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18일 내년 시행되는 중소기업의 주 52시간 근로제에 대해 충분한 계도기간을 두겠다고 밝혔지만 중소기업계는 계도기간이 아닌, 법 시행 자체를 1년 이상 늦춰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오른쪽 두 번째)이 지난 13일 국회에서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첫 번째)를 만나 건의서를 전달했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정부가 18일 내년 시행되는 중소기업의 주 52시간 근로제에 대해 충분한 계도기간을 두겠다고 밝혔지만 중소기업계는 계도기간이 아닌, 법 시행 자체를 1년 이상 늦춰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오른쪽 두 번째)이 지난 13일 국회에서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첫 번째)를 만나 건의서를 전달했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주 52시간 근로제가 한국의 잠재성장률 하락세를 부추기고 있다. 한국 정부가 성장 둔화를 자초한 셈이다.”(영국계 투자은행 HSBC)

글로벌 투자은행(IB)과 해외 투자자들이 한국의 주 52시간제에 대해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 노동생산성이 개선되지 않고 있는데도 노동 투입량만 급격하게 줄인 탓에 성장 둔화세가 심화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18일 IB업계에 따르면 도키오마린애셋매니지먼트 등 해외 투자자들은 최근 미국계 IB인 BoA메릴린치 주선으로 기획재정부를 방문했다. 이들은 정부의 성장률·환율 전망과 함께 주 52시간제 보완대책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어본 것으로 전해졌다. IB업계 관계자는 “주 52시간제는 해외 투자자들이 한국 정부에 묻는 단골 메뉴 중 하나”라며 “일부 투자자는 ‘한국이 가진 자원이라곤 열심히 일하는 인적 자원뿐인데 오히려 일을 조금만 하도록 강제한 이유가 도대체 뭐냐’고 물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HSBC는 최근 ‘한국의 성장률 둔화’란 제목의 비공개 보고서(고객사에만 제공)를 통해 “미·중 무역분쟁과 반도체 약세 등으로 어려운 시기에 한국 정부가 주 52시간제를 밀어붙여 성장률 하락을 부추긴 건 특별히 아픈 대목”이라고 지적했다. 또 “확장적 재정정책은 성장률 제고에 도움은 되겠지만 공짜가 아닌 만큼 재정적자 확대를 초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골드만삭스도 지난 8월 내놓은 비공개 보고서에서 “내년부터 중소기업 채용 인력의 18%가량이 주 52시간제 적용을 받을 것”이라며 “엄격하게 설계된 주 52시간제가 총생산시간을 감소시켜 내년 성장률을 0.3%포인트 깎아내릴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의 투자매력이 떨어지면서 지난달 외국인의 국내 상장 주식 및 상장 채권 보유액은 687조원으로 2년 전인 2017년 10월(752조원)보다 8.7% 감소했다.

"가진 자원은 사람뿐인 한국
왜 일을 조금만 하라고 강제하나"


해외 투자자는 한국 채권이나 주식을 사들이기 전에 골드만삭스 HSBC 등 글로벌 투자은행(IB)이 작성한 ‘한국 리포트’부터 들여다본다. 투자 고용 소비 환율 등 거시지표 움직임과 정부 정책방향을 살펴보기 위해서다. 이걸로 성에 안 차는 ‘큰손’들은 직접 한국 경제의 컨트롤타워를 만난다. 올 들어서도 여러 투자자가 기획재정부를 다녀갔다. 주 52시간 근로제는 이럴 때마다 나오는 주요 질문 중 하나다. “해외 투자자는 한국의 ‘퍼주기식’ 재정정책보다 급격한 근무시간 단축정책에 더 주목한다. 기업경쟁력을 떨어뜨려 성장잠재력을 훼손시킬 수 있기 때문”(외국계 IB 관계자)이라는 설명이다.
"주 52시간이 한국 성장 가로막는다"…외국인 투자자들도 비판
‘유일한 자원’을 스스로 옭아매는 정부

외국계 IB들이 한국의 노동정책에 ‘쓴소리’를 하는 건 이번뿐이 아니다. 국제통화기금(IMF)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외에도 수많은 해외 IB가 노동시장 개혁을 주문했다. HBSC와 골드만삭스는 그중에서도 주 52시간제만 콕 집었다. HSBC는 최근 발간한 ‘한국의 성장률 둔화’란 비공개 보고서에서 “미·중 무역전쟁과 반도체 약세로 안 그래도 어려운 시기에 정부가 노동시간 공급을 줄이는 정책을 펼쳐 성장률 둔화를 가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HSBC는 최근 2년간 한국의 노동공급량을 끌어내린 주범으로 주 52시간제를 지목했다. 주당 36시간 이상 근로자 비중이 2016년 1~8월 80.0%에서 올해 1~8월 77.9%로 소폭 줄어든 데 비해 주로 정규직인 45시간 이상 근로자 비중은 같은 기간 45.1%에서 37.4%로 급감했기 때문이다. HSBC는 “최근 2년간 한국 근로자의 근무시간은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더 많이 줄었다”며 “(노동생산성은 그대로인데) 노동공급량이 줄어든 탓에 성장률 하락세를 가속화시켰다”고 강조했다.

골드만삭스도 ‘아시아 호랑이들이 겪는 어려운 한 해’란 비공개 보고서에서 “한국은 공급 부문에서의 쇼크가 성장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며 “주 52시간제로 인해 총 생산시간이 줄면서 내년 성장률의 0.3%포인트를 끌어내릴 것”이라고 했다.

한 외국계 증권사 관계자는 “한국 정부는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시장 저평가)’의 원인을 불투명한 지배구조 등 기업 탓으로 돌리지만 상당수 해외 투자자는 오히려 주 52시간제,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등 부작용이 예상되는 정책을 앞뒤 재지 않고 밀어붙인 정부가 문제라고 본다”고 말했다.

“재정은 공짜 아냐”

HSBC는 한국의 확장적 재정정책도 문제 삼았다. HSBC는 “한국 정부의 재정 확대 정책이 몇 년간 지속될 것”이라며 “당장 내년 경제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이는 공짜가 아니다”고 경고했다. 이어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의 0.5%였던 관리재정수지 적자 규모가 올해 1.9%, 내년 3.6%로 증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골드만삭스는 일본의 수출규제를 위험요인으로 꼽았다. 골드만삭스는 보고서에서 “한·일 무역갈등이 공급망을 붕괴시킬 수 있다”며 “이는 투자자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했다.

해외 IB들은 주 52시간제 등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정부의 정책과 미·중 무역분쟁의 장기화 등을 이유로 한국의 성장률 전망치를 계속 하향 조정하고 있다. 국제금융센터가 집계하는 9개 주요 IB의 올해 성장률 전망치 평균은 1.9%다. 이 중 HSBC(2.0%)를 제외한 8곳이 올해 한국의 성장률을 1%대로 예상했다. BoA메릴린치는 올해(1.8%)보다 내년(1.6%)이 더 나쁠 것으로 봤다. UBS 역시 올해(1.9%)에 이어 내년(1.9%)에도 성장률이 2%에 미치지 못할 것으로 전망했다.

해외 IB들이 앞다퉈 한국 성장률을 끌어내리면서 해외 ‘큰손’들도 국내 증시에서 차츰 발을 빼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달 외국인의 국내 상장주식 보유액은 560조5790억원으로 2년 전인 2017년 10월(651조2020억원)에 비해 90조원 이상 줄었다. 같은 기간 상장채권은 101조원에서 126조원으로 25조원 확대됐다. 정부가 국채 발행을 늘린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다.

오상헌/이동훈/이태훈 기자 ohyeah@hankyung.com