子朝鮮)에서 유래했다. 조선의 건국세력은 고대 중국의 성인 기자를 계승한다는 도통론을 새로운 왕조의 대의명분으로 삼았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면서 내건 명분은 “작은 자가 큰 자를 거스를 수 없다”는 사대주의의 의리였다.

조선 국호의 유래

조선왕조가 스스로를 중화세계의 제후국으로 자리매김하고 국가체제를 그에 상응하는 형태로 재편하는 일은 세종에 의해 완수됐다. 세종은 하늘에 대한 제사를 폐지했다. 고려왕조는 중국과 조공·책봉관계를 맺었지만 하늘에 대한 제사를 고수함으로써 하늘 아래 자존하는 독립국으로서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았다. 대조적으로 조선왕조는 하늘과의 직접적 교섭을 포기했다. 조선왕조는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고 그에 조공하는 제후국으로서 이상적인 모델을 이뤘다.

고려와 대조할 때 조선왕조의 국례(國禮)가 보이는 또 하나의 두드러진 차이는 예의 주체가 넓게 사회화 또는 지방화했다는 점이다. 고려에서 예의 주체는 중앙정부와 국인에 한정됐다. 지방과 향인은 예의 주체가 아니었다. 군사국가답게 고려는 흉례(凶禮)를 제정하지 않았다. 군왕과 부모의 죽음을 맞아 2년간이나 길게 상복을 입어서는 군사에 충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려에서 흉례는 약식으로 치러졌다. 대조적으로 조선에서 지방은 중앙과 마찬가지로 예의 주체를 이뤘다. 농촌의 사대부와 서인은 각종 국례의 거행에 신분별 격식을 갖춰 참여했다. 나아가 개별 가문의 가례가 국례의 일환으로 승격했다. 조선왕조는 중국의 황제를 정점으로 해 농촌의 서인에까지 이르는 예의 국제질서로 자신의 국가체제를 순화시켜 갔다.

바닷길을 막은 ‘공도’ 정책

15세기에 들어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 심대한 변화가 발생했다. 명 제국이 바다로부터 철수한 것이다. 명은 북방의 유목민을 방어하고 내륙을 개발하는 자족적 농업국가로의 길로 들어섰다. 그 같은 명의 선택은 이후 동아시아의 후퇴와 서유럽의 추월을 예고하는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명은 바다에서의 자유통행을 금지했다. 명과 조선의 사행(使行)은 반드시 육로를 통했다.

조선왕조도 이 같은 국제질서의 변화에 순응해 바다로부터 철수했다. 15~16세기에 걸쳐 조선왕조는 제주도를 제외한 모든 섬의 인구를 강제로 비우는 공도(空島) 정책을 취했다. 나아가 10리 밖의 바다로 나가는 항해를 왕토로부터의 무단이탈로 간주해 처벌했다. 이전에 소개한 대로 신라와 고려의 바다는 활발하게 열려 있었다. 그 바다가 조선에 이르러 높은 쇄국의 장벽으로 바뀌었다.

세계 최초의 세계지도

1402년 한 장의 경이로운 지도가 그려졌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다. 경이롭다고 한 것은 아프리카 대륙을 그려 넣은 세계 최초의 세계지도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지도에 표기된 중앙아시아 서쪽의 지명은 모두 224개인데, 그 가운데 유럽 방면이 34개, 아프리카 방면이 15개다. 조선의 엘리트들이 이 같은 세계지도를 그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합성한 중국의 지도가 그런 정보를 담았기 때문이다. 그 원류는 원 제국이 그린 세계지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왕조의 세계 인식이 열려 있었던 것은 팍스 몽골리카의 유산이었다.

이 지도가 경이로운 다른 이유는 한반도를 얼추 온전하게 그린 최초의 지도이기 때문이다. 동해의 여러 섬은 울릉도를 제외하곤 환상이다. 우산도가 그려져 있지 않음은 그에 관한 환상이 미성립 상태임을 전하고 있다. 어쨌든 조선의 관료들은 중국을 세계의 대부분으로, 조선을 세계 제2의 대국으로 그렸다. 남쪽 바다에 놓인 일본은 조선의 4분의 1에 불과한 섬나라다. 지도는 중화세계의 아(亞)중심으로서 조선의 국제적 위상을 과시하고 있다. 이른바 소중화(小中華)였다. 이후 바다가 높은 쇄국의 장벽으로 바뀌면서 조선의 세계 인식은 더욱 기형적인 구조로 바뀌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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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고려왕조는 중국과 조공·책봉관계를 맺었지만 하늘에 대한 제사를 고수함으로써 하늘 아래 자존하는 독립국으로서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았다. 대조적으로 조선왕조는 하늘과의 직접적 교섭을 포기했다. 조선왕조는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고 그에 조공하는 제후국으로서 이상적인 모델을 이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